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혁명 100주년
- 2017/10 제33호
스탈린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소련 사회 연구에 대한 서구 역사학의 여정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윌리엄 헨리 체임벌린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비에트 체제가 사반세기 동안 여러 변화를 경험하면서, 미국에서는 새로운 혁명적 시스템에 대한 여론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엔 대개 부정적이었고, 심지어 터무니없을 정도였다. 혁명과 내전에서 나타난 잔혹성과 궁핍은 분별력이 별로 없는 러시아 망명객이나 해외 특파원의 선정적인 전언을 통해 크게 과장됐다. 공산주의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약간의 열광적인 지지자를 얻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공포감을 느끼며 공산주의를 거부했다. 혁명의 유혈적·극적 국면이 끝난 후, 미국은 러시아에 무관심해졌다. 번영과 평온을 누리던 1920년대 미국에게 러시아는 보이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소련의 계획경제 도입은 미국 대공황과 시기상 일치했다. 이는 지식인 사회의 여론을 반전시켰다. 반전된 여론은 애초 혁명세력의 잔혹성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때만큼이나 터무니없고 불합리했다. 예를 들어, 소련이 후원한 극단적인 무자비함, 쿨락(부농)의 제거나 농민의 잉여식량을 인정사정 없이 거둬들인 후 발생한 1932~1933년 기근 등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1930년대 상당수의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가 완고하고 교조적인 방식으로 친소련적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많은 수의 선참 혁명가에 대한 처형(스탈린 대숙청)이 알려지며 흔들렸다. 스탈린-히틀러 조약(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과 소련의 핀란드 침공이라는 시험을 겪으면서, 오직 투철한 공산주의자와 충실한 지지자만이 살아남았다. 이 시기 소비에트 체제의 위신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헌데 상황은 다시 뒤바뀐다.
“소련과 독일의 전쟁이 발발한 후, 소련의 위신이 놀랄 만큼 되살아났다. 이런 경향은 극단적으로 나아갔다. 스탈린은 강아지가 따르고, 어린이가 무릎 위에 앉으려 하는 남자라고 감상적으로 묘사됐다. 1935~1938년에 벌어진 정치적 처형은 제5열(적과 내통하는 집단)을 처리한 것뿐이라는 생각이 더 큰 신뢰를 얻었다. 히틀러 침공에 저항하는 러시아의 힘은 소비에트 시스템의 강점에 기인한다고 여겨졌다. 1812년 당시에도 러시아는 전제군주정이었고, 인민 대부분은 농노였지만, 유럽 최고의 정복자(나폴레옹)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는 사실은 잊혔다.”
체임벌린은 혁명 후 러시아의 개인적·공민적 자유가 과거 차르 치하보다는 악화됐으나, 사회민주주의는 크게 확장됐다고 주장했다. 부·계급·인종적 장벽이 제거되면서 기회가 평등하게 분배됐다는 것이다. 그는 더 큰 ‘기회의 평등’이 독일 침공에 대한 러시아의 저항을 설명하는 한 요인이라고 봤다. 따라서 소련과 정확히 동일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20세기가 집산주의 시스템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의 예언은 부분적으로 실현됐다. 전후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이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며 민족적 경제발전 전략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좌파 이론가들은 이러한 제3세계 경제 노선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반공주의적 소련 연구의 부상
미국 학자들은 미소 냉전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러시아 연구에 뛰어들었다. 반공주의적 학자들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을 수용해 소련 사회에 투사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 권력은 테러라는 수단을 통해 개인을 전통적·사회적인 유대로부터 분리하고, 시민사회를 파괴함으로써 원자화된 개인을 창출한다. 그 결과 전체주의 권력은 모든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고, 국가에 대한 개인의 충성심으로 대체한다. 이로써 국가는 개인·공동체·사회를 완벽하게 영유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론을 소련에 적용한 대표적인 저서는 칼 프리드리히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쓴 《전체주의 독재와 전제정》(1956)이었다. 이에 따르면, 내전 시기 레닌이 적색테러 캠페인을 통해 시민사회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스탈린은 농촌공동체와 국가관료를 포함한 도시주민 사이에서 ‘개인의 불가침성’이라는 의미의 모든 유산을 파괴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 지도자는 원자화된 대중을 창출하고 그들을 지배한 국가 거인이 됐다. 이처럼 전체주의 이론은 스탈린주의를 넘어 레닌을 포함한 볼셰비즘 전체에 적용됐고, 공산주의에 내재한 특성으로 규정됐다.
전체주의론이 성립하려면, 소련 국가는 모든 사회적 생활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권력구조는 획일적이고 통합적이어야 한다. 또한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정책이 의도한 바가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 하지만 소련 사회가 정말 전체주의론이 제시한 이미지에 부합했을까? 실제 스탈린이 추진한 정책은 비효율적이거나 혼란스러웠다. 스탈린 정책의 추진과정은 관료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의 반응은 국가의 정책 실행에 영향을 줬고, 대중의 지지 없이는 정책을 순조롭게 집행할 수 없었다.
비판자들은 전체주의론이 스탈린 시대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고 지적한다. 소련 사회의 작동방식을 심도깊게 이해하지 못해 내부 변화를 포착하지 못했으므로 어떤 변화도 예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최근 10여 년간 영어사용권 나라에서 생산된 소련관계 문헌들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했고, 월터 라이커 역시 《혁명의 운명》(1967)에서 “1917년 혁명의 중요성에 대한 토론은 주로 도덕적이며 심지어 신학적이다”라고 주장했다.
1960년대 ‘현대화론’의 비판
1960년대에 들어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된 전체주의론을 비판하는 연구가 본격 등장했다. 이런 연구 흐름은 ‘현대화론’ 또는 ‘발전혁명’으로 불렸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1950년~1978년 연작)를 발표한 카는 서방학자 중 러시아 혁명과 소련 체제를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한 학자 중 하나다. 저술 초기 시점에 그는 위기에 처한 서구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원리를 러시아 혁명 후 소련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봤다. 물론 저술이 진행되면서 이런 시각은 점차 완화됐다.
현대화론자들은 스탈린 체제로 넘어가는 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현대화’와 ‘공업화’로 이해했다. 즉 후진적이고 낙후된 농민사회를 현대화하고 서구를 추격한다는 러시아의 과제에 대해 볼셰비키는 다른 대안이 없었고, 결국 소련의 산업화는 어떤 정권이 수립되든 피할 수 없었던 길이었다. 따라서 소련의 산업화는 세계적 산업화 물결의 변종 중 하나였던 셈이다(거셴크론). 게다가 만성적인 곡물 부족과 대외관계 위기는 급격한 농업집단화와 공업화 정책을 불가피하게 했다(카).
물론 현대화론자들도 스탈린 방식의 ‘사회적 강제’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그들은 소련이 엄청난 인간적·사회적 대가를 지불했지만, 매우 효율적으로 산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노브)는 시각을 공유했다. 하지만 훗날에는 과연 소련의 산업화가 효율적이었냐는 문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한다.
산업화의 성공에 가린 그늘은 어떻게 볼 것이냐는 쟁점도 매우 중요하다. 농업집단화는 농민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소련 지도부에게 장기간에 걸쳐 제거할 수 없는 부담을 주었고, 5개년 계획을 통한 산업화는 심각한 관료제를 형성했으며, 테러와 선전선동은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지적 자유를 박탈했으며, 지도자와 당의 신격화는 대중들의 냉소주의를 낳았다. 심지어 개인독재의 자의성은 관료제의 요구와 갈등을 낳기도 했다. 이는 결국 소련 사회의 불안정성을 배태했고, 결국 소련 체제의 붕괴를 낳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다.
신경제정책 주목한 수정주의 학파
베트남전쟁과 데탕트, ‘68혁명’을 경험한 새로운 세대는 서구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신좌파의 이념에 공감하면서 러시아 혁명과 소련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들은 소련사에 대한 전체주의적 해석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수정주의’ 학파로 불린다. 그들은 소련을 악마로 보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비판하며 소련의 좋은 점을 밝히고자 했고, 소련의 나쁜 측면에 대해선 엄격한 증거를 요구했다. 수정주의적 연구는 그 분야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있었는데,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는 입장부터 중도적인 입장까지 다양해 하나로 묶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견해 중 하나는 10월혁명이 볼셰비키의 음모로 발생한 쿠데타가 아니라, 민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따른 것이라는 시각이다.
‘1세대 수정주의’는 1920년대의 신경제정책(네프)을 지속가능한 정책으로 보고,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은 대체로 신경제정책을 지지한 레닌주의와 부하린주의를 스탈린주의로부터 복원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스탈린 이전 시기 신경제정책 시기를 전체주의 이론으로 설명하길 거부하지만, 스탈린 시기에 대한 평가에서는 전체주의 이론을 거부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훨씬 더 부정적으로 스탈린주의를 묘사할 정도다.
예를 들어 로버트 터커는 《스탈린주의》(1977)에서 스탈린 현상을 정치·문화적 접근법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 개인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고 본 터커는 스탈린주의를 볼셰비키 혁명관에 대한 스탈린 특유의 이해방식과 대러시아 쇼비니즘의 혼합물이라고 봤다. 이 때문에 스탈린이 취한 ‘위로부터의 혁명’은 짜리즘 정치문화에 토대를 둔 군사적·민족적 국가 건설을 목표하게 됐다는 거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로부터의 단절인 셈이다.
한편 코헨은 《부하린과 볼셰비키 혁명》(1973)에서 스탈린주의보다 더욱 절제된 부하린주의적 길이 존재했고, 따라서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의 계승이 아니라 이탈이며, 그 결과 소련사회는 거대 관료제·명령경제, 국가의 전반적인 사회통제로 전환했다고 봤다. 레윈 역시 스탈린이 신경제정책을 폐기함으로써 농업집단화가 농민을 농노로 되돌려 놓았고, 도시로의 대규모 농민유입이 도시문화를 더욱 야만적·후진적으로 변형시켰다고 주장했다.
코헨이나 코언은 스탈린이 혁명을 배반했다고 간주하므로, 10월 혁명 그 자체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는 10월 혁명을 노동자혁명으로 해석하는 이후 연구자들의 연구와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2세대 수정주의’의 선봉장 쉴라 피츠패트릭은 자신이 편집한 《러시아의 문화혁명》(1978)을 시발로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단히 새로운 관점을 내놨고, 첨예한 논쟁을 야기했다. 이 때문에 좁은 의미의 수정주의는 피츠패트릭과 그의 관점을 따르는 학자들만을 지칭한다.
피츠패트릭의 ‘새로운 관점’
피츠패트릭은 스탈린 체제 성립에 적극적 대리인이었던 거대 인구집단에 주목했다. 그녀에 따르면, 스탈린 시기 등용정책을 통해 노동자·농민 출신의 많은 청년들이 교육과 사회적 승진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스탈린 정권은 ‘노동자에게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대로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집단에게 권력을 부여한 것은 아니지만, 개별 노동자가 행정적·전문적 엘리트로 상향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위로부터 강압통치가 존재했으나, 스탈린 정권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특히 청년세대는 스탈린의 세계관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고, 개인적 헌신을 다할 소명을 발견하고 낙관주의가 넘쳤다.
스탈린 시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그보다 전인 네프 시대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코헨은 네프와 부하린주의가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안이자,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영구적 모델이라고 주장했다. 1980년대 고르바초프 시대에 소규모 기업의 사유화를 비롯해 네프를 연상시키는 조치들이 취해지면서 부하린이 복권되고 네프 시기는 더 각광을 받는다.
반면 새로운 관점은 네프 시기를 황금기로 볼 수 없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1920년대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문화적 다원주의를 수용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전문가들이나 관료의 특권에 분개했다. 그들은 네프맨들의 많은 이윤, 높은 실업률에 분개했다. 결국 네프 시기는 평화와 만족의 분위기가 아니었고, 불안하고 불만족스럽고 호전적인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특히 청년당원들은 차라리 내전 시기의 영웅적 나날을 갈망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분위기는 스탈린이 급속한 산업화와 농업집단화, 일국사회주의론을 내걸었을 때 네프의 역전이 이뤄지는 배경이 됐다.
즉 피츠패트릭은 스탈린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고, 스탈린 정책도 민중의 요구를 반영했다고 봤다. 또한 그녀는 《러시아 혁명 1917~1932》(1984)에서 러시아 혁명이 결국 서구를 모방·추격하는 산업화와 테러, 일부 청년과 노동자의 상향이동으로 귀결됐다고 분석했다. 산업화 지향, 숙청과 테러 등 스탈린 정책이 레닌과 질적·양적으로 다르더라도, 그 연속성을 부정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반대론자들은 이 새로운 관점이 스탈린 시대에 대한 ‘면죄부’ 발행이라고 비판했다. 스탈린 정책은 다른 국가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취한 정책과 유사한 것처럼 취급함으로써 왜 이해집단이나 분파 간 갈등이 유혈로 끝났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코헨은 스탈린 시대 연구에서 테러가 중심 주제일 수밖에 없으며, 역사연구도 불가피하게 도덕적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스몰렌스크의 문서고에 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흐마토바는 “염세적이며 퇴폐적인 정신과 부르주아 귀족주의적 미학 취향에 깊이 빠졌다”는 비판을 받고 1946년 작가동맹에서 축출됐다.) 또한 피터 케네즈는 수정주의자들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스탈린과 그의 정치국을 탈악마화한다”고 말했다. 알프레드 메이어는 “전체주의론자나 수정주의자 누구도 스탈린 통치 기간에 끔찍한 무언가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문제는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하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정주의가 스탈린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이다.
반면 수정주의 연구자들은 스탈린 시대 연구가 ‘악마 연구’(demonology)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반박했다. 스탈린 정책이 부적절했지만 왜 이것이 채택되거나 재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개개인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기보다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참혹한 일이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 해체 후 ‘포스트 수정주의’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수정주의는 주목할 만한 연구업적을 내면서 전통적 해석을 제압했다고 자평할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이 모든 흐름을 바꿔버렸다. 리차드 파이프스는 《75년간》(1992)에서 “수정주의의 전위대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게 안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틴 말리아는 《소비에트의 비극》(1994)에서 사회주의의 도덕적 이상이 유토피아적이고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에 소련체제는 출발부터 비합법적이며 파멸될 운명을 안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전환기의 고통이 심화되면서 1991년을 환호하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수정주의자는 소련의 해체가 오히려 소련이 전체주의적이지 않았고, 내부에 변화 잠재력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전체주의적 해석을 수용한 신진 학자가 없어 전체주의는 점차 소멸의 길로 갔다. 피츠패트릭은 “과학적 논쟁은 ‘쟁취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이든 과학자들이 죽는 것으로 이뤄질 따름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옳다는 게 확인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포스트-수정주의’가 그 빈자리를 채운다. 미셸 푸코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권력관계란 필연적으로 다층적이고 탈중심적이기 때문에 ‘위로부터’든 ‘아래로부터’든 각각의 접근법은 한계가 있다면서, ‘문화사로의 전환’(또는 언어학적 전환), 즉 미시사와 문화사 연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표적인 출발점은 스티븐 코트킨의 《자석 산: 문명으로서 스탈린주의》(1995)인데, 이 저작은 1930년대 우랄산맥의 철강도시 마그니토고르스크를 조명한다. 스탈린 체제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행동양태는 작업장, 기술습득 프로그램, 문맹퇴치 강좌처럼 노동자가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현장에서 그들의 행동과 의식에 스며든다. 철강종합단지 건설현장에 이주하여 새로 들어온 노동자는 농민으로서 정체성을 버리고 전형적인 소비에트 노동자로 다시 태어난다. 그들은 이제 ‘볼셰비키처럼 말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문명에 능동적으로 통합된다. 그들이 볼셰비키의 말을 실제로 믿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소비에트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볼셰비키처럼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는 숙청과 테러를 체제의 적을 제거하는 일로 당연시하고, 그들을 비난하고 제거할 것을 요구받았다. 모든 주민은 고용·서비스·안전 등을 국가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므로 볼셰비키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했다. 따라서 1930년대 노동자는 볼셰비키 체제의 ‘적극적 수용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체제에 대한 적극적 도전은 아니었지만, 미세하고 국지적인 저항은 항상 존재했다. 위에서 내리는 지시에 대한 불복과 회피가 너무 많아서 ‘소비에트 인간형’이라는 이상과 거리가 먼 행동이 비일비재했다. 코트킨에 따르면, 스탈린주의란 ‘일종의 가치, 사회적 정체성, 생활양식’이었다.
코트킨의 방법론에 큰 빚을 졌다고 스스로 말한 요한 헬벡은 《스탈린주의적 영혼의 형성》(1996)에서 부농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우크라이나에서 모스크바로 이주한 뽀드루브늬라는 노동자의 일기를 분석한다. 일기의 주인공은 작업장에서, 신문에서, 공식적인 모임에서, 학교의 수업과정에서 끊임없이 유포되는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적극 수용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한다. 그는 스탈린주의의 기본 과정이 ‘스스로 현대화된 자아 만들기’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포스트 수정주의는 스탈린 체제에서 소련 사람은 어떻게 살았나라는 문제에 대한 한 가지 분석을 제시한다. 포스트 수정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개인은 국가의 강요도 있었으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였다. 이른바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전형적 특징은 “배후조정자, 조작자, 기회주의자, 무임승차자, 크게 슬로건을 외치는 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생존자”였다.(피츠패트릭, 《일상의 스탈린주의》, 1999)
여전히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소비에트의 해체 이후 서구 역사학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러시아 혁명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7년 혁명 당시 공장위원회를 연구했던 스티븐 스미스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 혁명 역사서술》(1994)에서 앞으로 부각해야 할 중심 의제를 제시했다. 첫째, 러시아제국 후기와 소비에트 시대로 사회사 연구를 진전시켜야 한다. 둘째, 계급과 젠더, 민족주의와 종족성에 대한 연구를 심화해야 한다. 이는 사회적 정체성이라는 보다 큰 이슈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다. 셋째, 정치사·언어와 상징·문화사 연구가 심화되고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비교연구도 진행되어야 한다. 그가 제시한 의제를 두고 실제로 현재까지도 새로운 연구결과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다음 호에 실릴 3회 글에선 마르크스주의 내 다양한 시각에서 본 러시아 혁명을 다루고자 한다. 4회부터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러시아 혁명과 소련사의 주요 쟁점을 각각 살펴볼 것이다. ●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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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