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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 제27호

‘여성상위시대’의 초라한 여성노동

2000년대 젠더주류화 전략

  • 김진영

‘지상의 스튜어디스’와 여성 국무총리

2004년 4월 1일, KTX가 개통된다. 당시 한국철도공사는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뽑는다며 KTX에서 일할 여성 승무원 모집 광고를 냈다. “1년 계약직 후 정규직이 돼 공무원 수준의 후생복지와 정년을 보장한다”는 공고에, 4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원했다. 

그러나 13대1의 경쟁률을 뚫은 합격자들을 기다린 것은 비정규직의 온갖 설움이었다. 정규직 전환은커녕 해마다 다른 자회사로 옮길 것을 요구받았다. 비정규직을 2년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한 ‘비정규직 보호법’을 피하기 위한 꼼수였다. 2006년 4월 13일, 한국철도공사는 자회사로 옮기길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한 KTX 승무원들을 전원 정리해고한다.
삽화 : 최설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은 한명숙 의원을 국무총리로 지명한다. 취임하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가 될 것이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을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환영 논평을 내 여성 총리의 탄생을 한국 여성운동의 커다란 과제이자 성과로 부각시켰다.

두 사건은 하나로 만난다. 그 결과는 파국이었다. 한명숙 국무총리가 공식 취임하는 날, 전날부터 밤새 한명숙 국무총리 면담과 국회의 사태 해결 노력을 요구하며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농성 중이던 KTX 승무원 80여 명은 경찰 폭력에 의해 끌려나왔다. 이미 한 주 전에 면담 요청을 했지만 문전박대만 당한 상태였다. 다음으로 KTX 승무원들은 여성운동의 또 다른 성과로 불리던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 최초의 여성 서울시장 후보 강금실 의원 선거캠프를 찾았다. 그곳에서도 30여 명의 조합원을 끌어내기 위해 경찰차 21대, 군용트럭 4대, 소방차 1대, 구급차 2대가 동원됐다.
 
©참세상
 
KTX 여성 승무원들의 정리해고와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탄생. 두 사건은 2000년대 중반 여성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IMF 구조조정 이후 값싸고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일자리가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 자리엔 여성들이 안성맞춤이었다. 동시에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여성 정치인·공무원의 약진이 눈부셨으며, 여성부 신설을 비롯한 여성 대상 제도가 확대되었다. 

여성의 빈곤화와 주류화라는 상반되는 두 흐름은 좀처럼 만나지 못했다. 왜 여성의 공적 영역 진출이 확대되던 시대에 여성들은 가난해지고 해고당했는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끌려나올 때 여성 국무총리에 환호하던 여성운동은 어디에 있었는가?
 

여성운동, ‘젠더주류화’를 선언하다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UN 세계여성회의에서 ‘젠더주류화’가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젠더주류화는 ‘사회 전 분야에서 여성참여를 확대하고 정책 전 과정에 걸쳐 젠더 관점을 통합하여 결과적으로 남성지배적 주류조직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이었다. 이는 각국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각국 정부의 정책 목표로 권고되었다.

1997년 당선된 김대중 정부 역시 젠더주류화를 정책 목표로 채택하였고 ‘직장과 가사의 양립’을 여성정책의 기초로 삼았다. 여연을 비롯해 젠더주류화를 운동전략으로 채택한 여성운동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국가 정책에 개입하고, 여성 관련 의제들을 법제화했다.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 제정을 시작으로 1998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설립, 1999년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 제정, 2001년 여성부 신설, 2001년 모성보호법 개정을 통한 산전산후 휴가 90일 확보, 2002년 정당법 개정을 통한 할당제 시행, 2005년 호주제 폐지, 2004년 성매매 방지법 제정 등 정부 여성정책 전반에 대한 정책개입이 이루어졌다.

KTX 승무원 투쟁이 극명하게 보여주었듯이, 이 시기는 비정규직화, 빈곤화가 다수 여성들의 현실로 대두되던 때였다. 그러나 ‘직장과 가사의 양립’이나 ‘여성고용 확대’라는 정책기조는 여성이 임금노동과 가사·양육노동 모두를 부담하는 구조를 활용하는 식이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탄력근로제 도입과 시간제 일자리 확산 등 ‘다양한 근로시간제’를 빙자하여 저임금 비정규직을 전면화하는 계획으로 이어졌다. 결국 여성들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확대되던 상황에서 저임금의 유연한 노동으로서 여성을 활용하려는 정부의 목적에 동원되었다. 여성 국무총리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탄압하는 현실에서 주류 여성운동은 필요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한편 젠더주류화 전략이 가시적인 법제화, 공적 영역 진출과 같은 성과를 내자, 여성의 인권과 지위가 대폭 향상되었다는 관념이 퍼졌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이 관념은 나아진 것 없는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가리고 ‘여성상위시대’, ‘역차별’ 등의 반감 정서를 정당화하는데 동원되었다.

여성운동의 자원이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대중운동이 아니라 상층에서의 정책 결정에 집중되면서, 제도에 대한 반감을 줄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자체도 변화되어갔다. 여성해방·사회변혁이라는 이념과 실천이 목표에서 사라졌으며, 소규모·전문가적·관료적으로 결정되는 젠더주류화 정책에 맞는 형태로 여성운동의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정부로부터 따낸 ‘성과’는 많았으나, 여성운동을 지지하고 함께 하는 더 많은 여성들을 모으지는 못했다.
 
 

이명박-박근혜와 젠더주류화

이명박 정부 출범 이래로 지난 10년간은 젠더주류화 정책의 수난시대였다. 이명박 정부는 여성부를 “여성권력을 주장하는 사람들만의 부서”로 규정하고 폐지를 시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대신 2010년 여성부를 다시 여성가족부로 개편하고, 가족·청소년 관련 업무 비중을 늘렸다. 젠더주류화 전략 실현의 통로였던 여성부가 ‘정상가족 유지’를 위해 힘쓰게 되었고, 성평등 관련 정책과 조직은 축소된다. 여연은 이 시기를 “전 정부에서 정착하기 시작한 젠더 거버넌스가 사실상 파기되었고, 성주류화 전략이 제도화된 도구에 의해 축소되어 형식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젠더관점 없는 국가와 국회로 인해 성평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나 이해보다는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이 무분별하게 생산됐다”는 여연의 평가는 정확하지 않다. 

물론 여성운동이 환영할 만한 젠더 관점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의 ‘퍼플잡’, 박근혜 정부의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여성 시간제 일자리 확대, 지난 10년간의 저출산·고령화·가족 정책들은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로의 여성노동력 활용과 일-가사 이중부담 강화,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를 노골화하는 정책들이었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여성정책의 목표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또한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여성부 혐오, ‘된장녀’ 논란 등은 젠더주류화 전략의 ‘전성기’부터 시작되었다. 여성운동을 혐오하는 남성들은 1999년 군가산점 제도 폐지에서부터 조직되어, 젠더주류화의 ‘성과’들에 대한 반감을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경제위기 시대에 여성과 이주민 등 타자에 대한 혐오가 세계 곳곳에서 발호하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겠지만, 여성운동의 자기성찰 역시 필요한 지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 2년 동안 페미니즘 이념은 다시 주목받았다. 페미니즘 서적, 강연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행동, 조직 결성의 열기가 뜨겁다.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성폭력 폭로), 재생산에 관한 여성의 권리(가임기 여성 지도 규탄, 낙태죄 폐지운동) 문제, 성별 임금격차와 여성 노동의 현실(3월 8일 ‘3시스탑’)이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여성은 박근혜를 몰아낸 촛불 광장에서도 당당한 주역이었다.

‘장미 대선’이라 불리는 다가오는 조기 대선에서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이 유력하다.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만큼, 실내용이 어떻든 젠더주류화가 다시 정부 정책 기조로 설정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어느 때보다도 과거의 젠더주류화 정책과 여성운동의 공과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필요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의 페미니즘 열풍의 생명력은 온·오프라인 행동을 가리지 않으며 페미니스트로서 스스로와 주변을 조직하고 있던 여성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조직된 여성들의 투쟁 없이는 무엇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여성들의 운동은 OECD 최대인 36퍼센트의 성별임금격차, 형법으로 여전히 존재하는 낙태죄 같이 우리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을 찾아냈다. 이 문제들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해결될 수 있다. 정부 정책 개입에 갇히지 않는 대중운동이 진정한 여성의 새 시대를 열 것이다. ●
 
덧붙이는 말

김진영 | 여성해방을 향한 길을 만들어온 만국의 여성들의 역사를 배우고자 사회진보연대 노조페미니즘팀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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