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오늘세계
  • 2017/10 제33호

세계로 뻗어 나간 자본 국경선 안에 갇힌 노동

  • 한건희
자본주의가 언제부터인가에 대해선 여러 관점이 있지만, 월러스틴을 비롯한 세계체계 이론가들은 16세기 무렵부터 유럽이 자본주의를 향해 나아갔다고 본다.

자본은 이윤을 위해 국경을 넘나든다. 봉건경제의 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유럽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륙 바깥으로 나아갔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해 식민지를 확대했고, 아시아와 무역을 시작했다. 18~19세기가 되면 자본의 무대는 세계 전체가 된다. 영국의 자본가들은 삼각 무역을 통해 대량으로 면직물을 만들어 인도에 팔고, 인도에서는 아편을 키워 청나라에 내다 팔았다.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지속되고 있고, 자본의 국제적 이동 또한 심화되고 있다. 최근 자본가들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하고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미 부품별·공정별로 세분화된 국제적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이를 기반으로 국외로 향한다. 비약적인 정보·통신·운송 기술의 발달과 각종 자유화 조치 덕분이다. 

이런 생산 네트워크가 최대한의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임금이 싼 곳으로 공장을 옮길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 속에서 자본은 국경 간 자본 이동의 자유와 지역 내 노동의 유연화를 요구한다. 이런 메커니즘에서 자본이 자유롭게 세계를 넘나들게 될수록 노동자들의 삶은 불안정해진다.   
 

세계화가 야기한 불안정 노동

한국에서도 그랬다. 외환위기 이후 구제금융의 대가로 IMF가 요구한 각종 개혁 정책들은 한국 경제를 본격적으로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체제에 편입시켰다. 각종 시장·금융 자유화 조치가 시행됐고, 이에 따라 외국 자본의 투자가 급증했다. 민영화를 비롯한 포괄적인 공공부문 개혁도 추진됐다. 민간 투자자들이 공공부문에서 이윤을 얻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노동의 불안정화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가장 빈곤하고 덜 조직된 분야의 노동자들이었다. 현재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OECD 평균의 두 배에 육박하는데, 그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 노동자들보다 15퍼센트가량 높다. 이주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비정규직이다.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에서 진행된 자본의 자유화는 이미 1980~1990년대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각국에서 진행된 바 있고, 한국 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노동 유연화와 공공부문 민영화는 지난 2007~2008년의 유로존 금융위기 당시 남유럽의 노동자들에게 그대로 반복됐다. 시기와 장소는 달랐지만 이유는 모두 같았다. 국제적으로 움직이는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국적과 인종 안에 가두어진 노동자

자본은 노동자들이 이 사실을 인식하고 함께 맞서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자본은 성별·인종·국적 등의 경계를 통해 노동자들을 나누고,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아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것이 노동자들이 국제적인 시각을 갖는 것을 막고 서로 연대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때 민족·국적은 노동자들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자본은 노동자들을 ‘국민’으로 호명한다. 한국의 노동자와 중국, 일본의 노동자는 같은 문제에 맞서 연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 ‘국민’과 중국·일본 ‘국민’은 서로 자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경쟁하는 사이가 된다. 자본의 이러한 전략은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일본·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증오와 거부는 이미 일상이다. 

자본은 국적에 상관없이 국경을 넘나들며 이윤을 챙기면서도 노동자들에게는 국가라는 틀과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강요한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에 대응하는 투쟁은 국제적 시야를 갖추고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넘어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어나가는 투쟁이어야 한다. 
 
 

어떻게 싸워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의 누구와 연대할 수 있을까? 먼저 한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 자본들의 움직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막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꿈꿔볼 수도 있겠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도 훌륭한 국제 연대의 사례가 될 것이다. 

당장은 조건상 국제적 연대가 녹록지 않아 국가 안에서만 세계화된 자본에 맞서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도 우리는 각각의 투쟁이 갖는 국제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더 잘 싸울 수 있고, 보이지 않는 효과를 만들 수 있다. 나아가 노동자들은 국경을 넘어 국제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기반을 쌓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운동이 항상 국제적 시야를 유지하면서 공통의 전망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필자 소개

한건희 | 우리는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얼마 전부터 오늘보다 편집실에서 반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우리의 전망, 오늘보다
정기구독
태그
시그널 비밀의 숲 시크릿 한여진 신영주 차수현 여주
관련글
트럼프 당선과 미국의 탈세계화
건설산업과 이주노동자 조직화
"이주노동자 온다고 큰일 안 나요"
방글라데시 청년 마문이 한국에서 울고 웃던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