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8/06 제41호
낙태죄는 위헌이다! 여성의 권리와 존엄을 외치다
5월 24일 오전 헌법재판소 정문 앞, 진기한 풍경이 펼쳐졌다. “여성이 낙태를 강요받지 않을 수 있어야 올바른 법입니다.” “정부는 안전한 출산과 양육 환경을 책임져야 합니다.”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줄지어 선 이들은 ‘낙태법유지를바라는시민연대’ 회원들이다. 프로라이프의사회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낙태죄의 존치를 촉구하며,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요구와 얼핏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근거를 들었다.[1] 낙태죄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권리와 연관될 뿐 아니라 출산과 양육을 둘러싼 사회적 책임의 문제라는 사실, 그리고 낙태죄 이슈에 대해 정부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 등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낙태죄’, 다시 심판대에
이날 오후 헌재 대심판정에서는 낙태죄 사건 공개변론이 열렸다. 낙태죄, 즉 형법 제27장 제269조 1항(자기낙태죄)과 제270조 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의사낙태죄)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여부를 두고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 언론은 실시간으로 대심판정의 분위기를 전했다. 시민들의 방청을 허용하며 공개 변론을 진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낙태죄 위헌 소원을 둘러싼 세간의 관심은 뜨거웠다. 2012년 헌법재판소는 태아의 생명권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낙태죄 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태아는 모체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므로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공익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사익보다 중하다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재판관 의견이 반반으로 팽팽하게 갈렸고, 이후 2016년 낙태죄 폐지 검은 시위와 2017년 청와대 국민청원 등 우리 사회의 낙태죄 폐지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대립을 문제제기하며 여성의 현실을 제대로 알리고자 했던 행동은 6년이 흐른 후 낙태죄를 다시 심판대에 올렸다.
우리 사회의 낙태 현실
한국에서 낙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를 어길 시 형법으로 처벌된다.(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 단 ‘우생학적,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허용할 뿐이다. 그러나 남아선호사상과 산아제한정책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에서 낙태는 공공연한 일상이었다. 최근에는 ‘경제적 준비가 되지 않아서, 학업과 일을 계속해야 해서, 이미 낳은 아이로 충분해서,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 술·담배 및 약물복용으로 아이 건강이 걱정되어서’ 등 실로 다양하고 현실적인 이유로 낙태가 행해지고 있다.
지난 3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 결과, 임신중단을 경험한 여성이 21퍼센트, 임신중단을 고려하거나 시도하거나 경험한 적이 있는 여성의 비율은 29.6퍼센트이었다. 임신경험자로 한정하면 임신중단을 경험한 이들의 비율이 41.9퍼센트에 달했다. 현행 모자보건법상 허용기준에 해당한 합법적 사유는 1.1퍼센트에 불과했고, 나머지 98.9퍼센트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 불법적인 사유였다. 이처럼 유자녀 여성 2명 중 1명꼴로 형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현실, 현행법에 따르면 대한민국 여성들 대다수가 이미 범죄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성의 경험을 삭제해온 낙태죄
떨어질 락落과 태아 태胎의 한자로 조합된 ‘낙태’에 애초부터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임신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험은 삭제되고 태아만 남는다. 왜 임신을 중단하고자 하는지, 임신상태를 유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은 관심이 대상이 되지 못했다. 임신과 출산 및 양육이라는 한 사회의 재생산 영역의 책임은 여성에게 전가되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는 도덕적 비난뿐만 아니라 사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어왔다.
낙태와 모성
낙태는 자유로운 성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성적방종으로 간주되며, 나아가 모성을 방기하는 행위로 비난받는다. 이번 낙태죄 위헌소원의 이해관계인인 법무부 역시 ‘임신과 출산은 여성에게 충분한 자유가 보장된 성행위에 의해 나타난 생물학적인 결과’이므로,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은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는 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임신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변화이므로 그것을 중단하는 행위는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고, 모성은 임신과 출산으로 획득되는 자연의 특성이므로 임신중단은 모성의 지위를 인위적으로 벗어나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법무부는 임신중단은 권리가 아니며, 낙태를 한 여성에게 모성을 전제로 한 헌법적 보호를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의 성교가 생물학적인 이유만으로 발생하지 않듯이,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 역시 결코 자연스러운 과정만으로 여길 수 없다. 아이를 맞이할 신체적·심리적 준비가 되었는지, 아이를 키울 경제적·사회적 조건을 갖추었는지, 파트너와의 관계 및 돌봐야 할 다른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 등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결정에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고민이 동반된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이미 뱃속에 있는 생명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하고자 한다. 임신상태를 유지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의 결정은 순간적인 무책임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삶 전체를 두고 심사숙고하는 책임감에서 나온다. 또 모성의 방기도 아니다. 차라리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모성이 발현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낙태죄 폐지하고 모성의 권리 쟁취하자
인간의 모성은 임신과 출산으로 획득되는 자연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고유한 권리다. ‘언제 아이를 낳아 누구와 함께 키울 것인지’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될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 즉 권리를 회수하는 방식으로서의 낙태의 자유까지 모두 모성의 영역에 속한다. 낙태의 자유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즐거운 과정일리는 없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든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자유가 보장될 때에야 자발적 권리의 행사 역시 가능할 것이다.
국가는 권리의 주체인 여성의 판단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산부인과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온 직후 병원 로비에 상주하는 태아보험회사 직원부터 만나고 낙태에 대한 정보는 음성적으로 구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국가의 상담 제도를 통해 임신과 출산부터 낙태에 대한 것까지 필요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제공받고 안전한 낙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 보다 성숙한 사회는 어느 쪽이겠는가?
2012년 헌법재판소는 ‘태아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므로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8년 낙태죄 위헌 여부를 심판하는 재판정에 선 청구인 측 변호사는 질문을 던졌다. “태아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태어나고 인간의 지위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정이 있어야 태어나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현명한 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누리는 사회일 것이다.
여성들은 이제 자신의 경험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성이 범죄자가 아니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오히려 낙태죄 자체가 위헌이라며 심판대에 올렸다. 여성들은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낙태죄 폐지를 위한 노동자·사회운동의 과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공개변론이 열린 다음날, 아일랜드에서는 낙태죄 폐지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찬성 66.4퍼센트, 반대 33.6퍼센트. 낙태 금지 헌법 조항은 폐기될 운명에 놓였다. 수정 순간부터 태아에게 생명권을 부여하며 낙태를 엄격히 금지해온 가톨릭 국가 아일랜드에서조차 낙태 합법화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낙태죄 폐지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우리 역시 여성의 건강권, 섹슈얼리티와 모성에 대한 권리, 임신·출산·육아 전반에 걸친 재생산에 대한 권리 등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요구하는 출발점에 서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낙태죄 위헌 결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에 대한 위헌 판결은 지금까지 생명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해 온 역사를 성찰하고 국가와 사회가 헌법에서 보장되는 생명권과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을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보장할 수 있는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 될 것”이라 밝혔다. 직후 전국적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서명운동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사회운동도 제 역할을 해내야 한다. 이탈리아의 사례가 참고가 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낙태는 합법이지만 산부인과 의사들이 종교적 이유로 낙태수술을 거부하여 실질적인 낙태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 이에 이탈리아노총(CGIL)은 2016년 유럽연합 사회권위원회에 이탈리아의 현실을 알리고, 2018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는 이탈리아 전역 30여 개 지역에서 낙태의 자유를 위한 집회, 기자회견, 교육 등 다양한 실천을 조직했다.
여성의 건강권이 박탈되고 경제적 지위와 거주지에 따라 생기는 차별. 낙태시술을 시행하는 의사들의 노동권과 존엄하게 일할 권리 역시 침해되고 있는 현실. 한국 사회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이탈리아노총의 실천이 시사하는 바가 큰 이유다. 민주노총도 낙태죄 폐지를 노동자의 요구로 걸고 투쟁에 나서면 어떨까.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해고,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굴레 등 여성노동자를 둘러싼 열악한 현실과 낙태죄 폐지 투쟁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자.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여성들과 연대하자. 노동자운동과 여성운동의 연대를 통해 낙태죄 폐지 이후의 사회를 함께 꿈꾸고 기획하자. ●
Footnotes
- ^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건강과대안, 녹색당, 불꽃페미액션, 사회변혁노동자당, 사회진보연대, 성과재생산포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회, 전국학생행진, 장애여성공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페미당당, 페미몬스터즈,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등의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