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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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 제31호

여성운동 전성기, 만들 수 있을까?

오늘날의 여성억압과 대안 찾기

  • 박상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진행된 대학가 반성폭력 운동, 2000년대 중반 한꺼번에 터져 나온 여성 비정규직 투쟁 이후 여성운동은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유연근무제나 시간제 일자리 반대, 일가정양립 정책에 대한 비판 등 페미니스트들은 계속 분투했지만,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알파걸, 골드미스 등의 신조어가 생기면서 전 사회적으로는 이미 평등이 확립됐으며, 오히려 ‘여성상위시대가 도래했다’는 담론이 유통됐다.

그러나 여성들의 현실은 그대로였다. 직장 내 보이지 않는 차별과 성희롱은 여전히 만연했고, 아이를 낳고 돌아오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저임금·비정규직 일자리였다. 일과 가사노동의 이중부담은 심각하게 낮은 출산율로 드러나고 있었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

페미니즘의 영향력 약화는 성차별에 문제제기할 언어도, 조직도 없었던 평범한 여성들에게 더 가혹했을 것이다. 불만은 가슴 속 깊이 숨겨져만 있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 들끓던 분노가 터져 나올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2015년 2월, 영화평론가 김태훈의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글로 온라인에서 촉발된 #나는페미니스트다 선언운동이 그 시작이었다.

같은 해 여름, 메갈리아는 미러링(거울을 보는 것처럼 따라 하기)을 통해 그동안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자행되었던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발언에 대한 여성들의 광범위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들은 여성신체의 대상화·여성노동에 대한 저평가 등에 대해 분노했고, ‘몰카’ 등 상대의 동의 없이 신체를 촬영·배포하는 사이트인 소라넷을 폐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16년 5월 17일에 일어난 강남역 살해 사건은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여성들은, 수많은 포스트잇을 보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학교와 직장에서의 불편함을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닐까’ 하며 참아왔던 여성들은 이 문제에 대해 집단적으로 발언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5~2016년의 이러한 흐름은 소위 ‘넷페미’ 혹은 ‘영영페미’(90년대의 영페미니스트보다 더 젊은 세대라는 뜻)로 일컬어지는 그룹의 세력화로 이어졌다. 페미니즘 도서 열풍 등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높아진 것도 중요한 효과 중 하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여성운동 전반을 고무시켜, 페미니즘의 여러 의제에 대한 활발한 실천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여성운동의 시도는 여성의 노동권을 비롯해 성(性)에 대한 권리, 출산통제 등 여성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성의 노동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하는 ‘성별임금격차’(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약 36퍼센트다)는 성차별이 사라졌으며 여성상위시대가 도래했다고 이야기하는 네티즌들에게 여성들이 가장 자주 내보이는 객관적 자료 중 하나였다.

노동계는 성별임금격차 문제에 오랫동안 주목해왔지만,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이후 동일사업장 내 직접적인 임금차별이 거의 사라지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심 중이었다. 성별임금격차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확인하자 언론도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해외 사례도 적극적으로 알려졌다.

아이슬란드에서는 2005년 남녀의 동등한 임금을 요구하며 2시 8분에 파업을 시작했는데, 남녀의 임금격차를 고려하면 이 시간부터 여성의 노동은 무임금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이 파업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2008년에는 2시 25분, 2016년에는 2시 38분부터 파업이 시작됐다.

프랑스, 영국 등에도 성별임금격차 문제를 제기하는 시위가 퍼져나갔고, 이에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하는 집단적인 행동이 기획됐다. 민주노총과 여성운동 단체들은 2017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3시에 일을 마치고 거리로 나서자는 ‘3시 스탑’ 조기퇴근 캠페인을 벌이고 전국 각 도시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시위를 진행했다.
 
 
성별임금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이유는 여성이 출산과 육아 이후 노동시장에 복귀 시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가 저임금 일자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자리는 여성이 본래 집에서 해왔던 일, 청소·요리·돌봄과 관련된 직종이 대부분이다. 즉 여성의 저임금은 여성 직종의 가치 평가와도 깊이 연관된다.

최근 여성 직종의 가치 절하에 대한 문제의식도 사회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는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에 걸쳐 청소노동자, 학교 급식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집단적인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이 급식실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을 ‘밥하는 아줌마’라며 비하하는 발언이 크게 비판받은 것이 우연은 아니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흐름은 점점 강해지고 있고, 우리 일상 속 깊이 들어와 있다. 작년 가을 여성민우회는 ‘포스트잇 액션’ 프로젝트를 통해 지하철역 성차별적 광고판 등에 ‘안 웃겨요’ ‘고조선이야 뭐야~’라고 쓰인 포스트잇을 붙이며 일상 속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온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성차별을 드러냈다.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당시에는 집회 내에서의 성희롱적 발언과 행위에 대해 문제제기하며 새로운 페미니스트 그룹이 중심이 되어 페미존을 운영하기도 했다.

정치인이나 공직자의 여성에 대한 인식도 자주 문제가 되고 있다. 돼지발정제로 강간을 모의한 홍준표의 자서전이 뒤늦게 문제가 됐고, 현 청와대 의전비서실 행정관인 탁현민의 여성비하 표현에 대한 비판과 사퇴 요구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출산에 대한 자기통제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거리로 나왔다. 2016년 9월, 보건복지부가 인공 임신중절 수술을 한 의사들의 자격정지 기간을 기존 1개월에서 최대 1년으로 늘린다는 행정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자 여성들이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며 낙태죄 폐지 시위를 열었다. 검은 옷을 입고 도심에 출현한 여성들의 힘으로, 한 달 만에 행정규칙 개정안은 철회됐다.
 
 

한 발 더 

서점가에 메갈리아와 강남역 살해사건을 거쳐 탄생한 페미니스트들을 새롭게 명명하려는 시도가 적지 않다. 새로운 흐름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당연하지만, 우리가 시급히 논의해야 하는 것은 여성운동은 무엇을 제기하며 진전을 이룰 것인가가 아닐까.

여성비하·성차별적 발언에 대한 사회의 민감도가 높아진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여성운동의 실천이 여성비하 표현을 한 공직자를 퇴출하는 운동으로 협소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존재한다. 최소한도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분노는 이해가 되지만, 안티테제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이런 방식으로는 진전은 더디고 후퇴는 빠르다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 여성권과 관련해 여성의 성욕, 출산의 권리에 대한 긍정적 의미부여와, 이를 실현하기 위해 결혼과 가족에 대한 대안적인 상을 논의하는 데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성별임금격차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제 시작이다. 여성의 노동권과 관련한 실천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 다만 평등한 임금, 여성 직종에 대한 가치 재평가 외에도 여성의 직업과 노동을 정의하는 질서가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여성의 고유한 특성인 출산만 보더라도 현재 질서에서 여성의 출산은 회사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야근과 특근, 남성들의 몸에 맞게 설계된 작업장… 이러한 것들을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고려해 평등하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혁명적 운동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여성운동의 전통은 더 자주 단절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여성의 노동권과 여성권이 등장한 맥락, 이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의 역사 – 일부의 성공과 수많은 시행착오의 역사 – 가 사회적으로 잊힌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여성들이 쟁취해 온 권리의 후퇴와 시행착오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여성운동 열두장면’ 연재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여성들이 어떻게 여성의 고유한 권리를 발견했으며 이를 사회에 요구해왔는지를 살펴봤다. 이제 지금 분출하고 있는 에너지를 모아 한 발 더 나가기 위한 여성운동의 방향과 전략을 논의할 때다. 여성해방을 지지하는 모든 여성과 남성들이여, 이제 여성운동의 새로운 장면을 만들 차례다. ●
 
 
필자 소개

박상은 | 작은 일에 집요한 여성활동가. 페미니즘과 국제주의, 대중운동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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