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5/05 제4호
값싼 노동에 내몰리는 여성들
어긋난 비정규직 대책이 만든 현실
지난해 말 또 하나의 ‘비정규직 대책’이 던져졌다. 노동·사회단체들은 이것이 지난 정권들의 정책을 재탕 우려낸 데다,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하향평준화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했다. 비정규직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책이나 성차별적 비정규직화를 규제할 대책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똑같다. 그동안 어떤 정권도 ‘젠더 관점(생물학적 성차性差가 아니라 사회적인 성별을 나타내는 용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축소하기 위한 논의를 할 때 '젠더 관점'이라는 용어를 쓴다.)’을 포함한 비정규직 대책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젠더 관점이 통합된 정책은 어떤 내용이어야 할까? 비정규직 노동자 중에서도 여성만이 겪는 어려움, 예컨대 모성보호에 관한 개선책이 포함되어 있다면 적절한가? 물론 그렇다. 여성노동자가 더 많이 수혜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최저임금 인상안이 들어 있다면? 노동시장 내 성별 격차를 완화하는데 기여할 테니 이 역시 적절하다. 하지만 이와 같이 정책 수혜의 성별 영향을 검토하는 것은 비정규직 대책을 둘러싼 젠더 이슈의 일부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것 외에 이슈화 되어야 할 쟁점이 무엇인지, 비정규직 문제와 노동시장 분절을 젠더 관점에서 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그다지 풍부한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간의 비정규직 대책들이 한국사회의 젠더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그 변화는 또 어떠한 사회적 효과들을 초래하고 있는지. 거슬러 올라가 이토록 극심한 한국 노동시장의 젠더화 된 분절이 어디서 기원하며 계속 유지시키는 요인들은 무엇인지. 풀어야 할 질문들은 수없이 많다.
젠더화된 노동시장 분절은
정부 정책의 결과
일반적으로 여성의 비정규직화는 ‘기업이 무분별하게 성차별적으로 여성 비정규직을 활용하는 데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미흡해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진단되었다. 그런데 정부의 책임이 제대로 규제하지 못한 것, 그 뿐인가? 젠더화된 노동시장 분절은 오히려 정부 정책의 직접적인 효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난 20년간 역대 정권이 추진해 온 여성노동정책은 ‘여성인력 활용’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앞에 붙은 수식어만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경제 성장을 위한’, ‘저출산·고령화 극복을 위한’ 등으로 달라졌을 뿐이다.
대표적인 과제인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일자리 창출은 사실상 기혼 여성을 저임금 주변부 일자리에 배치하는 프로그램들이었다. 특히 ‘여성을 위한’ 시간제 일자리 확대는 이명박 정권 때 본격 등장하여 박근혜 정부의 <고용률 70퍼센트 로드맵>에도 주요 과제로 포함됐다.
중요한 건 여성인력 활용 정책과 맞물려 있는 비정규직 정책의 효과이다. 2007년 시행된 기간제법과 그 후의 비정규직 대책들은 비정규직 규모를 일정하게 감소시켰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고용형태를 매개로 노동력의 위계를 재생산했다. 상시업무를 담당하는 일부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되, 외주화나 시간제로 ‘주변’ 업무를 분리하는 길을 열어 줌으로써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비정규직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다시 계약직, 간접고용, 시간제로 서열화됐다. 그리고 그 말단은 계속 여성으로 채워졌다.
2004년에서 2014년 사이 전체 임금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중은 줄었고 남성 비정규직 규모에는 거의 변동이 없지만 여성 비정규직은 423만 명에서 457만 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시간제와 파견용역직의 증가가 두드러져서 여성노동자 중에서 두 고용형태가 차지하는 비중은 16.9퍼센트에서 22.6퍼센트로 늘어났다. 시간제 노동자의 상대적 임금 하락도 동반됐다. 2014년 정규직의 65.8퍼센트였던 시간제 임금은 48퍼센트로 하락해 그 격차가 확대됐다. (김유선, <여성 비정규직 실태와 정책과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슈페이퍼 2015-3》)
늘어난 여성 시간제 일자리가 정규직보다 노동시간만 적은 ‘양질의 일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백화점 노동자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시간제 여성노동자들은 고용안정, 임금, 노동조건, 노동통제 등 모든 면에서 백화점 노동서열의 최하부에 위치해 있다. (김양희, <유통서비스업 시간제 일자리의 실제> 《한국여성학》 29권 2호, 2013)
결국 비정규직 정책과 여성인력 활용 정책은 노동력 내부의 위계를 세분화하고 하위직을 여성으로 채워 넣는 메커니즘의 양대 축이었던 셈이다. 이 정책들은 또한 육아기 경력을 중단했다가 노동시장에 재진입할 때 비정규직으로 하향 취업하는 모델을 여성의 노동생애로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주변부 노동력으로서 여성의 지위를 고착화했다. 남녀 노동자가 일과 가족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는 젠더 통합적 생애 모델은커녕, 정부는 도리어 남녀의 다른 생애 모델을 정상화하는 방식으로 젠더 관계를 재조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위기의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데 매우 긴요하다.
여성 노동의 주변화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
오늘날 여성이 주변부 일자리로 유입되는 데에는 인건비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수요 측의 요구뿐 아니라 단 얼마라도 추가 소득을 통해 가구 경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공급 측의 요구도 맞물려 있다. 물론 이것이 전에 없던 현상은 아니지만, 최근 증가하고 있는 중고령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는 가구 경제와 여성 노동시장 진입의 관계에 대해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무수한 여성인력 활용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사이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은 49.9퍼센트에서 51.3퍼센트로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50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무려 9.1퍼센트나 올라 20대에 근접했다(<그림 1>).
이들의 취업은 주로 비정규직으로 이루어졌다. <그림 2>와 같이 50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는 2004년 34만 명에서 2014년 7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2011년 이후로는 20~40대에서 모두 비정규직이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50~60대는 역행하고 있다. 여기서 함께 봐야 할 것이 남성 비정규직 추이다. <그림 3>에서 남성 비정규직 역시 20~40대에서는 감소하고 50~60대에서는 급격히 증가해서, 10년 사이 50만 명이나 늘었다.
이는 남편이 퇴직 압력을 받거나 고용이 불안정해진 중고령층 가구에서 아내의 취업이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음을 나타내며, 이러한 경향은 특히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두드러진다. (신경아, <신자유주의시대 남성 생계부양자의식의 균열과 젠더관계의 변화> 《한국여성학》 30권 4호, 2014)
남성 가구주의 소득이 전체 가구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77.6퍼센트에서 2013년 74.6퍼센트로 줄었고, 저학력계층 가구주의 소득 비중 감소가 이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반면 배우자 소득의 구성비는 같은 기간 12.7퍼센트에서 15.4퍼센트로 늘었는데, 이는 50~60대 여성이 주도하고 있다. (신경아, 앞의 글)
실질임금 상승률은 0에 가깝고 가계 부채는 늘어나는데 남성 가장의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자녀의 독립과 취업은 늦어지는, 몇 년 사이 더욱 심화된 저소득층 가구의 위기 상황에 중고령 여성의 취업이 산소호흡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를 서구처럼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전업주부 젠더 모델이 쇠퇴하고 2인 소득자 혹은 1.5인 소득자 모델이 확산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을까? 형식적으로는 그러하다. 문제는 저소득층의 경우 남녀 모두 ‘1.5인분’의 시간 동안 일해도 ‘1인분’의 소득을 벌기 어려운 한국 노동시장의 사정이다. 여성의 처지는 더 암담하다. 몇 년, 몇 달, 심지어 하루 이틀 단위로 공식·비공식 부문의 저임금 일자리를 오가는 취업 활동 외에도 가족 돌봄 또한 온전히 맡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통계청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가구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42분,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3시간 27분이다.
일-가족 이중부담도 문제지만 더 절망적인 건, 한국사회 여성들이 노동자로서든 주부로서든 안정적인 자신의 생애 모델을 기획하고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족들의 형편에 따라 그때그때 이 일 저 일에 투입되어야 하는 극단적인 ‘유연성’이 여성의 생애를 지배하고 있다. 이 유연성은 역대 정권의 여성·노동정책의 산물이며 또한 역대 정권의 노동·경제 정책의 실패를 벌충하는 수단이다. 이 유연성으로부터 기업이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여성·노동정책의 새판 짜기 필요
이러한 정부와 기업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지금 우리 사회에 있나? 남녀고용평등법으로 대표되는 규제 법률은 성차별적인 비정규직 확산에 무기력했다. ‘여성적 일’과 여성 직종을 우선적으로, 가장 열악한 조건으로 비정규직화하는 기업의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도 성차별 문제로 기업의 법적 책임을 따질 수 있는 여지는 현저히 줄었다. 2000년대 들어 꾸준히 발전해 온 일·가족 양립 정책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도와 달리 육아휴직 같은 제도들은 그 이용 가능성을 기준으로 분절을 재확립하는 장치가 되어 버렸다. 여성의 주변 노동력화로, 그동안 고용평등 정책과 여성노동정책으로 추진되어 온 모든 법·제도들은 이렇게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기존 정책의 수혜자로 끼워 넣는 전략일까?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를 별도의 취약집단으로 보호하는 정책, 비정규직에게 출산휴가를 주고 재고용하는 기업주에게 지원금을 주는 제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무용하지는 않다. 그러나 노동·사회운동은 보다 근원적, 전환적인 전략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특정 방식으로 활용되고 보호되어야 하는 노동력으로 여성을 잔여화하는 프레임으로는 젠더화된 노동시장을 문제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프레임에 기반한 여성인력 활용 정책이 초래한 결과는 앞서 본 바와 같다.
따라서 여성이 아니라 노동시장 내 젠더 격차, 젠더화된 분절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범주의 고용평등 정책, 여성·노동정책을 모색하고 제시해야 한다. 기존의 노동·복지 정책뿐 아니라 예컨대 중장년 여성의 출혈적인 저임금 노동으로 지탱되고 있는 서비스산업 규제 정책, 여성노동력의 주요한 고용 기반인 중소기업 정책들도 이 범주 안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가장 시급한 실천은 여성을 주변 노동력으로 편입시키는 여성·노동정책의 중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