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기획
  • 2016/05 제16호

의학 이데올로기에 맞선 사회의학의 도전

질병의 책임, 자본주의에 묻다

  • 김태훈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의사
 
최초로 질병의 사회적 요인에 대해 연구한
독일의 병리학자 비르효
사회의학은 대체로 사회, 건강, 의료의 상호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그런 연구에서 유래된 임상의학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대체로 독일의 병리학자 루돌프 비르효(Rudolf Virchow, 1821-1902)의 연구를 사회의학의 기원으로 보는데요. 그는 세포병리학에도 많은 공헌을 해 당시 프로이센에서 ‘의학의 교황’으로 불렸었죠.

비르효는 1848년 독일(당시 프로이센) 상부 슐레지엔 지방에서 유행한 발진티푸스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질병의 기원은 세균에 있지만, 질병의 확산과 개인의 감수성은 주거, 작업환경, 식생활 같은 사회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분석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발진티푸스는 머릿니나 몸이가 사람에 기생해 피를 빠는 과정에서 리케치아라는 세균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병입니다. 치사율이 높고 비위생적 환경에서 유행하죠. 1,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유행하여 수백만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비위생적 환경의 난민 캠프나 형무소에서 발병됩니다.

질병이 확산되고, 특정한 개인들이 감염되는 과정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르효의 분석은 현대 의학을 기준으로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죠.

비르효는 전염병의 원인을 사회적 요인으로 분석한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경제적 불평등, 문맹, 봉건적 정치체계 등이 어떻게 전염병 해결을 지연시키는지 지적하죠. 나아가 장기적으로 전염병을 해결하려면 토지개혁, 소득재분배, 민주적인 정부와 같은 혁명적 수준의 사회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유럽이 혁명의 열기로 가득했던 1848년이라는 사회적 배경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건강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 밖에 없다고 역설한 바 있죠.

비르효와 엥겔스가 시초를 이룬 사회의학은 북미와 유럽에서도 이어지지만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둡니다. 1970년 칠레 인민연합(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연합정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표적입니다. 아옌데는 직업병, 모성 및 영아 사망 등 구체적인 건강문제에 대해서 분석하기도 했고, 치료법의 혁신보다 경제수준의 향상으로 결핵이 더 잘 낫는다는 사실 등 이전에 연구되지 않았던 문제들을 분석했습니다.

비록 아옌데 정부는 군부 쿠테타로 무너졌지만, 사회의학은 남아서 라틴아메리카의 의학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1984년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협회(ALAMES)의 창립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낳았죠.
 
 

사회의학의 이론

사회의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합니다. 예컨대 하워드 웨이츠킨(<사회의학의 과거와 현재: 라틴아메리카의 교훈>의 저자)은 사회의학과 보건학의 차이를 강조하는데요. 현대 보건학과 예방의학은 인구집단을 개인의 합으로 봅니다. 성별, 연령, 교육수준, 소득, 인종 등 개인의 특성에 따라 집단을 분류해서 통계적으로 연구하죠.

반면 사회의학은 생산수단의 소유와 생산과정에 대한 통제 여부로 구분되는 계급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인구집단을 총체적으로 파악해 개인이 아닌 사회를 분석단위로 채택합니다.

두 번째로 사회의학은 생산과정과 건강, 즉 노동의 위계나 생산공정, 노동조건이 노동자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데요. 여성노동자의 임금노동, 가사노동, 양육노동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합니다.

세 번째로는 의학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하는데요. 바로 이 의학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쏟아지는 건강정보

의사들은 교양·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게스트 중 하나입니다. 종합편성채널까지 가세해 의학정보 프로그램들이 난립하고 있죠. 대한의사협회는 이런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제공하거나, 병원이나 의료 상품을 광고하는 의사들을 ‘쇼닥터’라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전문가의 검증을 거친 정보만 유통하면 문제가 없는 걸까요? 건강 정보는 대부분 개개인의 행위에 영향을 줍니다. 의학 프로그램을 보면 ‘나도 저 병이 아닐까’, ‘병원에 가볼까’ 생각하고, 몸매 좋은 강사가 운동법을 가르쳐주면 따라해 보기도 하죠. 이런 인식과 실천은 어떤 통념을 낳습니다. 질병도 개인이 걸리는 거고, 질병의 원인도 개인에서 비롯된 것이며, 치료도 개인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현실의 근거가 있습니다. 예컨대 과학이 발전하면서 생리학, 조직학, 세균학도 발전했어요. 세균학의 측면에서 현대의학은 질병을 생물학적으로 환원하는 생의학 모형을 확립했습니다. 독감이란 ‘독감 바이러스가 세포에 침투해 세포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식이죠. 감염되지 않는 질병도 마찬가지인데요. 만성질환이나 암 등을 다룰 때에도 현대의학은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찾거나 생활습관을 찾으려 합니다.
 
 

의료의 위기

이처럼 현대 의학은 개인적이고 치료 중심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이는 사후 대응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이 발생한 원인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죠. 예컨대 감기는 푹 쉬면 낫는 병이지만, 노동자들은 일을 중단할 수 없기 때문에 강한 진통제나 진해거담제를 찾게 됩니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시스템이 계속되니 의료비 지출은 느는데 건강은 그만큼 좋아지지 않는 거죠. 여기서 의료의 위기가 발생합니다.

물론 현대 의학이 불필요한 건 아닙니다. 의료는 건강과 질병에 대한 관리·치료 기능을 수행하면서,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통제하죠. 이처럼 의료는 실제로 질병이 만드는 고통과 장애를 없애거나 완화합니다. 하지만 그 질병이 자본주의에서 비롯한다는 인식을 가로막기도 하죠.

우리는 각종 건강정보를 보면서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발암물질인 담배도 끊으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초국적 식품기업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한정돼 있습니다. OECD 가입국 중 가장 긴 시간을 일하는 한국에서 노동자들은 수면장애, 조산이나 자연유산, 암에 노출됩니다. 요컨대 교대제는 2급 발암물질이죠.

우리는 그동안 ‘자본주의와 질병’ 연재를 통해 질병이 사회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반면 현대 의학은 질병을 사후적으로 해결하는 유용한 기능을 수행하면서 개인적·치료중심적 인식을 강화해왔죠.

따라서 사회의학이 수행한 노동자의 건강에 대한 분석과 현대의학 비판은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향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누구나 건강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보건의료운동이 대안세계를 향한 이념과 결합되어야 할 이유는 그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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