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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 제38호

낙태권을 둘러싼 세계의 투쟁

  • 박상은
낙태 허용 범위는 국가마다 다르다. 주(週)수의 제한이 있지만 본인 요청에 의해 낙태가 가능한 국가가 있는 반면, 한국처럼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합법인 국가도 있다. 우리가 자주 기준으로 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낙태 허용 범위를 보면, 35개국 중 본인 요청에 의해 인공 임신중절이 가능한 국가는 25개국,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를 허용하는 4개국으로 OECD 회원국 중 80퍼센트인 29개국에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의 정책 변화의 배경에는 낙태권을 보장받기 위한 투쟁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및 재생산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존재한다.
 

미국의 낙태합법화와 낙태권의 후퇴

낙태권은 6~70년대 2세대 페미니즘 운동에 의해 적극적으로 제기됐고, 미국에서 낙태합법화는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1]을 통해 이뤄졌다. 이 판결은 낙태가 ‘헌법이 보장하는 여성의 프라이버시권(미 수정헌법 14조 ‘적법절차 조항에 의한 사생활의 헌법적 권리’)에 속한다’고 보았고, 이와 더불어 임신을 세 단계로 나누는 3분기 기한방식을 정식화하였다. 즉, 임신 초기 3개월 동안에는 주(州) 정부가 낙태에 대한 여성의 결정에 제한을 둘 수 없고, 임신 4~6개월 기간에는 주 정부가 여성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낙태를 제한할 수 있고, 6개월 이상일 경우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존 가능하므로 낙태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3분기 기한방식이 지금까지도 낙태 허용 범위를 논의할 때 기본적인 틀이 되고 있다.
 
1977년 뉴욕 도심에서 열린 낙태 합법화 시위 행진 ⓒ피터 키건(Peter Keegan)
 
그러나 로 대 웨이드 판결 직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는 친가족 운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이미 획득한 낙태권을 문제 삼고 이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운동은 낙태권에 대한 공격을 시발점으로 가족·성욕·재생산에 대해 페미니즘이 정치적으로 제기했던 의제들을 공격하고, 공화당의 정책을 반페미니즘·반동성애·반낙태로 전환시켰다.

1992년에도 중대한 판결이 있었다. 케이시 판결[2]이라 불리는 이 판결에서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낙태합법화 원칙은 유지하면서도 로 대 웨이드 판결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수정했다. 핵심은 여성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각 주 정부가 낙태 규제 조항을 자체적으로 마련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지나친 부담’의 범위를 각 주 정부가 자의적으로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낙태 규제가 지속적으로 강화됐다.

2013년 1월 31일자 〈한겨레〉가 보도한 “‘낙태 합법화’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제목의 기사에 따르면, 현재 미국 주 정부들의 낙태 반대 입법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뤄지고 있다. 먼저 ‘수요자 측면’에서는 낙태 시술을 받는 데 필요한 과정을 최대한 복잡하고 어렵게 한다. 시술 대기 기간을 길게 잡거나, 낙태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줄 수 있는 상담을 필수 절차로 끼워 넣는 식이다. 공공보험은 물론 민간 의료보험 약관에도 ‘낙태’를 비급여 항목으로 명문화하기도 한다. 금전적 장벽을 높이는 것이다. ‘공급자 측면’에서는 주로 낙태 시술을 제공하는 병·의원의 시설·위생 기준을 대폭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2011년, 낙태를 포괄적으로 제한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법안이 통과된 펜실베이니아 주가 대표적이다. 펜실베이니아 주는 외과적 낙태 시술이 가능한 병·의원에는 시술과 직접 관련이 없는 값비싼 의료장비와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종합병원 급’ 편의시설 설치를 의무화했다. 이 때문에 법안 통과 이전까지 외과적 시술을 해주던 병·의원 22곳 가운데 8곳이 시술을 포기했다.
 

유럽의 경우 : 영국·독일·이탈리아

영국은 1967년에 일정한 조건에서 낙태를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여성운동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공중보건에 대한 고려가 더 높게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법 도입 이전 안전하지 못한 낙태로 여성의 건강 문제가 심각했고, 여기에 논의가 보다 집중됐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영국의 법은 낙태 권한을 여성이 아닌 의사에게 상당부분 일임하는 형태로 제정됐는데, 임신 24주까지 두 명의 의사가 여성과 태아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이 임신을 지속하는 것보다 중단하는 게 낫다고 판단되면 낙태가 가능하다. 이는 당연히도 한계가 있는데, 두 명의 의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간적 제한이 없어 임신초기 낙태 기회를 상실할 가능성이 있고, 낙태를 거부하는 의사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서독은 1974년 형법 개정으로 임신 후 12주 이내 의사가 실시하는 낙태를 합법화했다. 하지만 기민당(기독교민주당)과 기사당(기독교사회당) 의원들은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했고, 이듬해인 1975년 위헌 판결이 내려졌다. 1976년 형법 개정에서는 원칙적으로 낙태 처벌 입장을 취하면서도, 의학적·우생학적·범죄적 사유·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을 경우에만 허용했다. 1990년 독일 통일 후 법을 정비하면서 임신 12주 내 아무런 사유가 없어도 낙태를 허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기민당과 기사당 의원들이 다시 나섰다.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제출해 1993년 독일의 헌법재판소는 또 다시 위헌 결정을 내린다. 현재 독일 형법에는 여전히 낙태죄가 존재하나, 최소 시술 3일 전까지 상담을 거치고, 의사에 의해 시술받으며 착상 이후 12주 이상을 경과하지 않는 경우에는 낙태죄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경우 1975년부터 낙태 합법화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당시 낙태를 옹호하는 입장 내에서도 낙태를 결정할 권한이 의사와 여성 중 누구에게 귀속되는지, 낙태 불허기간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 자유로운 낙태자의 최소 연령층을 제한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 등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1978년 6월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이 제정됐다. 1981년 낙태무효화법안이 발의됐지만,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현재는 건강상 및 사회경제적 이유로 임신 12주 이내의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내가 결정했다"
2014년 이탈리아 낙태합법화 시위
 
문제는 공공 병원에서 낙태가 가능함에도 간호사와 의사가 ‘종교적인 이유’로 수술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공적 의료체계가 마비됐고, 현재도 이탈리아 의사의 70퍼센트는 낙태에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실제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기가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여성운동가 알렉산드라 메코지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가톨릭과 우파정당을 중심으로 낙태권에 대한 공격이 거세졌다. 우파 정당은 먹는 낙태약 금지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경제적 이유’로 인한 낙태를 방지하겠다며 낙태하지 않는 조건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정책을 펼치기도 한다.
 

낙태 합법화 국가 사례의 시사점 

앞서 소개한 사례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 낙태 합법화 이후에도 이를 뒤집으려는 시도가 많았다는 것이다. 독일은 두 차례나 낙태를 허용하는 법이 무효화되었다가 겨우 지금에 이르렀으며, 이탈리아도 이미 통과된 법을 무효로 만드려는 법안이 발의된 적이 있다. 둘째, 낙태합법화 국가 사이에서도 여성의 낙태접근권은 상이하다는 점이다. 미국처럼 공공의료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경우, 여성의 낙태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 상기했다시피 최근에는 주(州)별 규제를 통해 이 장벽을 더욱 높이고 있다. 이탈리아와 같이 종교적 이유로 의료인들이 낙태 시술을 거부하여 같은 수준의 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보다 훨씬 여성들의 낙태권이 제한되는 나라도 있다.

낙태 합법화 국가에도 남는 문제가 있다. 보험과 의료서비스, 피임 보급의 문제, 피임·출산·낙태 등의 결정에서의 여성의 주도권, 사회적 시선과 주변의 지지 부족 등이 꼽힌다. 특히 사회의 편견은 낙태가 합법화된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위 국가들처럼 프로라이프 운동의 강화도 충분히 예견 가능하다. 낙태권을 위한 투쟁에 뒤늦게 나서는 한국 사회운동이 염두에 둘 부분이다. ●
 

Footnotes

  1. ^ 1969년,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노마 매코비라는 여성이 강간에 의한 임신을 이유로 낙태수술을 요청했으나 임신부의 생명이 위독하지 않고, 성폭행 사건에 대한 경찰 보고서가 없다는 이유로 낙태수술을 거부당했다. 매코비는 1970년 텍사스 주를 상대로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원고인 맥코비는 신변보호를 위해 가명인 제인 로를 사용했고, 피고인은 지방 검사인 헨리 웨이드였기 때문에 ‘로 대 웨이드(Roe vs. Wade)’가 소송명칭이 되었다. 1973년 1월 22일 연방대법원은 7대 2로 낙태 금지가 위헌이라고 결정하였다.
  2. ^ 민주당 출신이면서도 강경한 낙태반대론자였던 펜실베이니아 주 당시 주지사 로버트 케이시가 낙태 시술을 어렵게 하는 규제를 만든 데 대해 위헌성을 물은 사건이다.
 

참고자료

 

비안카 바칼리, 〈이탈리아 노조 페미니즘의 진보성〉, 《오늘의 페미니즘, 세계여성운동》
알렉산드라 메코지 인터뷰, 〈운동의 미래는 갈등의 복권에 달려 있습니다〉, 《사회운동》, 2008년 1-2월호
이희훈, 〈영국,미국,독일,프랑스의 낙태 규제 입법과 판례에 대한 비교법적 고찰〉, 일감법학 27호, 2014
정진주, 〈유럽 각국의 낙태 접근과 여성건강〉, 《페미니즘 연구 제10권 1호》
조국, 〈낙태 비범죄화론〉, 《서울대학교 法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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