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러시아혁명 100주년
  • 2018/04 제39호

좌익공산주의와 러시아혁명

  • 임필수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레닌은 1920년 7~8월에 개최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3인터내셔널, 코민테른) 대회를 앞두고, 야심찬 팸플릿을 준비했다. 그는 4월부터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을 서술하기 시작하여 6월에 출판했다.  

팸플릿의 3장 ‘볼셰비즘 역사의 주요 단계들’에서 레닌은 러시아혁명을 준비기(1903~1905년), 혁명기(1905~1907년), 반동기(1907~1910년), 회복기(1910~1914년), 세계대전기(1914~1917년), 2차 러시아혁명(1917년)으로 구분했다. 특히 그는 반동기에 볼셰비키가 얻은 교훈을 이렇게 정리했다. 
“혁명정당은 적절하게 공격하고 적절하게 퇴각하는 법을 배워놓지 않으면 승리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볼셰비키는 자기 ‘군대’의 손실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 군대의 핵심을 가장 훌륭히 보존하며 가장 미미한 분열로써 사기저하를 극소화시키면서, 가장 질서 있게 퇴각하였다. 볼셰비키가 이를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퇴각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 가장 반동적인 의회, 가장 반동적인 노동조합, 협동조합, 보험조합 류의 조직 속에서도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법을 무조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차 없이 폭로하고 추방했기 때문이다.”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레닌은 이어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라는 장에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지방 그룹>이 발간한 팸플릿을 길게 인용하며 비판을 가한다. 레닌이 인용한 독일 좌익공산주의자의 주장은 이렇다.
“따라서 지금 두 개의 공산당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지도자들의 당’으로, 독재를 수행하는 연합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을 창출하려고 타협하고 의회정치를 받아들이면서 혁명투쟁을 조직하고 그것을 ‘위’로부터 지도하려고 애쓰는 당이다. 다른 하나는 ‘대중정당’으로, ‘아래’로부터의 혁명투쟁의 고양을 기대하면서, 이 투쟁에서 목표로 명확히 이끄는 단 하나의 방법을 알고, 모든 의회주의적, 기회주의적 방법을 거부하는 당이다. 그 유일한 방법은 무조건적 부르주아의 타도이며, 그리하여 사회주의의 성취를 위해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세우는 것이다. 저쪽은 지도자들의 독재, 이쪽은 대중들의 독재!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다.” 
그 후, 레닌은 볼셰비키와 러시아혁명의 경험을 인용하며, 여러 장에 걸쳐 비판을 이어간다. 첫째, “정당이 계급을 지도하며, 정당은 지도자로 불리는 견실한 그룹에 의해 운영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대중의 독재와 지도자의 독재를 대비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둘째, 노동조합의 기회주의 지도자들은 “원칙적 반대파(좌익공산주의자)가 반동적인 노동조합을 포기하라고 설교하는 좌익 혁명가들에게 매우 감사할 것이다.” 셋째, “유럽의 의회에서 실제로 혁명적인 의회그룹을 만드는 것이 러시아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반동적 의회를 활용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뛰어넘음’으로써 어려움을 ‘피해보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다.” 

결론격으로 그는 “좌익 교조주의의 오류가 우익 교조주의, 예를 들어 사회배외주의, 카우츠키주의의 오류보다 천 배 덜 위험하고 덜 중요”하지만, 겨우 싹트고 있는 경향이므로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반드시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르터,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이러한 레닌의 비판에 직면하여, 헤르만 고르터는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1920)을 발표한다. 그는 1880년대 암스테르담에서 활약한 문학 집단 ‘80년대인들’(Tachtigers)의 주도적 인물로, 1889년에 첫 시집을 발표한 시인이었고, 1895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라틴어에서 네덜란드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세기말부터 그의 문학 집단과 함께 좌파 정치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여, 사회주의 이론에 관한 저술을 시작했다. 그는 1897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으나, 1912년 그로부터 이탈하여 네덜란드 사회민주당에 참여했고, 이 당은 1919년 네덜란드 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19년 그는 다시 이 당을 떠나 1921년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그는 레닌의 비판에 자신이 제기한 반비판을 이렇게 요약한다.  
1. 서유럽 혁명의 전술은 러시아 혁명의 전술과 달라야만 한다. 
2.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는 홀로 서있다. 
3.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다른 모든 계급에 대항하여 홀로 혁명을 달성해야 한다.
4. 따라서, 러시아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더 크고, 지도자의 중요성은 더 작다. 
5. 그 결과,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을 위한 가장 최선의 무기를 지녀야 한다. 
6. 노동조합은 불충분한 무기인데, 노동조합은 산업조직들로 대체되거나 변화해야 하며, 하나의 동맹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7. 프롤레타리아가, 아무런 도움 없이 혁명을 홀로 달성해야 하며, 프롤레타리아는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따라서 혁명에서 의회주의를 활용하지 않는 게 더 좋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이용하거나 인수할 수 없다는 교훈을 배웠다. 
그의 주장을 부연하면 이렇다. 첫째, 서유럽 혁명은 그 조건, 즉 계급관계가 러시아와 상이하므로 혁명전술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레닌은 노동자와 빈농(빈곤한 소작농)이라는 두 범주가 항상 전 세계의 혁명적 요소라고 언급할 뿐, 어디에도 러시아(그리고 동유럽의 몇몇 국가)와 서유럽(독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국가, 아마도 이탈리아)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혁명적 요소로서 빈농의 일반적 중요성은 감소한다. 러시아의 경우,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700~800만 명이었지만, 빈농은 2500만 명에 달했다. 러시아 임시정부의 케렌스키가 빈농에 대한 토지분배를 실시하지 않자, 그들은 레닌과 함께 하게 되었다. 반면 서유럽의 소농은 농장주이거나 약간의 토지를 소유한다. 그들은 훌륭한 운송수단을 통해 생산물을 판매할 수 있고, 최악의 경우라도 자신의 식량을 자급한다. 지난 10년 간, 즉 전쟁을 거치며 농산물 가격 인상으로 생활의 개선을 경험했다. 나아가, 러시아는 분할할 수 있는 막대한 양의 토지가 있었지만(대규모 사유지, 왕실 소유지, 정부 소유지, 수도원 소유지 등등), 서유럽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서유럽에서는 산업 노동자 홀로 서있고, 중간계급 하층의 아주 일부분만이 그들을 지원할 것이다. 노동자는 스스로 혁명을 성취해야만 하며, 이는 러시아와 거대한 차이다. 

둘째, 레닌은 팸플릿에서 ‘지도자의 독재인가, 대중의 독재인가’라는 문제, ‘위로부터인가, 아래로부터인가’라는 문제를 조롱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이는 여전히 문제다. 서유럽 많은 국가에는 제2인터내셔널 유형의 지도자, 즉 대중을 지배하고 이용하려는 지도자가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아래로부터 행하기를 원하며, 대중 자신의 독재를 통해서 행하고자 한다. 마침내, 올바른 안내자를 찾으면, 대중과 지도자는 진정으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지도자를 찾는 것이다. 이는 정당과 노동조합에서 내부투쟁을 포함해, 가장 극심한 투쟁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을 뿐이다. 

셋째, 노동조합의 경우를 보자. 국가기구는 관료계급, 관료주의를 생산했고, 조직, 재정, 언론, 하급관리의 임명에 대한 모든 권력기관을 통제한다. 관료계급은 이미 하층 공무원부터 거대한 권력을 부여받아 지배자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을 조직과 동일시한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에서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를 단결시키는 ‘자연적’ 조직을 구성했고, 처음부터 그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점점 더 노동조합은 거대 노조가 되었고, 발전 경향에 따라 부르주아 국가기구 그 자체와 동일하게 되어 갔다. 노동조합은 국가와 그 관료주의와 비교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작동한다고 가정됨에도 불구하고, 조합원은 관료주의에 대하여 자신의 의지를 강제할 수 없다. 공식적인 규약, 규칙을 통해 교묘하게 구성된 장치에 대항하는 반역은 실패했다. 수년에 걸친, 가장 집요한 인내도 오직 온건한(완만한) 결과를 달성할 수 있으며, 대부분 몇몇 개인의 교체로 제한되었다. 
 
헤르만 고르터
 
따라서 혁명은 노동조합 조직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때만, 즉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전환시킬 때만 달성될 수 있다. 그 내부로부터 형성된 소비에트 시스템은 국가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뿌리 뽑고 폐지할 수 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정치기관뿐 아니라, 새로운 노동조합의 기초를 구성할 것이다. 

현재 서유럽에 존재하고 있는 노동조합은 가장 고도로 조직된 자본에 대항하기에 너무나 취약하다. 노동조합이 직종조합인 한, 그 사실만으로도 혁명에 부적합하다. 산별노조인 한, 그들은 공장, 현장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으므로, 취약하다. 공장 노동자는 산업이나 직종 수준이 아니라 현장 수준에서 혁명을 수행하는 데 반해, 노동조합은 너무나 느리게 작동하며, 복잡하다. 따라서 서유럽에 혁명의 유일한 무기는 현장조직에 기초한 산업조직이고, 모든 산업조직은 단일한 조직으로 통일되도록 해야 한다. 

고르터는 하나의 사례를 든다. “독일에 진정으로 혁명적인 10만 명의 부두 노동자, 10만 명의 금속노동자, 10만 명의 광산 노동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이 진정으로 파업을 벌이고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한다. 하지만 다른 수백만 명은 그렇지 않다. 30만 명은 어찌해야 하나? 우선 그들은 투쟁동맹을 건설해야 한다. 이제 새로운 동맹은 낡은 노동조합에 대향해야 한다. 공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실제로는 분리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동맹은 언론, 회합, 지역조직, 유급 간부를 필요로 할 것이며, 재정이 투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은 독일 노동자총연합(AAUD)를 건설했다. 
 
"유권자들은 선택하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냐 스테니스(1920년대 독일의 대재벌) 독재냐"
 
넷째, 서유럽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매우 강력하고, 노동자는 부르주아 대의시스템, 의회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고르터가 인용한 판네쾨크에 따르면, “토지 부르주아의 공민적, 정신적 생활은 굳건한 민족문화로 발전했다. 언론, 학교, 교회가 도시로 빨려 들어가거나, 농촌에 남은 프롤레타리아화된 대중의 뇌에 민족문화를 주입했다. 반면 동유럽은 다르다.” 사실 시민적 자유, 의회권력은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획득되었다. 당시 이러한 권리는 오직 소유자계급을 위한 것이지만, 이러한 투쟁에 대한 사고가 인민들 속에 깊게 뿌리 내린 전통이 되었다. 혁명은 민중의 심층적 기억이 되어서, 무의식적으로 의회에서 대표의 획득이 곧 승리라는 기억을 형성했고 엄청나게 강하며 조용한 힘이 되었다. 나아가, 노동자도 여러 해 동안 보통선거권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영향은 막대하다.   

판네쾨크에 따르면, “의회주의는 지도자에 의해 수행되는 투쟁의 특정 형태다. 의회주의에서 대중은 부수적 역할만 수행한다. 대표, 즉 개별적 개인이 실제 투쟁을 수행한다. 대중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 투쟁할 수 있다고 인식한다. 의원은 법률과 규제를 통해서 사회주의로 이행케 할 수 있다는 환상을 대중에게 심어준다.” 따라서 전술의 문제는 어떻게 전통적인 부르주아적 사고방식과 단절할 것이냐, 아니면 이를 강화시킬 것이냐다.  

레닌은 “리프크네히트 동지가 살아 있었다면, 제국의회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르터는 이를 부정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리프크네히트는 의회에서 활동할 수 없을 터인데, 모든 부르주아 정당이 단일 전선을 형성해 공산주의자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의회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노동자를 획득했을 것이다.” 
 
 
서유럽(특히 영국과 독일)에서는 자본이 거대한 정도로 은행, 트러스트, 독점으로 집중되었다. 서유럽의 은행, 트러스트, 카르텔은 산업, 상업, 운송, 그리고 상당한 규모로 농업 부문의 거의 모든 자본을 흡수했다. 따라서 산업, 운송, 상업, 농업은 대자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므로, 결국 융합되었다. 특히 은행자본은 가장 유연하고 탄력적인 세력이며, 신용을 통해 수천 배 힘을 강화시켰고,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국가를 지지하고 유지한다.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하는 모든 계급은 은행 자본 주변으로 조직되고 있다. 물론 대자본 이외의 다른 계급의 실제 이익이 대자본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들 계급이 대자본에 의해 억압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서유럽에서 대자본의 지배는 그들에게 다소간에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며, 모든 가능한 수단을 통해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 대자본의 편에 선다. 

실제로 그들은 노동자운동에 적대적이고, 제국주의와 전쟁을 옹호하고 있다. 여러 해 동안, 영국, 독일에서는 노동자를 지지하는 하나의 정당도 없었다. 새로운 노동입법은 없었고, 파업에 반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훨씬 더 높은 세금이 부과되었다. 제국주의, 식민지화, 군사주의가 소부르주아 정당을 포함해, 모든 부르주아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따라서 의회 내 여러 정당 간 정치적 ‘균열’을 이용해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은 서유럽 현실에서 통하지 않는다. 
 

코민테른 2차 대회의 좌익공산주의 

그렇다면 코민테른 2차대회는 어떤 결론에 도달했나. 2차대회에는 37개국에서 온 200명이 넘는 대표자가 참여했다. 네덜란드-독일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참여는 배제되지 않았다. 위에서 레닌이 언급했던 것처럼, 좌익공산주의의 위험은 우익교조주의에 비해 천 배는 약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은 2명의 공식 대표를 보냈으나, 그들이 모스크바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명의 대표를 추가 파견했는데, 그중 한 명이 오토 륄레다. 사실, 오토 륄레는 모든 공산주의 정당이 해소하여 노동자총연합 체계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인터내셔널의 중앙집중주의에 강력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1920년 12월, 고르터에 반대하며 독일노동자총연합-단일조직(AAUD-E)를 창설한다.) 
 
1920년 코민테른 2차 대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의 모습
 
기실 2차대회는 코민테른 가입 조건에 대한 테제, 즉 ‘21개 가입조건’을 채택했다. 그 중 12조는 “코민테른이 가입한 당은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바탕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규정했고, 16조는 “코민테른 대회가 내린 모든 결정, 집행위원회의 모든 결정은 모든 당에 구속력을 지닌다. 가장 첨예한 내전이라는 조건에서 활동하는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이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앙집중적인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뿐만 아니라, 레닌의 팸플릿을 직접 반영하듯, 코민테른의 가입조건으로 ”모든 당은 노동조합에서 체계적이고 끈기 있는 활동을 수행해야만 한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좌익공산주의 그룹은 2차대회 이후, 코민테른 노선에 대해서도, 나아가 혁명후 러시아사회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심대한 분기점을 맞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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