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특집
  • 2016/07 제18호

여성들은 무엇을 외치고 있나

  • 김유미 편집실 기획국장
 
오늘날의 여성혐오는 ‘페미니즘의 과잉’ 속에 남성이 억눌려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 출산과 육아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 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폭력 등의 현실은 여전히 페미니즘 운동의 과제가 산적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히려 억눌려 있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페미니즘은 역사적 시효가 만료됐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역차별로 변질됐다’고 공공연히 이야기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차별과 폭력에 대응하기 어렵다.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그간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자기 경험에 대한 ‘침묵’을 강요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여성에게 여성혐오란

여성혐오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 역시 여성혐오를 내면화한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은행나무, 2012)에서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의 여성혐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특히 ‘근대와 여성혐오’라는 장에서 여성에게 여성혐오가 어떻게 자기혐오로 이어지는지 분석한다. 

근대 사회에서 여성에게도 정치적 권리 및 사회경제적 성취의 길이 열렸지만, 여성은 남성과 달리 ‘아들로서의 성공’과 ‘딸(=여자)로서의 성공’을 동시에 요구받는다. 개인으로서 성취를 이루어야 하지만, 좋은 남편을 만나 내조 잘 하고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라는 요구 역시 받는 것이다. 동시에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이중부담 속에서 여성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끔찍하게 여기며 자기혐오에 빠지곤 한다. 

여성혐오는 여성들 간의 유대를 어렵게 만든다. 여자가 여성혐오를 자기혐오로 경험하지 않는 방법은 남성만큼 또는 남성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예외적 여자’가 되는 것이다. ‘예외적 여자’가 된 여성은 직업적 성취에 서툴고 남성에게 의존적인 ‘보통 여자들’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남성들과 공유한다. 그러나 직업적 성취에 집중하는 독신 여성의 삶도 ‘(여자의 기쁨을 모르는)실패한 인생’으로 취급당하고 만다는 점에서,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김치녀와 개념녀 사이에서

오늘날 한국의 여성혐오 담론은 여성의 행태를 비난 또는 조롱하는 방식을 띤다. 꼴페미, 된장녀, 김치녀, 보슬아치, 성괴, 낙태충, 맘충, 김여사 등이 그렇다. 이러한 말들은 여성들이 비난의 대상과 스스로를 분리하고 자신의 언행을 규율하도록 강제한다. 예를 들면 여성이 여성 문제에 대해 발언할 때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전제를 달며 발언하거나, 연애나 소비 등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여자가 못생겨도, 성형을 해도,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도, 남성의 구애를 거부해도, 처녀가 아니어도, 남성의 성욕을 받아주지 않아도, 아이를 지워도, 아이를 낳아 데리고 다녀도 욕을 먹는 사회에서 여성혐오 담론이 가리키는 ‘그녀’가 되지 않기 위한 여성들의 몸부림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김치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여성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 이른바 ‘개념녀’가 되는 일은 결국 남성의 입맛에 맞는 여성(경제적 자립의 능력을 갖추면서도 남성이 요구하는 여성적 역할을 행하는)이 되는 일일 수밖에 없다.
 

‘탈코르셋’의 몸부림

한국의 여성혐오 담론은 대면 관계가 아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되며 일종의 ‘인터넷 문화’를 이루어 왔다. 그리고 여성혐오에 대한 여성들의 반발 역시 온라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첫 번째 계기는 작년 2월, 트위터의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운동이었다. 한 남학생이 ‘페미니스트가 싫다’며 이슬람극단주의 조직 IS에 가담한 데에 이어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이 논란이 되던 시점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와 조롱이 확산되는 속에서 ‘페미니스트란 무뇌아라 욕먹어 마땅한 가치가 아니다. 페미니즘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목소리가 SNS에서부터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몇 달 뒤에는 여성혐오 발언들을 여성과 남성의 위치만 반대로 바꿔 되갚아주는 ‘미러링’이 주목을 받았다. 이는 디시인사이드 메르스갤러리의 “여자가 먼저 메르스 걸렸으면 한국 여자들 노답이라며 엄청 욕먹었겠지”라는 말에서 시작됐다. 여성의 행동을 무개념한 것으로 비하하는 행태에 반발한 ‘미러링’ 실천이 여성과 남성이 뒤바뀐 사회를 그린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의 설정과 비슷하다고 하여,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메갈리안’이라 불렸다. 이 여성들은 자신의 변화를 ‘탈코르셋(과거 여성의 신체를 옥죄던 코르셋처럼 여성혐오 담론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옥죄고 있던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라 표현하며 통쾌해 했다.

이들은 이후 대중미디어 속의 여성혐오 표현(연예인의 발언, 노래가사, 광고 문구 등)을 찾아내 비판하고,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사진·영상을 공유하는 등의 불법 행위로 논란이 된 성인사이트 ‘소라넷’ 폐지를 이끌어냈다. 

지난 5월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이후의 추모 물결은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가능했다. 언론은 여느 때처럼 이 사건을 ‘어떤 미친놈의 짓’으로 넘기려 했지만,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여성혐오 표현, 성희롱, 폭력의 경험과 이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온라인 커뮤니티를 넘어 오프라인 공간에서도 모습을 드러내 추모 행동을 벌였다. 


깊고 너른 공분

메갈리안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실천과 강남역 10번 출구의 추모 행동은 한국 사회의 광범위한 여성혐오를 사회문제로 끌어올리고, 이것이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는 ‘문제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공론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러한 행동에 참여하거나 공감하는 이들은 20대에서 30대 초중반의 젊은 여성이 다수이다.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적 문화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젊은 여성은 성적 대상화나 폭력에 가장 쉽게 노출되는 동시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기주장을 펼치는 데에 제약이 많은 집단이다. 특히 사회초년생 여성의 경우 학교에서는 겪지 못했던 차별과 성희롱, 결혼이나 출산을 둘러싼 내적 갈등을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부터 모인 것은 인터넷 여성혐오 문화의 심각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오프라인 생활공간에서 자신의 곤란에 침묵하고 ‘여성스럽게’ 웃어넘겨야만 하는 젊은 여성들의 처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메갈리안 사이트나 여성 커뮤니티, SNS 등에서는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극단적인 폭력뿐 아니라 매우 다양한 여성들의 일상 경험이 이야기되고 있다. 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이고, 때로는 공격적인 방식으로 분출된 온라인 실천의 바탕에는 이처럼 깊고 너른 공분이 존재한다. 여성혐오 표현이 지시하는 모순적인 요구들을 더는 견디지 않겠다는 외침은 젊은 여성들에게는 ‘나’로서 살아남기 위한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어디로 향할 것인가

지금 여성혐오에 맞서는 여성들의 움직임은 여성혐오 표현을 찾아내어 비판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공론화하는 양상을 띤다. 젊은 여성들은 이를 계기로 페미니즘 서적을 찾아 읽으며 자기 삶의 다양한 경험들을 재구성하고 있다. 관건은 온라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움직임이 어떻게 하면 여성들이 오프라인 생활공간(가정, 직장, 학교 등)에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혐오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구조적인 조건을 바꾸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기회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도 여전히 지체되어 있는 여성의 현실 지표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여성혐오 담론은 이를 여성 개개인의 무능이나 무개념의 문제로 치부하여 무시한다. 그리하여 ‘성적 매력을 이용해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여성’이라는 현상이 지속되는 이유를 묻지 않고, 현상 자체를 과장하여 여성을 비난하기를 택한다. 

여성을 공적 영역에 부적합한 ‘무질서·무개념한 존재’로 그리는 것은 여성혐오의 오래된 양상이다. 하지만 오늘날 여성혐오 담론은 여성에게 공적 영역에 진출할 수 있는 ‘중성적 개인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여성도 연애 및 성적 관계에서 주체적인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여성에게 고유한 위험이나 권리(성폭력, 임신출산 등)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낸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인간의 기준이 되는 ‘중성적 개인’이 여전히 남성이라는 의미이다. 

기존 질서에 여성들을 편입시키는 것만으로 여성의 권리는 달성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여성의 현실을 왜곡시켰다. 개인의 기준이 남성인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연애를 비롯한 성적 관계, 결혼, 임신출산, 육아 등의 과정이 끊임없는 갈등과 공적 영역에서의 핸디캡으로 작용한다. 이 기준이 유지되는 한 여성 정책은 지하철 여성전용칸, 여성전용 주차 공간 등 여성을 동등한 사회구성원이 아닌 보호의 대상으로 만드는 우스꽝스러운 것에 머무를 뿐이다. 

여성혐오에 저항하고, 여성의 시각에서 현실을 재구성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기준을 재구성하고 차이가 인정되는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페미니즘 운동이 언제나 말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겐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 여성과 남성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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