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러시아혁명 100주년
  • 2017/07 제30호

소련 역사학의 여정

러시아혁명과 소련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①

  • 임필수
러시아혁명은 20세기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70여 년 후 소련의 붕괴가 가한 세계사적 충격은 다른 어떤 사건보다 논쟁적이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 연구는 가장 열정적인 사회과학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혁명과 소련 역사에 대한 많은 연구가 쏟아져 나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연구 동향을 정리하는 연구서도 다수 존재한다. 이번 호부터 두 차례에 걸쳐 소련·러시아와 서구의 역사연구 동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러시아혁명과 소련 역사를 반성할 때 무엇이 쟁점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10회에 걸쳐 러시아혁명의 역사적 사건들과 쟁점을 짚고, 개괄할 예정이다.
 

소련 초기의 역사학

혁명 정부는 집권 직후부터 10월혁명의 역사를 기록하려 했다. 러시아혁명에 적대적인 논객이나, 반(反)볼셰비키 정치세력, ‘러시아해방운동사 연구회’처럼 급진적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되, 볼셰비키 주류의 관점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흐름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그에 따라 1920년 ‘당사위원회’(이스트파르트)가 교육인민위원회 산하기구로 설치됐다. 당사위원회는 1921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로 변경되었다가 1928년 레닌연구소로 통합됐다.

스탈린 체제가 확립되기 전까지 상대적으로 다양한 시각의 혁명사 연구가 전개됐다. 왜 그런가? 1921년 3월, 10차 볼셰비키당 대회 회기 중 크론슈타트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은 민중봉기에 직면해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신경제정책(NEP)으로 전환을 결정했다. 노동자반대파는 오히려 ‘생산자에 의해 관리되고 조정되는 생산형태의 도입’을 주장했다. 즉, 러시아혁명의 전도를 둘러싸고 매우 심각한 의견대립이 발생했다. 따라서 이러한 대립들이 10월혁명에 대한 해석에 투영될 수밖에 없었다. 

1922년, 당 선동선전부 부국장 야코블레프는 <10월의 역사적 의미>라는 팸플릿을 발간했다. 그는 10월혁명이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들을 실현하는 사명과 함께 전개됐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볼셰비키가 반포한 포고령, 예를 들어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의 이용권 하에 두게 한 ‘토지에 관한 포고령’이나 소수민족의 자율권을 강화한 ‘러시아 여러 민족의 권리선언’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를 실현했다. 2월혁명 이후 수립된 부르주아적 임시정부가 이런 과제를 외면했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붕괴할 수밖에 없었고, 볼셰비키가 그 역할을 대행했다는 말이다.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이는 전시경제정책에서 신경제정책으로의 전환이 사회주의 이행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켰음을 반영한다. 야코블레프는 “10월혁명이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열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신경제정책의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셈이었다.

다른 한편, 소련 초기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대부’ 포크로프스키는 《10월혁명사 개관》(1926)을 발표했다. 그는 러시아 역사가 서유럽에 비교해 결코 특수하지 않고, 러시아 사회도 보편적 발전경로를 걸어왔으며, 혁명 전 러시아는 이미 자본주의가 발달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혁명은 주관적으로 지도자의 생각에서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 사태의 본성상 사회주의 혁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혁명기에 누구도 실현하지 못한 대토지 몰수와 균등분배, 대기업 몰수와 국유화라는 사회주의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혁명이 프랑스혁명과 달리 ‘반동 없는 혁명’이 되리라 예상했는데, 볼셰비키 정부가 전복되면 전쟁 전 러시아의 대외부채가 되살아나므로 러시아 노동자, 농민이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포크로프스키의 관점은 혁명 10주년 시점의 낙관적 견해를 대표한다.

그런데 포크로프스키의 역사학은 사후 스탈린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된다. 첫째, 그는 역사의 객관적 요인과 주관적 요인을 두루 살폈지만 개개인의 행위보다는 사회의 객관적 발전단계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스탈린과 같은 개별 혁명가의 활동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이는 스탈린 개인숭배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그는 러시아혁명의 풍부한 역사적 전통을 강조했고, 인민주의 혁명가들의 주장과 마르크스주의의 유사점을 밝혔고, 멘세비키의 활동도 객관적 사료에 바탕을 두어 재조명하고자 했다. 그는 레닌이 탁월한 인물이란 점은 인정했지만, 인민주의를 비롯한 선대 혁명가들이 쌓아올린 혁명전통의 종합자로 간주했다. 따라서 이러한 시각 역시 볼셰비키 전통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스탈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그는 제정 러시아가 ‘민족들의 감옥’이었고 민족들의 자유와 자율성을 억압하는 체제라고 간주했다. 이러한 시각은 소련의 국경 안으로 민족들을 통합하려는 소비에트 애국주의와 충돌할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정권 담당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새로운 역사서를 편찬하려는 야심찬 시도가 개시된다.   
 

스탈린주의 역사 편찬

소련내전사 편수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1935년과 1943년에 «소련 내전»을 출판했다. 이 책은 호화장정본으로 나왔는데, 연대기적으로 사건을 다루되 볼셰비키 지도자의 동향을 세세하게 그려냈다. 스탈린 정권은 이 책이 “볼셰비키의 찬란한 업적에 바쳐진 불멸의 영웅서사시이자 찬가”라고 불렀다. 즉 볼셰비키가 스스로에게 바치는 찬양인 셈이었다. 그런데 책에 등장하는 세밀한 묘사가 반드시 사실에 맞진 않았다. 스탈린의 혁명적 기여를 부각시키기 위해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거나 누락됐다. 2월혁명 당시 스탈린의 행적에 대해선 아무 언급이 없으며 (당시 러시아 내에 남은 볼셰비키를 이끌던 스탈린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임시정부의 혁명적 방위주의, 즉 전쟁정책을 용인했다), 10월혁명 당시 군사봉기 지도자로서 트로츠키의 활동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포크로프스키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도 시작됐다. 1936년 1월 소련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역사학 전선에 관하여>라는 글을 «프라우다»에 게재했다. 이 글은 바나크, 민츠, 로진스키가 제출한 역사 교과서 시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들 저자들이 포크로프스키의 잘 알려진 오류에 근거한 명백히 무가치한 정의와 조건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 이는 “반(反)마르크스주의적, 반(反)레닌적, 근본적으로 청산주의적인 반(反)과학적 역사개념이 우리 역사가들 사이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36년 2월부터 포크로프스키학파에 속한 많은 역사학자들이 줄줄이 처형됐다.

이제 스탈린이 포크로프스키를 대체해 역사학 분야에서도 수령 반열에 오르게 됐다. 스탈린 시대 역사학은 국제주의적 이상주의에서 국가주의적 애국주의로 전환되고, 러시아 민족사를 강조했다. 그에 따라 사실, 사건, 인물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던 구 역사학자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을 대체하여 복귀했다. 역사학 분야의 최고 권위를 스탈린이 차지한 가운데 전통적 역사학자들이 존재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이 와중에 공산당 중앙위원회 편찬위원회는 «소련공산당 약사»(1938, 이하 «약사»)를 출판했다. («약사»는 1980년대 한국에서 출판돼 널리 읽힌 «볼셰비키와 러시아혁명» «러시아혁명사»의 뿌리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은 스탈린주의 역사해석의 정수로 소련의 역사학, 사회과학에서 배타적 지위를 차지했다. 실제 스탈린 자신이 «약사» 서술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 책은 볼셰비키 당의 용감함과 통찰력을 강조하면서도, 혁명 전후 스탈린의 역할을 찬양하는 데 가장 큰 비중을 둔다. 스탈린은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격퇴하고 10월혁명을 주도했으며 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부각된다. 

또한 «약사»는 10월혁명 전 러시아를 반(半)식민지로 규정한다. 1920년대 당내 논쟁에서는 스탈린이 트로츠키의 반식민지론을 공격했으나, 트로츠키파를 격퇴한 후에는 반식민지론을 적극 수용했다. 1930년대의 맥락에서 반식민지론은 계급투쟁보다 러시아-소비에트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아가 주변 자본주의 국가들의 개입 위험을 강조하면서 소련에서 일국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었다.
 

흐루시초프 이후 소련의 수정주의

1956년 2월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비판 비밀연설을 실행하고 탈스탈린화 정책을 주도하면서 소련 지식인 사이에 해빙 분위기가 조성됐다. 1957년 6월부터 새로운 학술지로 «소련 역사»가 발간되고, 1959년 1월 새로운 소련공산당사가 출판됐다. 새로운 ‘당사’는 혁명의 기본성격과 레닌의 지도적 역할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었으나 스탈린에 대한 서술 비중이 감소한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소련 내에서 새로운 역사 해석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일군의 무리가 등장했다. 이들을 소련 역사학의 ‘수정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 (‘60년 세대’라 부르기도 한다)

부르드잘로프는 1956년 논문에서 역사연구에 가해진 공산당의 압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볼셰비키의 역할만을 배타적으로 승인하는 태도를 버릴 것을 촉구한 대표적 수정주의자다. 그는 2월혁명에서 볼셰비키의 지도가 아니라 민중의 자발적 봉기가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강조했다. 그러자 그의 논문을 실은 «역사의 문제» 편집진에 대한 탄압이 발생한다. ‘부르드잘로프 사건’이 그것이다. 때문에 그의 저서 «제2의 러시아혁명: 페트로그라드 봉기»(1967)는 탄압이 완화된 후에야 발간될 수 있었다.

볼로부예프는 10월혁명 전의 소련사회를 ‘복합구조’로 규정했다. 이는 경제구조의 다중성을 의미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 경제제도 뿐 아니라, 농민적, 소상품적 경제제도와 봉건제 이전의 경제제도의 잔재까지도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사회주의 이행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그는 신경제정책의 필연성과 강제집단화의 비합법칙성을 강조했다. 이어서 취약한 경제적 토대에서 스탈린의 정책이 강요되며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서구 수정주의 연구서들이 출판됐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소련 역사를 재조명하는 흐름도 부상했다. 특히 부하린 전기를 출판하고 부하린 노선을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한 코헨이 각광받았다.

특히 1986년부터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주도한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혁명과 소련 역사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는 계기였다. 1987년 11월 러시아혁명 70주년 기념연설 ‘혁명은 계속된다’는 러시아혁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장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연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러시아사회의 후진성을 고려할 때, 바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다고 인정했다. 둘째, 전시공산주의 체제는 그 자체로서 공산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전쟁과 파괴로 인해 강요된 일시적 방편이었을 뿐이라 언급했다. 셋째, 신경제정책은 실질적으로 사회주의의 물적 기반을 놓기 위한 것이었으며, 1920년대 초에 혁명적 실험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고르바초프는 부하린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레닌의 입을 빌어 부하린을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한 근거를 삼고자 했다.

이런 변화로, 소련 학술원 산하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사’ 학술평의회는 1986년과 1988년 두 차례 원탁회의를 개최해 새로운 해석 틀을 찾고자 했다. 혁명 당시 러시아의 사회구조, 혁명의 성격 규정, 1917년 전후 활동한 정치세력(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좌우파, 자유주의 부르주아)에 대한 평가 등 광범위한 쟁점들을 포괄했다. 이는 ‘10월혁명이 유일한 대안이었나’라는 질문으로 모아졌고, 복합구조론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 볼로부예프는 러시아혁명 속에 ‘프롤레타리아, 농민, 반전, 민족해방 혁명’ 등 여러 혁명이 공존했고, 이들이 상호작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련 학자들은 점차 10월혁명이 경제적 성숙에 따라 합법칙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1차대전, 국민경제와 국가구조의 붕괴, 대중의 곤궁이 중첩된 파국적 비상시국의 산물이라고 보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희망이 있던 시기에만 해도 역사학자들을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난국을 돌파하는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공유했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가 난관에 봉착하면서 러시아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이는 10월혁명의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을 동반했다. 즉 1980년대 말에는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 좌파를 호의적으로 평가하거나, 제헌의회 해산(1918)이 부당했다는 평가시각이 제출되기 시작했다. 러시아혁명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데 실패했다는 말이다.
 

소련 붕괴 이후 역사학의 위기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자 다시금 서구의 전체주의 이론이 소련 역사학계의 주류로 부상했다. 서구의 러시아 연구 경향이 역으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과 러시아 역사 연구를 규정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나아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 학자들이 러시아혁명과 소련 체제에 가한 비판은 서구의 진보적 역사학자들을 당황스럽게 할 정도였다.

소련 해체 후 ‘문서고 혁명’도 발생했다. 소련 시대에는 공문서 가운데 학자에게 공개된 것은 2퍼센트에 불과했으나, 새로운 자료가 대량으로 공개된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연구 풍토가 만들어졌다. 물론 러시아 연구자 홀레브뉵은 소련 문서고가 상세한 사실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새로운 개념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제 러시아 역사학은 당의 공식 노선이 없어진 후 ‘역사학의 위기’ 또는 ‘패러다임의 전환기’라고 부를 만큼, 어떤 역사학 이론에 근거할 것이냐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연구풍토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스탈린 시대를 연구하는 러시아 역사학자의 초점은 세대별로 차이를 보인다. 원로세대는 이념지향적 성격이 강하여 찬성이냐 반대냐, 비판이냐 옹호냐는 평가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소련 시기 대학에서 역사교육을 받은 직후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해체를 경험한 ‘허리세대’는 이념적 이분법을 거부하며, 따라서 서구의 수정주의자들과 유사한 경향의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곧 소개할 홀레브뉵, 오소키나는 모두 1959년생이다)

대표적으로 홀레브뉵은 정치사에서 미시사를 추구하며, “현재 가장 생산적이고 진지한 스탈린주의 연구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새로운 문서고 자료를 바탕으로, 스탈린 시대 소련 최고권력부의 작동방식과 성격변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세밀하게 살폈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은 아주 신중한 인물이며,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정치국의 역할이 작지 않았으나, 전후 스탈린 권력이 강화되고 전제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 시대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고, 매 시기마다 성격이 변화했다.

오소키나는 사회경제사에서 미시사를 추구한다. 그녀는 스탈린 시대의 일상적 소비생활 연구에 주력하여 <소비의 위계: 스탈린식 물자공급 조건 속에서 살아가기, 1928~1935>(1993), <‘스탈린식 풍요’의 이면: 산업화 시기 물자공급 체계 속에서 분배와 시장, 1927~1941>(1998), <산업화를 위한 황금: 토르그신>(2008)과 같은 연구를 냈다. <‘스탈린식 풍요’의 이면>은 농업집단화가 진행된 1930년대 상황에서도 비공식적 경제, 유사 사기업(사회주의기업이나 집단농장 외양을 띄지만 실제론 사기업과 같은 경제활동을 하는 단위), 집단 농장원의 텃밭생산물 판매가 소련 인민의 생존전략이었다고 분석했다. <산업화를 위한 황금>은 토르그신(1931~1936년 존속한 국영상점)이 산업화를 위한 재원 충당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그녀의 분석을 종합하면, 사회주의 소련에서 계획경제와 시장은 계속 공존했다.

반면 스탈린 사망 후부터 소련 해체까지 시기를 다루는 연구는 아직 많지 않다. 소련 해체를 다루는 역사서로는 메드베데프의 «소련, 존속의 마지막 몇 년>»(2010)이 있다. 메드베데프는 과거 소련 체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사회주의적 원칙을 옹호했던 인물인데, 그의 저서로는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새물결, 1991), «레닌주의와 현대사회주의의 제문제»(새물결, 1990)가 한국어로 번역돼 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인민의 생활수준 향상부터 꾀하지 않고 민주화를 성급하게 추진했던 것이 오류였고, 따라서 고르바초프가 덩샤오핑의 길을 추구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련체제가 종식되는 과정에서 고프바초프와 옐친의 권력투쟁, 옐친의 권력욕이라는 요소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 체제가 이념적 편협성으로 인해 실패했지만, 사회주의 이상 자체가 무력해진 것은 결코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최근 러시아 역사학계는 소련시대의 정치사, 경제사, 일상사, 문화사 연구에서 새로운 성과를 내놓고 있다.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 역사학이나, 나아가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러시아혁명과 소련사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나? 이는 다음 호에서 다루고자 한다. ●
 

참고 자료

- 윤용선, <소비에트 노조의 국가기구화 논쟁(1918~1921): 레닌과 노동자 반대파를 중심으로>, «서양사론», 1999
- 조호연, <스탈린 시대 역사학>, «인문논총», 2001 
- 한정숙, <‘세계를 뒤흔든 혁명’에 대한 열광, 증오, 성찰: 러시아 혁명 90년: 해석의 역사>, «서양사론», 2008
- 이정희, <러시아혁명 90주년에 되돌아 보는 혁명 러시아: 러시아 10월혁명은 노동자들에게 과연 혁명적이었을까?>, «서양사론», 2008
- 한정숙, <소련의 해체, 클리오의 새로운 모습: 현실사회주의 몰락 후 러시아 역사학의 동향>, «서양사론», 제111호, 2011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기획 연재합니다.

① 소련 역사학의 여정
② 러시아혁명에 대한 서구 역사학의 인식
③ 러시아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시각

④~⑩ 노동하고 착취당하는 인민의 권리선언 /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경제적 모순과 운동 /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 신생 소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들과 쟁점들 / 내전 시기 전시 공산주의 체제와 쟁점의 폭발 / 노동조합 논쟁과 신경제정책의 시작 / 신경제정책 시기 계급들의 상태와 쟁점 / 스탈린 혁명, 스탈린 시대 계급들의 상태와 쟁점 /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이란 무엇인가

 

 
필자 소개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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