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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 제38호

세계 평화를 향한 핑크빛 물결

미국 평화운동단체 '코드핑크' 연대 후기

  • 김진영
지난 7월 23~28일 성주 소성리 사드 배치 철회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미국 평화운동가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미국 평화운동 단체 ‘코드 핑크’(CODE PINK: Women for Peace)로부터 미국의 평화운동을 보여주고 싶다는 초대를 받았다. 코드 핑크는 2002년 이라크 전쟁 반대를 계기로 출범한, 올해 15주년을 맞은 미국의 ‘여성 주도적’(women-led) 평화운동단체다. 미국의 부시 정권이 강조하는 테러 적색경보(코드 레드)에 여성들이 평화의 힘으로 맞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마어마한 핑크색 컨셉과 재기발랄한 선전 기획, 주요 정치행사에서의 기습 시위로 어디를 가든 눈길을 끄는 열정적인 단체다. 이번 글은 오늘보다 36호 <전쟁경제에서 평화경제로의 전환, 어떻게 가능할까? - ‘군수 경제로부터의 철수’ 토론회 참가기>에 이은 글이다. 
 
2017년 10월 3일부터 31일까지 미국 워싱턴 DC의 ‘코드핑크 액티비스트 하우스’에서 생활하며 코드핑크의 인턴으로 활동했다. 인천공항을 떠난 지 장장 30시간 만에 사진으로만 보던, 온통 알록달록한 빛깔로 뒤덮인 코드핑크 하우스 앞에 섰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코드핑크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 활동가를 위한 활동가의 집 '코드핑크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코드핑크에서의 활동

나는 코드핑크 티셔츠를 입고 워싱턴 D.C.지역의 코드핑크 활동가들의 일정에 함께 했다. 한국 활동가들의 삶은 익숙하지만 미국 활동가들의 삶은 어떨지 궁금했다. 

미국 운동 단체들의 지향과 활동 방식은 다양하다. 하지만 코드핑크를 기준으로 보면 기본은 비슷하다. 투쟁하고 교육하고 조직한다. 집회와 피케팅, 회의와 강연, 토론회와 상영회 등이 기본 일정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식은 꽤 다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민자 이슈 관련 국회 청문회 방청과 집회 참가는 그 자체로서는 엄청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미국의 정신’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핑크빛 자유의 여신상으로 차려 입고 참여한다면 다르다. 내가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핑크빛 여성 성기 모양 옷을 단체로 입고 “‘질’이란 단어를 입에 담지도 못하면서 질을 통제하려 들지 말라.”(Vagina. Can’t say it? Don’t legislate it.)는 피켓으로 낙태 규제 강화에 항의하는 코드핑크 회원들의 사진도 보았다. (구글에 ‘Codepink’를 검색하면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다.) 코드핑크는 이렇게 선전선동의 달인들로, 어디를 가나 주목받는다. 집회 참가 같은 실천만이 아니라 공화당 전당대회, 보수주의자들의 포럼, 극우 정치인 집무실 등에 쳐들어가는 일들도 서슴지 않는다. 조지 부시 행정부의 국무장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의 청문회에서 붉게 칠해진 손을 들이대며 “전쟁 범죄자! 당신의 손에는 수백만 이라크인의 피가 묻어있어!” 라고 외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덕분에 주요 활동가들은 한국 활동가 못지 않은 연행과 재판 경력을 자랑한다.    
 
무슬림 미국 입국 금지 조치를 규탄하기 위해
핑크빛 '자유의 여신상' 차림으로 트럼프 호텔 앞에 모인 코드핑크 활동가들

이런 효과적인 선전선동이 코드핑크의 가장 큰 강점이자 차별점이지만 활동의 큰 방향이 우리와 다른 점도 있다. 처음 코드핑크 친구들이 “하원의원 빌딩에 로비하러 가자”고 말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로비’란 의원 사무실들을 돌면서 어떠한 법안에는 찬성하고, 어떠한 법안에는 반대할 것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로비 자체는 별 것 아닌 일이었지만, 대국회사업이 활동 전체에서 비중을 꽤 차지하고 여러 캠페인에서 “당신의 지역구 정치인에게 연락해주세요”를 실천 방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군수 경제로부터의 철수’ 캠페인 역시 록히드 마틴 같은 군수기업에 투자하는 은행이나 대학, 지자체들에게 투자 철회를 요구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된 노동자운동과 연대하고, 다양한 의제를 아우르는 연대체·연대사업과 대규모 집회·시위 조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우리의 운동과는 ‘변화의 통로’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제의식 자체는 비슷하지만 말이다. 
 

코드핑크의 멋진 할머니들 

다녀온 뒤 사람들이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어보면 단연 ‘멋진 할머니들’이었다고 답했다. 한국에서는 60대 이상의 여성 활동가들을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한국전쟁 이후 오랜 단절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운동의 역사 자체가 짧고, 운동 문화에 남성 중심적 요소가 여전히 존재하며, 활동가든 아니든 여성이 결혼·임신·출산에 따라 사회활동의 제약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중년 이상 여성을 그 여성 자신이 아닌 ‘어머니, 할머니’로만 위치 짓는 우리 사회의 현실도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남성 노년 활동가들’은 여성보다는 훨씬 많지만, 현업 활동가라기보다는 ‘원로’ ‘어르신’ ‘대표자’의 역할과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코드핑크 활동가들은 전혀 달랐다. 40·50대들뿐만 아니라 60대 이상의 여성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웠지만 ‘뒷방’으로 빠져있는 것도, 높으신 ‘어르신’ 역할만 맡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다를 것 없는 하나의 활동가로 모든 실무와 논의에 참가하는 게 더더욱 놀라웠다. 남성을 포함해 코드핑크의 노년 활동가들은 젊은이들이 피켓을 만들어서 가져오면 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고, 젊은이들이 집회 실무를 마쳐놓으면 기조 발언하고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즐겁게 다음 집회에 입을 핑크색 복장을 고르고 자기가 들 피켓 문구를 짜는 사람들이었다. 따로 물어보기도 했지만 결혼이나 자녀 유무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우리 사회와 다르게, 나이와 상관없이 당당한 ‘나’로 활동하고 다양한 일정들을 소화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이렇게 감탄하는 게 어색할 정도로 코드핑크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자세였다. 물론 코드핑크 활동가 대다수가 백인 중산층 고학력 여성이라는 점에서 미국 내의 모든 여성 활동가들에게 가능한 삶은 아닐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와 확실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토론회에 참가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 D.C.로 날아온 키 크고 멋진 할머니가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의 이름을 욕 대신 사용하던 강경 공화당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반공주의자 닉슨 대통령의 측근으로 일하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중남미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의 실체를 깨닫고 평화운동가가 된 바바라. 그녀가 1934년생, 우리 나이로 84세였음을 한국에 돌아와서야 페이스북 생일 알람을 보고 알게 됐다. 바바라는 지금도 미국 전역에서 참가한 집회 후기들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다.

코드핑크 액티비스트 하우스에 살면서 하우스와 워싱턴 DC 지역 회원 관리를 맡고 있는 상근자, 코드핑크 역대 최고의 ‘하우스맘’(코드핑크 활동가들의 표현)인 파키는 70대 초반의 ‘아나키스트’로, 60년대 베트남 전쟁 반대의 물결 속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딸도 있고, 최근에 명문대에 입학했다고 은근히 자랑한 외손자도 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가르치던 파키는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자 반대 시위에 참가했고 연행되어 다음날 수업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 일로 일자리를 잃었다. 부당하다고 느낀 것과 별개로 더 이상 교직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활동을 시작했다.    
 
왼쪽이 코드핑크 하우스를 관리하는 파키
오른쪽은 코드핑크 설립자이자 지난 7월 소성리를 찾은 메디아
(사진은 백악관 앞 한반도 평화 촉구 집회)
 
미 육군에서 30년 간 복무했고 외교관으로도 근무했지만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바로 전날 이에 거세게 항의하며 사표를 낸 뒤 평화운동가의 길을 걷고 있는 앤도 있다. 앤 역시 70대지만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제주 강정마을과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평창, 디엠지와 북한 등 한반도 곳곳을 수차례 방문하며 한반도 평화 문제에 힘쓰고 있다. 

안타까운 점도 있다. 중노년이 되어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분위기는 매우 좋지만,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 이후에는 평화운동에 새로운 활동가가 많이 유입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의 사회운동도 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다고 들었지만, 다른 주제의 집회들은 비교적 젊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펜타곤(미 국방부) 앞 반전집회에 모인 100여 명 중 백발이 아닌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 3명이었다. 2015년 일본 방문 때 느낀 감상도 비슷했고, 한국의 평화 관련 집회들도 다른 집회에 비해 고령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코드핑크 친구들은 사안의 직접적인 당사자들이 계속 조직되는 다른 의제들과 달리 평화운동이 ‘모두의 문제지만 동시에 아무의 문제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점이 원인 같다고 말했다. 코드핑크는 그래도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선전선동 방식과 다양한 온·오프라인 소통 노력으로 젊은 회원들이 유입되는 조직이다. 
 

우리의 희망은 

미국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되새겨 볼수록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다. 워싱턴 DC와 뉴욕에서 만난 활동가들은 대부분 긴 대화의 끝 무렵에 나에게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지” 물었다. 개인차는 있지만 미국 내 사회운동의 전망을 아주 밝은 상태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 활동가들은 어떻게 활동하는지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코드핑크 하우스 테이블에 단둘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날 파키가 내게 한 질문도 이런 것이었다. 
 
“나는 오래 살았고 오래 활동해왔지만, 지금은 미래에 대해 솔직히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래서 너희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활동하는지 궁금해. 네가 나에게 좀 더 희망을 줄 수 있을까? 너희 촛불집회는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광경 자체만으로는 진짜 ‘변화’라고 할 수 없잖아.”
 
나는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한국의 운동은 90년대 초반까지 이념과 조직에서 단시간 안에 엄청난 성과를 보였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반등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세계적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안세계화 운동에 주목했고, 2010년대 들어서 그리스 시리자나 미국의 샌더스 열풍 등에서 존재감 있는 운동이 등장했었지만, 그것들이 지금은 큰 진전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촛불 집회의 성과가 전무한 건 아니지만, 촛불이 문재인 정권 탄생으로 수렴된 이래로 파키의 말대로 얼마나 더 크고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질지 불투명하고, 한반도 전쟁 위기 역시 많은 한국인들은 군사 옵션을 찬성하고 있다는 점도 덧붙였다. 암울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우울해지자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현실을 몰라서, 상황이 좋아서 활동하는 것이 아님을 서로 알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에겐 서로가 있잖아. 많지는 않더라도 전 세계에. 그게 우리의 힘이 되면 좋겠어.”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한국에 돌아와 생각해봐도 희망은 여전히 또렷하지 않다. ‘적폐 청산’을 부르짖으면서도 갈수록 정책의 후퇴를 거듭하는 문재인 정부는 어떻게 나아갈지, 사회운동은 어떻게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 나갈지 여전히 어렵다. 한반도 정세는 어느 때보다 엄중하고, 먼 이야기 같았던 전쟁은 점점 가깝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내 희망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저 넓은 태평양 건너에도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웃고 이야기했다. 이것이 지난 가을 미국에서 경험한 연대의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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