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혁명 100주년
- 2018/01 제36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카우츠키의 러시아혁명 논쟁
러시아 혁명과 소련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④
카우츠키,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카우츠키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1919), 《민주주의에서 국가 노예제로》(1921), 《인터내셔널과 소비에트 러시아》(1925)와 같은 저작을 끊임없이 발표하면서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적 십자군’ 역할을 수행했다. 카우츠키의 비판은 몇 가지 명제로 구성된 도식에 기초했다.
이 도식은 ‘① 사회주의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 ② 1917년 러시아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다 ③ 따라서 볼셰비키가 ‘혁명’이라고 선전한 쿠데타를 통해서 사회주의 확립을 강제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사생아 형태(bastard formation)로 귀결될 뿐이다 ④ 이처럼 조악한 형태는 필연적으로 불안정할 것이며 머지않아 변질될 것이다’로 축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서 카우츠키는 아래의 도식으로 혁명 후 러시아를 분석한다.
“러시아에서 봉건적 토지소유를 철폐하기 위한 조건은 성숙했으나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한 조건은 성숙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소생하고 있으나 그 형태는 과거에 비해서 프롤레타리아에게 훨씬 더 억압적이고 해롭다. 산업자본주의는 사적 자본주의에서 국가자본주의로 되었다. 이제는 국가의 관료와 자본가적 관료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합병되었다. 그것이 바로 볼셰비키가 도입한 거대한 사회주의적 격변의 최종결과물이었다. 민주주의는 ‘수탈자에 대한 수탈’에 복무할 노동자 평의회의 자의적 지배로 대체되었으나, 이 역시도 이제 새로운 형태의 관료주의에 의한 자의적 지배에 자리를 양보했다.”
카우츠키는 그 증거로 러시아의 교통 인민위원 크라신의 긴급성명을 인용한다. “기존의 철도관리 체계는 5년간의 전쟁이 빚어낸 객관적인 어려움과 결합되어 교통체계 전체를 파탄지경에 빠뜨리고 있다. 집단 경영을 대체하여 (집단경영은 실제로 완전히 무책임했다) 일인 경영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사무실 사환부터 경영이사회의 구성원까지 [최고경영자] 한 사람의 명령을 완수해야 한다. 모든 개혁은 중단되어야 하며, 과거의 직위가 유지되어야만 한다. 성과급제의 도입이 핵심적이다.”
물론 이런 비판에는 뼈아픈 측면이 있다. 실제로 1918년 이후 레닌은 자주적 ‘노동자 관리’ 운동을 꺼렸고, 이는 당내 이념분열, 당과 노동자계급 간 갈등의 심각한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볼셰비키는 ‘노동자 관리’라는 말을 ‘노동자 국가에서의 관리’, ‘노동자 행정’이라는 말로 바꾸어 애매하게 사용했다. 노동자 행정은 노동자 가운데 지명된 인물이 국가경제기구와 전문경영인을 감시한다는 의미였지만, 열성적인 노동자 일부가 중앙행정직이나 당 간부직에 선발된 것은 오히려 노동자의 조직력을 약화시키고 주체성을 상실케 하는 불운한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주적 노동자 관리를 폐지하고 산업생산의 관리와 감독을 중앙집권적인 산업생산기구로 이양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이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권한이 약화되는 과정은 볼셰비키 사회주의 체제가 변질된 근본적 원인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카우츠키가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서 노동자의 생산관리를 진전시킴으로써 생산관계를 변혁해야 한다는 문제에 깊이 파고든 것은 아니었다. 이는 소책자 말미의 독일혁명에 대한 언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성립 이후 독일의 사회주의 진영에는 새로운 분열의 싹이 자라났는데, 그것은 우리 정당이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요구를 폐기하고 노동자 평의회 독재를 국가형태로 관철해야 한다는 볼셰비키의 선전 때문이었다. (…) 현재 시점에 독일 제국 전체를 결집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는 노동자 평의회도 아니고, 독재적인 정부도 아니고, 오직 국민의회뿐이다. (…) 노동자평의회는 대산업의 임금소득자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국민의회와 매우 다르다. 노동자 평의회는 사회화를 위한 모든 시도에 필수 불가결하지만 국민의회의 적절한 대체물이 될 수 없다. 평의회 시스템이 대기업의 모든 범위로 확장될수록, 노동 인구 전체를 포괄할수록, 중앙 평의회는 그 구성상 국민의회와 유사해질 것이지만, 국민의회의 다수가 보유한 권한이 평의회의 다수에 부여되지는 않는다.”
볼셰비키 체제에 대한 카우츠키의 비판은 점점 더 공격적 논조를 띠어 갔다. 1925년 그는 팸플릿 《인터내셔널과 소비에트 러시아》를 발표했다. 그는 소비에트 체제가 국제 노동자계급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선언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프롤레타리아가] 세계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가장 강력한 직접적 장애물이다. 그것은 악명 높은 헝가리의 호르티 체제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체제보다 더 나쁘다. 무솔리니 체제는 소비에트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반대 운동이 완전히 불가능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현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지배와 착취로 연명하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가계급으로서 이런 지위에서 행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현재 프롤레타리아와 자본 위에 서 있으며, 이는 프롤레타리아와 자본을 도구로써 활용하기 위해서다.”
러시아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사생아 형태이며, 실은 조악한 ‘국가자본주의’라는 명제나, 볼셰비키가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명제는 카우츠키의 분석이 얼마나 이론적 정합성이 있냐는 문제와는 별도로, 훗날 본격적으로 전개될 ‘소련 사회성격 논쟁’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카우츠키 비판
룩셈부르크의 《러시아혁명》으로 돌아가 보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서 러시아혁명을 맞이했다. 1918년 11월 독일혁명이 발발한 후에야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1919년 1월 15일 베를린 봉기의 와중에 반혁명세력인 저격사단에 의해 체포·처형됐다. 따라서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충분히 발전시킬만한 시간과 여건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완성되지도 않았고, 발표되지도 않은 《러시아혁명》이라는 비평서 원고가 있었다.
그녀는 볼셰비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체결하기로 한 결정이나 몇 가지 다른 조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품었다. 가까운 동료들, 특히 1918년 3월 이후로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이끌던 파울 레비와도 견해차가 있었다. 따라서 룩셈부르크는 주변 동지를 설득하기 위해 1918년 가을부터 볼셰비키 정책에 대한 비평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원고는 볼셰비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카우츠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러시아는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카우츠키의 해석에 저항했다.
“이러한 모든 사태는 러시아의 해방이 결코 전쟁과 짜리즘의 군사적 패배로 얻은 수확이 아니며, 카우츠키가 말한 것처럼, 독일 군대의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님을 명백히 밝혀 준다. 오히려 그것은 러시아 해방이 러시아 사회의 토양 속에 깊게 뿌리박고 있었고, 내부적으로 충분히 성숙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독일 사민당의 이데올로기적 세례를 받은 독일 제국주의의 군사적 모험이 러시아혁명을 촉발시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군사적 모험은 1911-1913년 러시아혁명의 폭풍 같은 물결 후, 혁명을 저지하고 지연시켰을 뿐 아니라, 혁명 발발 후에는 러시아에 가장 곤란하고 비정상적인 조건을 창출했을 뿐이다.”
앞에서 살펴봤듯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1918)에서 “서유럽의 사회적 관계는 러시아와 다르기 때문에 러시아혁명이 반드시 서유럽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일국적이며, 달리 말하면 각 현대국가가 스스로 수행하는 국내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보기에 이런 접근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국제노동자운동, 특히 독일노동자운동의 책임성을 최소화하는 실천적 경향을 함의했다.
“전쟁과 러시아혁명이라는 사건이 증명한 것은 러시아의 미성숙성이 아니라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미성숙이다. 러시아혁명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첫 번째 임무는 이러한 사실을 완전히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입장은 서로 결합된 독일-러시아 혁명이 발발한다면 후진적인 러시아에서 즉각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입장이 담고 있는 안티테제도 의식하고 있었다. 즉 러시아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지 않는다면 볼셰비키의 실험은 불구의 사회경제적 구조로 귀결될 것이었다. 이럴 경우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며, 그를 향한 ‘미약하며 왜곡된 노력’만 존재할 것이었다. 볼셰비키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막대했다. 그녀가 보기에 책임을 다하는 유일한 태도는 근본적인 연대에 기초한 비판에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볼셰비키 비판
볼셰비키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첫 번째 비판은 토지 정책이었다. 그녀는 토지를 재분배하고 농민들이 대규모 토지를 분할하도록 허용하는 게 위험한 조치라고 봤다. 사회적 소유가 강화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사적 소유가 창출됐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발전된 대규모 농업기업이 파괴되고 그를 대체하는 소규모의 원시적 농장이 출현하며, ‘파라오 시대의 기술수단’으로 운영되는 상황이었다. 토지정책은 이런 방식으로 농촌에서 부르주아의 영향력을 강화했고, 노동자계급에게 불리하도록 권력균형을 변화시킬 것이라 예상됐다. 새롭고 크게 확대된 재산소유 농민계급은 전력을 다해 획득한 재산을 방어하고자 할 것이며, 따라서 사회화의 심각한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비판은 민족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오랫동안 그녀와 레닌, 폴란드 사회민주당과 러시아 사회민주당 간 정치적 갈등의 한 원천이었다. 룩셈부르크는 민족자결 요구에 일관되게 반대했고, 《공산주의자 선언》이 선언했던 것처럼 노동자가 조국이 없다면 민족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녀는 ‘노동자의 조국’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라고 쓴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일반적 입장을 다시금 강조하면서, 볼셰비키 정책이 새로운 국가의 해체로 나아갈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독립이 쟁취된다면, 민족들은 차례로 독일 제국주의와 관계를 맺기 위해 자유를 활용하고 반혁명을 촉진할 것이라 봤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심지어 민족분리까지 포함해 민족자유를 쟁취하면, 핀란드, 우크라이나, 폴란드, 리투아니아, 발틱 국가, 코카서스 등등이 러시아혁명의 맹방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분명히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 결과를 목도했다. 이러한 ‘민족’은 새롭게 보장된 자유를 러시아혁명에 반대하며 독일제국주의와 동맹을 맺는 데 활용했다. (…) 확실히 모든 사례에서 반동적 정책에 몰두한 자들은 ‘인민’이 아니었고 오직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슬로건에는 유토피아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성격이 내재해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에 있다.”
토지 정책과 민족 정책을 통해서 볼셰비키는 스스로 러시아 안에서 강력한 적대자를 창출했다. 이는 룩셈부르크가 그녀의 비판 중 핵심에 이르게 했다. 즉 독재와 민주주의의 문제였다. 그녀는 제헌의회 해산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트로츠키의 팸플릿 《10월 혁명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까지》를 검토했다. 트로츠키는 제헌의회 해산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제헌의회 선거가 10월 혁명 바로 다음 주에 실시되었다는 상황도 있었다. 변화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상당히 느리게 동심원 모양으로 전파되어, 수도에서 지방으로, 지방도시에서 작은 마을로 전해졌다. 여러 지역에서 소농 대중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사건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토지와 자유’를 위해 투표했으며, ‘인민주의자’[사회주의혁명가당]의 깃발 아래 있던 인사를 토지위원회로 파견할 대표로 선출했다. 그래서 소농은 토지위원회를 해체하고 그 위원을 구속한 케렌스키와 압젠티에프 측에 투표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선거 결과 구성된] 제헌의회가 정치투쟁의 전개와 정당 재편의 전개에 얼마나 뒤쳐졌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원고에서는 바로 이 대목에서 제헌의회 선거가 10월 혁명 전에 있었다고 착각해, 트로츠키의 말대로 제헌의회 구성이 시대착오적이라면 지체 없이 새로운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이런 착오에도 불구하고 ‘혁명 과정에서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인민 대중의 대의체는 무엇이든 부적합하다’는 식의 일반적 결론에 도달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혁명의 와중에 대중의 정치적 분위기와 대중의 정치적 성숙도가 대의기관에 생생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포기하고, 당의 상징과 강령에 입각한 엄격한 계획을 선호할 것인가? 정반대다. 바로 혁명이야말로 예민하고 활기차며 세심한 정치적 분위기를 창출하며, 대중적 감정의 물결, 대중적 삶의 맥박은 가장 경이로운 방식으로 대의기관에 작용한다.”
그녀에 따르면 어떤 민주적 제도도 한계와 결점이 있다. 그렇지만 제헌의회를 해산한 것처럼 민주주의를 완전히 제거하는 처방은 질병 그 자체보다 더 나빴다. 룩셈부르크는 민주주의를 가장 광범위하게 확장할 필요성을 지적했는데, 이는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정치적 학습 과정에서 불가결한 선행조건이었다.
“정부 지지자만을 위한 자유, 한 정당의 당원만을 위한 자유는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자유다. ‘정의’에 대한 광신적 개념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에서 계발적이고 건전하며 무언가를 정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런 본질적 성격에 의존하기 때문이며, ‘자유’가 특권이 될 때 그 효과성을 사라지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는 민주주의 폐지가 공적 생활의 화석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관료제는 훨씬 더 강력해질 것이며, 대중운동의 동학은 사라진다고 봤다.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와 무제한적 이상주의를 지닌 수십 명의 당 지도자가 지도하고 지배한다. 현실에서는 그들 중에서 십여 명의 뛰어난 수뇌가 지도를 수행한다. 노동자의 엘리트가 때때로 회의에 초대되며 그 회의에서 그들은 지도자의 연설에 박수를 보내고 제출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패거리 짓으로서의 독재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고, 소수 정치인의 독재일 뿐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 자코뱅 지배라는 의미에서 독재다. […] 그렇다, 우리는 훨씬 더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은 불가피하게 공적 생활의 야만화를 초래할 것이다. 그것은 암살, 인질 사살 등등이다.”
《러시아혁명》 이후 룩셈부르크
로자 룩셈부르크가 팸플릿 작업을 그만두고 불의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초기의 비판을 고수했는지, 아니면 관점을 바꾸었는지에 관한 많은 토론이 있었다. 무엇보다 파울 레비가 그녀의 미완성 원고에 자신의 서문을 붙여 1922년에 출판했기 때문이다. 레비는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처형된 후, 그들과 함께 창당했던 독일공산당(1919.1. 창당)의 중심 지도자가 됐다. 하지만 레비는 당내 좌익의 ‘급진 모험주의’에 강한 반감을 지녔고, 1921년 3월 봉기의 처절한 실패 후 코민테른과 독일공산당 내부의 신진 좌파를 비판하는 《폭동주의에 대한 우리의 길》(1921)이라는 팸플릿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에서 추방됐는데, 바로 이때 로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을 발간한 것이다. 즉 룩셈부르크의 권위로 레닌의 권위에 대항하고자 한 셈이다.
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룩셈부르크의 동지였던 아돌프 바르스키는 《혁명의 전술문제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입장》이라는 팸플릿을, 클라라 체트킨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입장》이라는 팸플릿을 발표했다. (레닌 역시 《정치평론가의 노트》(1922)에서 러시아 속담을 인용하면서 룩셈부르크와 레비를 분리하고자 했다. “독수리는 때때로 암탉보다 더 낮게 날기도 하지만, 암탉은 결코 독수리보다 높게 날 수 없다”, “룩셈부르크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독수리였고, 우리에게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며 레비에 응수했다) 바르스키는 룩셈부르크가 1918년 11월 말 또는 12월 초에 보냈다는 편지를 기억하여 인용했다.
“분명히도 새롭게 창출된 농업 관계는 러시아 혁명에서 가장 위험하며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지점입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도 발전 과정에서 성숙된 것만 성취할 수 있다는 진실이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 부위는 오직 유럽 혁명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 혁명은 도래할 것입니다!”
바르스키가 인용한 의도와 달리, 룩셈부르크가 민족 문제나 농업 문제에 관한 비판을 명백히 포기했다는 근거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체트킨은 제헌의회 문제에 관해서 룩셈부르크가 입장을 바꾸었다고 주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주요 작업 계획에 대해 나에게 말했지만 그 후 편지에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왜냐하면 독일 혁명의 발발 이후 그녀의 입장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의 특징은 제헌의회, 민주주의, 독재 등등의 문제인데, 그것은 볼셰비키 정책에 관한 그녀의 초기 비판과 모순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변화된 역사 평가를 받아들였다.”
실제로 독일 11월 혁명 후 스파르타쿠스단은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슬로건을 채택했다. 룩셈부르크는 혁명 발발 두 주 후 《적기》에서 혁명의 목표로 자본주의 철폐·사회주의 수립을 제기하고,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계급으로 묶어 혁명의 보루로 세우기 위해 노동자·병사평의회 전국대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국민의회(제헌의회)와 평의회가 마치 러시아와 비슷하게 이중권력으로 대립할 잠재성이 있을 당시,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회는 부르주아식 해결방법이고,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사회주의적 해결방법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자들과 법 테두리 안에서 법에 대하여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가 계급투쟁 없이 달성될 수 있다는 생각, 즉 의회 안에서 다수결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우스꽝스러운 소시민적 발상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독재 문제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입장은 전적인 변화를 겪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첫째, 혁명이야말로 대중이 경이로운 방식으로 대의기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런 조건을 창출해야 한다는 기본 관점이 변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이런 관점은 스파르타쿠스단의 대중관·조직관에 항상 반영되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노동자대중의 위에 군림하거나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아 오기를 원하는 당이 결코 아니다. 스파트타쿠스단은 오직 노동자계급이 역사적 임무를 행하도록 인도하고 혁명의 특별한 계기마다 궁극적인 사회주의의 목표를 제공하며, 모든 민족문제에서 세계 노동자계급혁명의 관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자계급의 가장 자각적이고 목적의식적인 부분일 따름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1919년 1월 (룩셈부르크 스스로 언급한 것처럼) 노동자 평의회의 ‘정치적 자살’을 목도한 후, 의회 참여가 불가피하다고 보면서 노선 전환을 촉구한 것도 ‘전술적 전환’으로 간주되어야 할 뿐, 관점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의회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동세력의 요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요새를 혁명의 폭풍으로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의회에 대항해 일어설 대중을 동원하고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도록 호소하기 위해서는 선거와 의회 그 자체를 발판으로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의회 선거에 참여하자는 룩셈부르크의 입장은 독일공산당 창당대회에서 23대 62로 패배했고, 대회 직후 베를린 봉기를 거치며 룩셈부르크는 불의의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비판 역시 미완의 상태로 중단됐다. 만약 그녀가 코민테른의 볼셰비키화·신경제정책의 도입, 나아가 레닌 사후 스탈린주의의 대두를 목도했다면 어떤 분석을 내놨을까? 추측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죽음 후 독일 좌익공산주의와 볼셰비키의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서 확대된 쟁점을 매개로 전개된다. 다음 연재에서는 독일 좌익공산주의의 시각을 다루고자 한다. ●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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