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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 제42호

'낙태 할 권리' 쟁취는 노동조합의 임무!

이탈리아 제1노총 여성국장 로레다나 타데이 인터뷰

  • 김진영
한국과 이탈리아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저출산을 해결하겠답시고 여성을 '아이 낳는 기계'로 대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에 '가임기 여성지도'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생식의 날'과 "아름다움에는 때가 없어도, 생식력에는 때가 있어요" 같은 공익광고가 있다. 한국엔 아직도 형법상 '낙태의 죄'가 있다면, 이탈리아엔 합법적인 임신중지 시술을 거부하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답답한 상황에 시원한 단비가 되고 있다. 이탈리아 제1노총(Confederazione Generale Italiana del Lavoro, 이하 CGIL)은 올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어제와 같이, 내일을 위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40년 전 쟁취한 194호 법안(임신중지 합법화)을 기념하며, 여성의 권리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 투쟁으로 미래를 열자는 의미에서다. 여성의 '낙태할 권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조합, CGIL의 로레다나 타데이 여성국장을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이탈리아 제1노총(CGIL) 여성국장 로레다나 타데이 씨.
 
오늘보다 경제위기의 여파와 돌봄노동이 여성에게 전가되는 현실, 심각한 저출산 현상, 졸속 정책들을 만들어 아이 낳기를 강요하는 국가. 한국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입니다. 이탈리아에서도 이러한 현실이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 이탈리아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CGIL 이탈리아 역시 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여성 취업률이 49.3퍼센트인데, 유럽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유럽 평균 여성 취업률은 60퍼센트 이상입니다. 이탈리아보다 낮은 나라는 그리스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이탈리아 남부 지역의 여성 취업률은 30퍼센트 안팎으로, 여성 내 불평등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여성에게 모성과 노동은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입니다. 모성을 선택했기 때문에 일터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첫 아이를 가진 뒤 해고되거나 퇴사를 강요당합니다. 작년에는 3만여 명의 여성이 아이를 낳고 직장을 떠나야 했습니다. 

여성 시간제 일자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시간제로 일하면 임금이 크게 감소합니다. 시간제 일자리로 여성은 빈곤해지고,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잃게 됩니다. 이탈리아에서 여성 일자리는 ‘열악한 일자리’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여성의 고등교육 이수율이 남성을 앞질렀는데도 말입니다. 성별 임금격차 역시 커지고 있습니다. 보육을 비롯한 사회서비스가 부족해, 여성에게 더 부담이 됩니다.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나이든 가족들을 돌보는 부담 역시 커지고 있습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정부는 졸속적이고 효과 없는 정책들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안정적 일자리와 주거·보육시설이 확보되고, 임신·출산으로 인해 불이익을 겪지 않아야만 사람들은 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이탈리아 '생식의 날' 공익광고 포스터. "아름다움에는 때가 없어도, 생식력에는 때가 있어요" 같은 문구가 이탈리아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오늘보다 임신중지권과 여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CGIL은 어떤 활동을 했나요?
 
CGIL 이탈리아 여성들은 1978년 194호 법안으로 임신중지 합법화를 쟁취했습니다. 지금은 소위 ‘양심적 이유’로 임신중지 시술을 거부하는 의료인이 너무나 많아 1978년의 승리가 퇴색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내 ‘양심적 거부자’의 비율은 70퍼센트, 일부 지역에서는 무려 90퍼센트에 달합니다.

2013년 CGIL은 유럽 사회권 위원회에 이탈리아 정부를 제소했습니다. 상황을 정부가 손 놓고 보고 있으면서, 유럽 사회 헌장에 보장된 시민의 기본권들을 침해했기 때문입니다. 임신중지 ‘접근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 여성은 건강권과 임신중지권을 위협받습니다. 경제적 능력과 거주 지역에 따라서도 여성의 임신중지 접근권 격차가 큽니다. 이 역시 ‘차별 금지’ 조항에 위배되는 사항입니다.

한편 ‘양심적 거부’를 하지 않는 의료인은 ‘공정·안전·건강·존엄하게 일할 권리’을 침해받습니다. 임신중지 시술을 제공하는 의료인이 얼마 안되기에 임신중지 관련 업무가 소수의 의료인에게 집중됩니다. 이들은 다른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임신중지 관련 업무만을 도맡고 있으며,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립니다.

이탈리아의 상황을 조사한 유엔 인권 위원회는 ‘양심적 거부자’가 너무 많아 합법적인 임신중지가 어려워진 것을 우려스러워 합니다. 그들은 “이탈리아 정부는 자유로운 임신중지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CGIL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올해만 해도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지켜내는 것을 3월 8일 여성의 날의 핵심 과제로 걸고,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대중집회 및 행사들을 개최했습니다. 
 
"자유로운 모성, 자유로운 임신중지를 위해"란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1977년 밀라노 여성들. 이탈리아에서는 다음 해인 1978년 임신중지가 합법화되었다.
 
오늘보다 이탈리아의 노동자운동은 수십 년 전부터 임신중지 합법화를 비롯해 여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뤄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노동자운동의 위기 속에서, 또 많은 유럽 국가들이 보수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CGIL 올해는 194호 법안을 쟁취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임신중지 합법화는 페미니즘 운동, 노동조합, 사회단체들, 정치권, 연구자들과 학계, 이 모두가 광범위한 연대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쟁취한 성과였습니다. 
유럽의 극우화는 이탈리아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유럽의 임신중지 반대 운동은 공격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임신중지의 권리를 지켜내는 싸움은 최근에 특히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5월 로마에서는 “생명을 위한 행진”이라는 이름의 임신중지 반대 집회가 열렸습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참석했고, 의회에서는 194호 법안 폐기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조직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경고하며 이탈리아 의회에게 공식 서한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여성들과의 너른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노동조합에서 활동하지 않는 여성들도 포함됩니다. 여성의 권리가 후퇴하는 것을 막고 새로운 권리들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정치적 조직의 차이를 넘어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방침입니다. 임신중지 반대 운동이 커지는 것은, 그들이 여성의 자유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광장을 점령할 것입니다.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남성이라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CGIL은 조합원 교육이 활성화되어있습니다. 작년과 올해는 성평등과 일터에서의 성폭력 문제에 대한 남성 조합원 교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여성살해’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작년에만 160여 명의 여성이 가까운 남성에게 살해당했고, 수백만 여성이 일터에서 성폭력을 경험했습니다.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는 남성입니다. 여성들끼리만 모여서 이 문제를 이야기 나눌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태도를 바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교섭 훈련에도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은 주로 남성입니다. 때문에 소위 ‘성중립적’ 관점은 결국 남성의 관점이 되기 십상이고, 성폭력의 문제가 잘 제기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94호 법안을 지킬 것이다" 현수막과 함께 행진하는 CGIL.
 
오늘보다 한국의 법은 ‘정치 파업’이라는 식으로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을 제한합니다. 여성 문제는 ‘여성만의’ 단체가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동조합’이 ‘여성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CGIL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CGIL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CGIL의 기본 정신입니다. 우리는 여성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위해서 싸워온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특히 진보정당 운동이 몰락하면서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우리는 노동조합이 민주주의의 주요한 기둥으로서, 더 평등한 사회, 삶과 노동의 조건 증진, 남성과 여성 노동자 간 격차 축소와 갈등 극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194호 법안(임신중지 합법화) 쟁취 40주년을 기념하는 CGIL의 2018년 여성의 날 포스터.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위해 계속 투쟁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슬로건은 "어제와 같이, 내일을 위해"
 
오늘보다 CGIL은 임신중지 시술을 거부하지 않는 의료노동자의 노동권과 존엄하게 일할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고 제기했습니다. 시술을 거부하는 의사들을 비난하는 것보다 노동조합으로서의 입장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프레임으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CGIL 우리는 의료인들의 노동권이 중요하다는 걸 현장에서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 ‘양심적 거부’를 하지 않는 의료인들은 커리어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실제로 경제적인 타격을 받기도 합니다. 많은 젊은 의사들이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기 시작하자마자 ‘양심적 거부자’ 선언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성에게 필요한 시술을 제공하겠다는 의료인을 채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임신중지 합법화 법을 지키고, 여성의 건강권을 제대로 보장할 수 있는 의료인들에게만 의료를 맡겨야 합니다. ●
 
오늘보다는 CGIL에게 인터뷰 질문을 보내면서 한국에서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을 결성하고 7월 7일 낙태죄 폐지 촉구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CGIL은 앞으로 한국 여성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연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노동조합이 여성의 ‘낙태할 권리’를 위해 움직여 온 것은 이탈리아만의 일이 아니다. 5월 25일 아일랜드에서는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헌법 조항 폐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66.4퍼센트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6월 13일 아르헨티나에서도 임신 14주 이내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이 나라들에서 노동조합들은 여성의 권리를 위해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낙태죄 위헌 폐지촉구 퍼레이드

2018년 7월 7일 오후 5시-8시 광화문 광장에서 낙태죄위헌·폐지촉구 퍼레이드가 진행됩니다. 함께합시다. 

 

 


 
덧붙이는 말

'낙태'는 '태아를 떨어뜨려 죽인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로, 이미 임신중지에 대한 낙인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에 이 글에서는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를 지칭하는 경우에만 '낙태죄'를 사용하고, 그밖에는 되도록 '임신중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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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노동조합 낙태 낙태죄 낙태 할 권리 임신중지 생식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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