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러시아혁명 100주년
  • 2017/12 제35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카우츠키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시각

  • 임필수
  

러시아혁명과 독일 스파르타쿠스 동맹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가 연합해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를 조직할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는 아직 감옥에 있었다. 1916년 메이데이(5월 1일 노동절)에 룩셈부르크가 속한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베를린에서 ‘전쟁이여 사라져라! 정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내걸고 1만 명 규모의 반전 시위를 벌였다. 그녀는 이 사건을 계기로 7월 10일 체포됐다.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재판을 받은 게 아니라 ‘감호’ 상태였다. 3개월마다 체포영장이 새로 작성됐기 때문에 언제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이 감옥의 문을 부수게 될 때야 바깥 세상에 나왔다. 룩셈부르크는 감옥에서 러시아 2월 혁명의 소식을 접하고 아래와 같이 편지를 썼다. 

“당신은 아마 내가 러시아혁명의 소식을 듣고 기뻐서 얼마나 몸을 부르르 떨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년간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오렐, 리가 감옥에서 고생하던 나의 옛 친구들이 이제 자유의 몸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나는 감옥생활이 참 즐겁겠지요? 그러나 나는 기쁩니다. 그로 인해 내가 자유의 몸이 될 기회가 더욱 어렵게 되더라도 나는 그들의 자유를 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룩셈부르크는 감옥 안에서 빈약한 자료를 가지고서도 러시아를 연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녀의 글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감옥 밖으로 흘러나와, 《스파르타쿠스 통신》에 실렸다. 1917년 4월에 쓰여 5월에 발표된 〈늙은 두더지〉라는 글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두더지’란 역사의 저류에 잠복했다가 돌연히 나타나는 혁명을 뜻하므로, ‘늙은’ 두더지란 늦었지만 결국 나타난 혁명을 의미할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발발은 세계대전의 지속, 그와 동시에 벌어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실패가 창출한 역사적 형세의 교착상태를 깨뜨렸다. 3년 간 유럽은 곰팡이가 가득 핀 방과 같아서 그 안에 사는 모든 것을 거의 질식시켰다. 이제 돌연 창문이 활짝 열렸고, 신선하고 상쾌한 돌풍이 들어오고 있다. 방 안의 모든 이가 깊고 자유롭게 숨을 쉬고 있다. 특히, ‘독일 해방자’는 러시아혁명의 무대를 걱정스럽게 주시하고 있다.” (독일 해방자란 표현은 전쟁 초기 독일 사회민주당의 선전을 비꼰 표현이다. 당시 사민당은 독일군이 러시아 짜리즘을 타도하여 피압박 인민을 해방시킬 사명을 지녔다며 전쟁을 지지했다.) 
 
이 시점에 룩셈부르크는 “평화의 문제는 실로 러시아혁명의 거침없는, 급진적 발전에 의존하며, 역으로 러시아혁명은 프랑스·영국·이탈리아·특히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평화를 향한 혁명적 투쟁에 의존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녀는 ‘늙은 두더지’가 자기 일을 결국 잘 해냈다며, “제국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전쟁인가 혁명인가! 제3의 길은 없다”는 슬로건으로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분투를 촉구했다. 

1917년 10월 노동의용군과 페트로그라드 군대의 도움으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사건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가 직접 남긴 글은 없다. 당시 스파르타쿠스의 여러 동맹원이 체포되면서 통신 발간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룩셈부르크가 깊은 우정을 나눈 루이제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신은 러시아인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들이 악마의 연회를 벌이게 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현명한 남편이 주장하듯이 러시아 경제가 아직 저개발 상태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고도로 발전된 서구의 사회민주당이 러시아인이 [전쟁으로] 죽어가는 것을 조용히 구경만 하는 가련한 겁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말이 나는 것도 ‘부르주아 조국을 위해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이는 그 흔적이 세계역사에 영구히 사라지지 않는 훌륭한 행동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 카우츠키: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렇다면 루이제의 ‘현명한’ 남편 칼 카우츠키는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보았나?

1914년 독일이 전쟁을 선포한 후, 8월 3일 독일 사민당은 제국의회의 전쟁공채(전시에 군사비로 쓰려고 모집하는 공채) 발행을 찬성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카우츠키는 의원은 아니었지만 그의 입장을 발표했는데, “전쟁의 성격이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조국을 방어할 권리는 전쟁에 연루된 모든 국가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가 전쟁을 ‘정복’의 기회로 삼지 않는다고 보증한다면, 전쟁공채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태는 카우츠키의 희망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사실 카우츠키는 전쟁 발발 이전에 초제국주의(ultra-imperialism) 이론을 제시했었다. 여기서 그는 금융자본의 국제적 제휴, 즉 국제카르텔이 형성되면서 영토분할 경쟁과 전쟁을 억제할 것이며, 항구적 평화는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훌륭한 조건을 형성할 것이라는 희망을 표출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제국주의론>(1916년 작성)에서 초제국주의론은 ‘초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격렬히 비판했다.) 따라서 카우츠키는 제국주의 전쟁을 대면할 준비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10개월이 지난 1915년 6월이 되자, 이제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며 소름끼치도록 고통스러운 희생을 낳을 것이란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워졌다. 카우츠키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휴고 하스와 함께 정부의 영토 병합 의도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결국 1917년, 사민당에서 분리하여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합류했다.  
 
카우츠키는 1917년 11월에 <러시아 혁명>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는 앞으로 계속 발표될 러시아 혁명에 관한 그의 저술의 기본 주제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첫째, 10월 혁명 이후의 시기는 두 계급 간 투쟁의 시기일 뿐만 아니라, 동일한 계급 내부 다양한 집단 간의 전술적 차이가 나타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계급이익이 일치하고 혁명 이론에 대한 완벽한 동의가 있더라도, 혁명 운동의 힘과 적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 추산은 다를 수도 있다. 실제 짜리즘과 전쟁이라는 조건 때문에 다양한 정당과 경향이 가진 힘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따라서 제헌의회 선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제헌의회가 계급들과 정당들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계급들과 정당들의 상대적 힘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측정하고, 그들의 투쟁에 합리적 기초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러시아혁명의 미래에 제헌의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평화다. 러시아혁명의 주요 목표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고, 민주주의라는 기초 위에서만 프롤레타리아가 성공적으로 계급투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과 민주주의는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심지어 가장 민주화된 국가에서도 전쟁 상태는 민주적 권리의 제한을 야기한다. (이는 프랑스혁명의 경우에서 분명히 확인되는 바, 공포 정치는 혁명의 산물이 아니라 사실은 전쟁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시급히 평화를 달성하는 과제는 러시아혁명의 성공에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혁명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방식의 평화, 즉 영토 병합과 전쟁배상금이 없는 방식으로 평화가 달성되지 않는다면, 이 역시 혁명을 위협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러시아혁명의 딜레마가 있다. 그들은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동시에 만난 괴물인)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서있다. 러시아 혼자서는 병합과 배상이 없는 평화를 달성할 수 없는 조건에 있으며, 결국 인터내셔널이 자신의 임무를 다해야 하는 시간이 도래했다.   
 
 
 
하지만 1918년 1월, 볼셰비키가 아니라 사회혁명당이 다수를 차지한 제헌의회는 해산되고 1918년 3월, 혹독한 영토 양도와 전쟁배상금이 포함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된다. 이후 카우츠키는 본격적인 볼셰비즘 비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1918)를 출판한다. 이 책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유럽의 프롤레타리아가 러시아혁명을 방치하고 심지어 배신했다는 고발이 있으나, 혁명은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유럽의 사회적 관계는 러시아와 다르기 때문에 러시아혁명이 반드시 서유럽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가 유럽 혁명을 기대했다고 해서 이를 심하게 비난할 수는 없으나, 혁명이 정해진 날짜에 발발한다고 예상할 수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이냐 파산이냐는 극단적인 양자택일 방식의 전술을 펼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볼셰비키가 유럽 혁명이라는 단 하나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그 기대가 달성되지 않았을 때 해결할 수 없는 과제에 빠져들어 노골적인 폭력에 의존하는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 책이 발간된 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부전선이 동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지면서 1918년 11월, 독일 전역에서 혁명이 발생했고 러시아혁명을 선례로 삼아 노동자 병사 평의회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사실상 파기되었다.) 

둘째, 소비에트가 의회보다 우월한 민주적 제도인가. 1918년 7월에 열린 전국소비에트총회는 소비에트공화국의 헌법을 완성했는데, 이 헌법에 따르면 일정한 범주의 사람, 즉 ‘생산적 노동이나 공동체에 유익한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만이 소비에트에 보낼 대표를 선출할 권리를 지니며, ‘불로소득, 즉 자본배당 수익, 기업수익, 자산수익을 얻는 사람’은 선거권에서 배제된다. 앞서 4월에 레닌은 소비에트에 관해 ‘선거권자는 노동계급과 피착취계급에 국한하며 부르주아계급은 제외된다, 선거에 관한 모든 관료주의적 형식이나 제약은 폐지하고 대중이 스스로 선거에 관한 규정과 시기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모든 규정은 선거권에 관한 자의적인 제한을 가능케 한다.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내부의 한 정당의 독재로 변질된다. 만약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제헌의회 선거가 다시 열려 볼셰비키가 다수를 획득하면 현재보다 훨씬 더 강력한 도덕적 기반을 획득할 것이다. 소상인과 수공업자, 중농과 대농, 지식인은 애초에 그 모두가 사회주의의 적은 아니었겠지만, 자신의 권리를 박탈하는 조치를 보면 오히려 사회주의의 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실제로 독일혁명 과정에서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명확한 입장을 지니고 있었으나 카우츠키의 독립사민당은 평의회와 국민의회를 모두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카우츠키는 구 국가권력이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평의회가 필요하며,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민의회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는 사회민주당 다수파의 집요한 훼방 시도 끝에 결국 국민의회에 부수된 일종의 ‘자문기구’로 전락하게 되는데, 룩셈부르크는 이를 두고 ‘평의회의 정치적 자살’이라고 개탄했다.) 

셋째, 러시아의 경제적 기초는 여전히 농업이며, 전체 인구의 약 5분의 4는 농민 소경영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혁명을 통해 대토지 소유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해졌으나, 어떤 형태로 바꾸어야 할지는 여러 방안이 있었다. 사회주의적 관점은 대토지 소유를 국가 소유로 전환해 이전까지 임금노동자로 일하던 농민이 협동조합적 형태로 운영하는 것이며, 또 하나의 방안은 토지를 국가 소유로 전환한 다음 소규모로 분할해 빈농이 임차방식으로 경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농민이 대농장의 토지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수용해서 마음대로 분할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 때문에 대농으로 이루어진 부유한 지역과 영세농으로 이루어진 가난한 지역의 격차 해소 문제는 배제되었고, 개별 지역에서도 부농이 대토지 소유의 노른자를 차지했다. 이런 변화로 인해 농민은 생산수단(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와 상품생산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또한 농민은 도시민과 산업종사자의 이해와 대립하게 된다. 예를 들어, 농민은 세금부담을 낮추길 원하는데, 그러려면 국영기업의 이윤을 높여야 하며, 결국 국영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칼 카우츠키는 결론 격으로, 볼셰비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주장했다. 카우츠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다수파에 의한 의회민주주의와 같은 것이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영국과 미국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은 평화적·민주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마르크스의 언급에 의해 마르크스도 동일한 관점을 취했다는 점이 증명된다. (이에 대해 빌헬름 마우트너는 이렇게 설명했다. “마르크스가 의회 독재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에 마르크스는 전체 우익을 금지함으로써 좌익 참여자에 의해 행사되는 좌익 독재를 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구의 대다수-‘인민’ 또는 진정한 다수-로 구성된 계급-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의회그룹이 자신의 이해에 따라 행사하는 포괄적 지배를 말하려 했던 것이다.”)  
 

레닌의 반박, <배신자 카우츠키> 

레닌의 소책자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1918)는 카우츠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분노에 찬 응답이었다. 그리고 그는 카우츠키의 주장을 쉽게 논파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견문이 넓은 한 동지가 며칠 전 베를린에서 편지를 보냈다. ‘카우츠키의 책자는 여기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본인은 계급의식을 갖춘 노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악취 나는 시체가 되어 버린 이 ‘유럽적인’, 즉 제국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사회민주당을 진흙탕 속에서 짓밟아 뭉개도록 독일과 영국에 있는 우리의 대사들에게 이 책자를 수천 권이라도 사들여서 노동자들에게 공짜로 배포하는 데 주저하지 말라고 충고할 것이다.” 

레닌의 소책자는 ‘카우츠키는 어떻게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를 평범한 자유주의자로 변색시켰는가’라는 장으로 시작한다. 레닌은 187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평화적 이행의 가능성을 언급한 마르크스를 카우츠키가 인용한 바에 대해, 무엇보다 1870년대 두 나라의 상황을 1차 세계대전 말의 상황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1870년대에 정점에 도달한 전(前)독점자본주의는,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표현된 근본적인 경제적 특성 때문에 평화와 자유를 (상대적으로) 최대한 선호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반면 제국주의 즉 독점자본주의는 20세기에 이르러야 성숙했고, 근본적인 경제적 특성 때문에 평화와 자유를 최소한 선호하고 군사주의를 최대한, 보편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또한 마지막 장은 농업 문제에 관한 카우츠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할애되었다. 

“그렇다. 우리의 혁명은 전체 소농과 함께 전진했다는 한에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이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분명했고, 1905년 이후로 수백 수천 번 이를 말해왔다. 우리는 역사적 과정에서 이처럼 필수적 단계를 생략하거나 법령으로 폐지하려고 결코 시도한 적 없다. 그러나 10월 혁명, 즉 우리가 권력을 취하기보다 훨씬 더 전인 1917년 4월부터 우리는 이렇게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인민에게 설명했다. 혁명은 이제 지금 단계에서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앞으로 나아갔고 자본주의는 발전했으며 파멸은 전례 없는 차원에 도달했다. 이는 (혹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조치들을 요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으로 고갈된 이 나라를 구원하고 전진하게 하며, 임금 노동자와 피착취자의 고통을 경감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레닌에 따르면, 카우츠키는 볼셰비키가 농민에게 항복하여 토지의 사적 소유를 허용하고 농민 마음대로 분배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었다. 첫째, 카우츠키가 인용한 1917년 10월의 법령뿐 아니라, 1918년 1월 소비에트대회의 권리선언, 1918년 2월 토지사회화법은 토지의 사적 소유를 폐지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분명히 선포했다. 물론 마르크스가 <잉여가치학설사>에서 토지국유화는 “부르주아의 수미일관한 구호”라고 말했던 것처럼, 토지국유화 그 자체는 ‘부르주아 혁명’을 넘어서지 못한다. 토지사회화법에서 ‘사회화’라는 용어도 사회주의로 이행을 향한 의도, 갈망, 준비를 의미할 뿐이다. (토지의 사적 소유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토지의 사적 소유는 마르크스가 분석한 ‘절대지대’를 야기하므로, 토지국유화는 절대지대를 소멸시키거나 최소화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로 이행에서 토지국유화가 실행된 국가는 없었다. 토지국유화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부르주아 사회의 철칙을 침식하리라는 우려 때문이거나, 부르주아 스스로 토지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토지국유화는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완벽한 토대가 되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로 이행을 위해 가장 유연한 농업제도를 창출했다.
 
둘째, 카우츠키는 농업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방안 중에, 놀랍게도 소비에트 정부가 실제로 제시했던 방안, 즉 토지경작의 공동체(communal) 형태, 협동조합 형태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아직 그 수가 적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지원하는 농업공동체와 국영농장(국가의 비용으로 노동자연합이 경작하는 대농장)도 이미 수백 개 존재한다. 

<배신자 카우츠키>의 맨 마지막은 1918년 11월 9일 밤 이후로, 독일에서 성공적인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뉴스가 전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카우츠키에 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관한 결론”을 쓸 필요도 없어졌다고 언급하며 마무리된다. 그러나 독일 혁명의 전도는 레닌이 기대했던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고, 카우츠키의 저술도 멈추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
 
 
필자 소개

임필수 I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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