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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 제37호

낙태죄 폐지, 여성의 재생산권 논의를 위한 시작

  • 박상은
2017년 11월 26일 청와대는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국민청원에 답변했다. 약속한 것은 실태조사를 재개하겠다는 것뿐이지만, ‘현행 법제가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 있다’는 언급 등을 볼 때 낙태죄 폐지에 긍정적인 답변이었다. 낙태 비범죄화를 주장한 조국 민정수석의 논문이 회자되었고,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는 헌법재판소의 분위기가 낙태죄 폐지 쪽에 긍정적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한편 천주교에서는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 서명을 시작했고, 2016년 검은 시위를 주도한 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또 한 번의 검은 시위에 나섰다. 올해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여부 심리가 마무리되고, 8년 만에 재개된 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낙태죄는 또 한 번 사회적인 쟁점으로 부각될 것이다. 
 

한국의 낙태죄 논의

낙태죄는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서 일부 경우에 한해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였는데, 우생학적 허용사유 등의 조항 재구성과 사회경제적 사유 추가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오랫동안 있었다. 이처럼 법적으로는 낙태가 거의 허용되지 않음에도 현실에서는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2010년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15~44세 가임기 여성들 10명 중 3명이(29.6%) 낙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형법 제27장 제269조 1항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모자보건법 제14조에 의한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1) 우생학적,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5)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여성들에게 상당히 보편적인 경험인데도 한국에서 낙태 관련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가,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등장으로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한다. 이들은 불법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들을 고소·고발하며 생명의 가치를 옹호하는 역할을 자임했는데, 이미 이명박 정부는 이에 공명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2009년 초 보건복지부 장관의 “낙태율을 반으로만 줄여도 출산율 증가에 큰 도움이 된다”는 발언에 이어, 그해 11월 제1차 저출산 대응 전략회의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낙태 문제를 언급하였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대통령의 발언에 맞춰 낙태 줄이기 캠페인 진행과 낙태 단속 강화 입장을 내고 있던 참이었다. 이에 더해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의사들을 고소·고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 시술에 위험부담을 느끼자 낙태 시술을 거부하거나 시술비용이 치솟는 일이 일어났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등장과 낙태 근절로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주장은 서구의 낙태합법화에 대한 백래시(반격), 친가족 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미국·영국·이탈리아 등 서구 국가들은 1960~70년대 여성운동의 영향으로 낙태가 합법화됐으나, 사회경제적 위기를 가족의 강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흐름과 더불어 낙태권에 대한 공격이 이뤄졌다. 미국에서는 80~90년대 친가족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1992년 케이시 판결로 각 주 정부가 낙태 규제 조항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낙태 합법화의 문을 열었던 ‘로 대 웨이드 판결(1973)’의 입장을 부분 수정한 것이었다. 1978년에 낙태가 합법화된 이탈리아에서도 출산율이 하락하자 가톨릭과 우파를 중심으로 2000년대에 낙태권에 대한 공격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활동이 잠잠해진 이후에도 국가는 낙태죄를 유지·강화하는 방향을 수정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2012년 8월 낙태 시술 조산사에게 처벌을 내리는 형법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헌법소원에 낙태죄 합헌 판결을 내렸고, 2016년에는 의료인의 비도덕적 의료 행위에 임신중절수술을 포함시키는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의 일부개정령이 입법예고 되었다가 여성들의 반발로 취소됐다. 

이번 낙태죄 폐지 논의는 국가의 낙태 단속이나 낙태죄 강화가 아니라 여성들의 청원으로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운동의 조직적 힘이 크지 않고, 낙태 문제를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양자 간 힘겨루기로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통해 확대해야 할 여성의 권리는 무엇인가? 일단 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건강권

먼저 여성의 건강권을 위해 낙태죄 폐지가 필요하다. 낙태접근권의 제한은 낙태율 감소에는 별반 기여하지 않는 반면 여성의 건강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낙태가 비합법인 국가에서는 대부분 안전한 낙태 시술을 받을 의료기관 자체가 부족하거나, 높은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자가 낙태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여성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루마니아에서는 낙태가 불법화되기 시작한 1965년부터 1984년까지 100,000건의 출산 당 모성사망률이 21건에서 128건으로 증가했다. 안전하지 못한 낙태로 인한 여성의 입원은 세계적으로 연간 5백만 명이며 6만 7천여 명이 사망하고 있다. 

낙태가 합법화된 국가에서도 문제가 없지 않다. 미국의 경우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히스패닉이나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에서 안전하지 못한 낙태가 증가하는 추세다. 계층과 인종에 따라 권리도 불평등하게 주어진다. 한국의 경우도 의료시설 여건 상 낙태 시술의 위험성은 높지 않지만, 낙태가 불법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이 든다. 이 때문에 적절한 시술 시기를 놓치는 사례가 발생하는데, 특히 정보가 적고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미성년 여성들에게 위험이 가중된다. 

낙태가 합법화되어 있고 국가의 공공보험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낙태 시술이 공공재원에서 지원된다. 덴마크, 독일, 루마니아, 영국 등에서는 공공병원에서 시술을 받는 경우 무료거나 아주 적은 비용만이 든다. 프랑스는 의료보험에서 낙태 시술 비용의 80%를 지원하며 저소득층에는 무상으로 제공한다. 

국민청원의 주요 내용이었던 미프진(먹는 낙태약)의 도입도 여성의 건강권이라는 관점에서 필요하다. '먹는 낙태약'의 주요 성분인 미페프리스톤은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해 안전성과 효과를 인정받았고, 마취가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다. 전신 마취가 필요한 낙태 시술보다 여성의 몸에 부담이 적은 것이다. 먹는 낙태약은 임신 9주 전까지 안전하고, 낙태 성공률은 90~95%에 이른다. 현재 50개국에서 승인 후 판매 중인데, 핀란드에서는 2009년 시행된 낙태의 84%가, 스코틀랜드는 70%가,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는 68%가, 프랑스는 49%가, 영국은 9주 미만 낙태의 52%, 전체 낙태의 40%가 약물적 낙태로 이루어졌다. 

한국도 낙태 시술비용의 부담이 낙태접근권을 제한하고 있는 만큼 의료보험 지원 등으로 낙태 시술비용을 낮춰야 한다. 또한 외과적 시술보다 안전한 먹는 낙태약의 합법적인 도입도 필요하다. (이미 먹는 낙태약의 불법 유통이 몇 차례 적발된 적이 있다.) 그러나 낙태가 불법이고 범죄인 상태에서 이러한 논의는 시작할 수조차 없다.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건강권을 확보하기 위한 첫걸음인 이유다. 
 

여성의 몸을 여성 자신이 통제할 권리

여성은 자신의 몸을 통제할 권리가 있다. 모성을 전제로 하지 않은 성을 누릴 권리도 있으며 성관계로부터 철수할 권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페미니즘의 선언이 현실에서 구현되기는 쉽지 않은데, 여성의 성은 남성과 달리 임신·출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욕의 권리에는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위험이 항상 뒤따르며,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제하기 전에 산아제한정책이든 저출산 대책이든 필요에 따라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는 국가의 정책, 이데올로기가 앞선다. 따라서 여성이 자신의 몸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의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한다. 

낙태죄는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크게 제약한다. 어떤 피임 방법이라도 실패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낙태권은 열려있어야 한다. 피임실패의 문제를 떠나서 더 큰 문제는 많은 이성애 관계에서 피임과 섹스의 주도권이 남성에게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은 콘돔 사용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히 존재하고, 기혼이라는 이유로 남성이 피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다. 피임의 주도권을 여성이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지막 피임 수단인 낙태의 권리마저 가로막혀버리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발현될 수 없다. 

낙태 불법화는 법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경우에도 배우자 동의를 받도록 하고, 여성만 낙태죄 처벌대상이 되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는 효과도 있다. 여성이 건강 악화로 낙태를 고려하는 경우, 경제적 조건 상 아이를 낳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우, 남편·남자친구와의 관계가 파탄 난 경우에도 남성(혹은 남성의 집안)이 낙태를 만류하거나 사후적으로 여성을 고소하기도 한다. 한 언론사가 2012년 8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5년간 낙태 관련 판결 80건을 입수해서 분석한 결과, 남자친구 또는 남편의 신고로 법정에 선 여성이 다수였다고 한다.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있는 조건, 성욕의 권리를 확보할 조건을 마련하는 첫걸음이다.   
 

여성의 재생산권

재생산권이란 출산 여부, 시기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로 인간의 재생산 활동에 관련된 포괄적 권리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성관계, 피임, 임신, 출산, 임신 종결을 비롯한 재생산 활동에 대한 권리이자 출산 이후 건전한 양육을 위한 사회적 국가적 책임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여성의 출산 선택에는 경제적 여건, 남편과의 평등한 부양과 돌봄 책임, 사회로부터의 지지와 같은 재생산권의 보장 여부가 ‘이미 언제나’ 선행하여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최근 저출산 문제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에서 여성의 재생산권은 매우 취약하다. 아이의 양육에 점점 더 많은 경제적 비용이 들어감에도 국가의 책임은 부족하고, 가족 내의 평등한 돌봄 책임은 여전히 요원하며, 출산 이후에 자신의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도 드물다. 여성의 출산 선택을 가로막는 것은 이런 문제이지, 낙태를 단속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렇게 여성의 재생산의 권리를 사고할 때만,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낙태의 논의 구도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2012년 헌재가 낙태죄 합헌을 선고했을 당시의 다수의견과 반대의견 양자 모두 자기낙태죄 조항을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과 임부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사익의 충돌’로 보았다. 여전히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은 서로 제로섬 관계에 놓여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여성의 복합적인 고민(자신의 삶, 가족 및 파트너과의 관계, 경제적 여건, 태어날 태아의 행복 등)을 단순화하여 낙태를 여성 자신만을 위한 개인주의적 선택으로 만든다. 여성의 재생산 과정 전체를 사고하며 낙태죄 문제를 돌아볼 때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를 동시에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변화의 첫걸음, 낙태죄 폐지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첫걸음이자, 여성의 성욕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첫걸음이며, 여성의 재생산권을 사고하는 첫걸음이다. 

여성권의 확보는 여성들의 현실과 조건이 어떠한지,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논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낙태죄는 공론장 자체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다. ‘낙태는 죄’라는 이 사회의 규율은 낙태를 한 여성들이 자신의 행위에 죄책감을 갖게 만들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여성들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고립된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 고립을 뚫고 여성들의 청원과 시위로 새로운 장이 열린 만큼 2018년에는 낙태죄 폐지의 공론장, 페미니즘의 공론장을 더 넓혀 보자. 말하고 싸워 낙태죄를 없애자. 더 많은 여성들이 말하고 투쟁할 수 있도록 말이다. ● 
 

참고 자료

동아일보, ““너, 고소할 거야” 이별 여성 협박도구로 악용되는 낙태죄”, 2017.11.28.
양현아, <낙태에 관한 다초점 정책의 요청: 생명권 대 자기결정권의 대립을 넘어>, 《한국여성학》, 2010
윤정원, <건강권으로서 낙태 및 피임의 권리를 다시 생각한다>, 건강과대안 이슈페이퍼, 2013
이연우,  <낙태 범죄화와 여성 섹슈얼리티 통제>, 《공익과 인권》, 2015
최윤정, <낙태 단속이 아니라 여성의 재생산권리를 이야기할 때다>, 《사회운동》, 2010년 3-4월호

 

 

[워크숍] “여성의 재생산권과 낙태죄 폐지” 

 

일시 : 2018년 2월 6일(화) 19시 30분 
장소 :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서울시 연남동 259-12 거산빌딩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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