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보다
- 2015/12 제11호
임금피크제 실시 요령을 알려드립니다
서울대병원에서 벌어진 자본의 악다구니
“임금피크제 만드는 건 힘들었습니다. 전 세계 최초라서요.” 지난 10월에 열린 임금피크제 설명회에서 연사가 한 말이다. 임금피크제가 ‘세계적 대세’라는 CF는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저희도 안 좋은 거 알아요. 그런데 어떡합니까?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지. BH(청와대)에서 계속 쪼아요”라는 한 관리자의 하소연이 임금피크제의 진실이다.
병원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려 온갖 논리를 가져 온다. 6000명 이상이 일하는 서울대병원에 임금피크제 대상자는 50여명뿐이란다. 그런데 정년퇴직자의 임금도 신입직원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지라 임금피크제로 임금을 깎아도 신규채용 인건비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임금피크제를 통해 추가 채용 할 수 있는 사람이 40여 명 남짓이란다.
반면에 노동조합의 2015년 인력 충원 요구는 60명이 넘는다. 청년실업 해소가 중요하다던 정부는 60명 중 단 1명의 충원도 허용하지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임금피크제는 이렇게 서울대병원에 강제 착륙을 시도 중이다.
“요즘 이런 제도 없는 회사 있니?”
서울대병원은 올 초 정부에 제출한 자료에 ‘우수직원 양성제도’ 도입을 명시했다. 이 제도의 다른 이름은 ‘저성과자 관리제도’이다. 저성과자를 선정해서 1차, 2차 교육 후에 퇴출대상자를 정하는 것이라 노조는 이걸 ‘2진 아웃제’라고 부른다. ‘설마 퇴출까지 시키겠냐, 아직 퇴출 된 사람은 없다’는 병원의 변명에 그럼 마지막 ‘퇴출 대상자 확정’ 단계를 삭제할 것을 요구 했다. 이에 대한 병원의 답변은 “요즘 이런 제도 없는 회사가 있냐?”라는 것이었다. 병원은 9월에 이런 답변을 한 뒤 ‘우수직원 양성제도’를 유지했고 10월에 임금피크제를 강요했다.
임금피크제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정부는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도입율이 높아지자 성과급제를 꺼내들었다. 노동개혁이라는 허울을 쓰고 퇴출제, 임금피크제, 성과급제라는 폭탄들이 쏟아지는 것이다.
“가는 데 순서 없다”
“병원에 제일 많은 직종인 간호사들은 임금피크제랑 상관이 별로 없잖아요.” 인사담당자는 임금피크제 도입에 자신 있는 이유로 ‘간호사’를 들먹였다. 서울대병원뿐 아니라 대부분의 병원에 가장 많은 직원은 간호사이다. 서울대병원 6000여 직원 중 간호사가 2000명이 넘는다. 그 간호사들 중 정년까지 가는 사람은 5퍼센트 미만으로 임금피크제 대상자가 적으니 반감도 적을 것이라는 게 관리자들의 믿는 구석이었다.
임금피크제가 그림의 떡인 사람은 간호사뿐만이 아니다. 2년을 못 채우고 계약해지 당하는 비정규직과 외주하청 노동자도 모두 임금피크제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임금피크제에 이어 닥쳐오는 성과급제와 퇴출제의 대상이 된다. 정년까지 가면 운 좋게 임금피크제 정도이지만, 그 전에 성과급제로 깎이고 퇴출제로 쫓겨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럴 거면 왜 물어봤나?”
임금피크제는 임금을 깎는 제도이기에 도입을 위해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근로기준법 94조에 명시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은 ‘근로자 과반이상의 동의’이다. 병원은 이를 위해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일주일간 임금피크제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하지만 자신만만하던 관리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찬반투표는 부결되었다. 총 6045명의 투표대상자 중 28.6퍼센트만이 동의했다. 투표를 거부한 직원들에게 투표만이라도 해라고 협박하던 병원은 부결이 되자 말을 바꿨다. 임금피크제가 불이익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고, 부결 2일 뒤에 이사회를 열어 임금피크제를 통과시켜버렸다. 반대투표 한 직원들, 투표를 거부한 직원들은 어이상실이었다. 이럴 거면 투표는 왜 했냐는 원성이 빗발쳤다. ‘답정너(답은 정해졌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가 여기 있었다.
서울대병원의 속도위반
병원은 뭘 믿고 당당하게 불법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이기권 노동부장관의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이어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면 절차가 없어도 된다”라는 막말 덕분이었을까? 노동부 장관이 뻘 소리를 한 것은 9월 13일 노사정 대타협(이라 쓰고 야합이라 읽는다)에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에 대한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법인 것은 변함없다. 노동부 장관의 잠꼬대 같은 말은 법이 아니니까. 노사정 야합도 합의일 뿐이다. 결국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에 대한 어떠한 정부 지침이나 법안도 없는 상황에서 불이익변경을 마음대로 실시한 서울대병원은 명백한 속도위반을 저질렀다.
‘근로기준법 준수!’ 전태일의 외침
노동조합은 병원장을 근로기준법 94조 위반으로 고소했다. 영리 자회사 퍼주기, 성과급제 도입 시도 병원장의 행태에 더 이상 못 참겠다며 퇴진 운동 제안도 나왔다. 목숨을 다루기에 원칙이 살아있어야 할 병원이 민주적인 절차마저 무시하는 무법천지로 전락하고 있다.
지금 서울대병원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일터가 노동개악으로 무법천지로 바뀔 위험에 처했다. 전태일 열사 45주기인 2015년에도 노동자는 여전히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을 멈출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