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2016/02 제13호
만성질환,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병
만성질환은 6개월에서 1년 이상 지속되는 질병을 말합니다. 영양과 위생상태가 좋아지면서 과거 유행했던 급성 감염질환은 줄어든 반면, 만성질환은 현대의 전염병이라 할 정도로 급속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영양결핍으로 병들고 죽어가던 때에 비하면 풍요롭고 살기 좋아졌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류의 건강보다는 이윤의 창출에 훨씬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인류는 현재 이루어 낸 식량생산 기술과 의학의 발전에 비해 충분히 건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미국에서의 건강지표는 후진국 수준일 정도죠. <자본주의와 질병> 강의는 자본주의와 질병의 문제 전반을 다루고 있죠? 이번에는 그중에서도 식품산업과 질병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건강을 희생시켜 이윤을 생산한 공장식 축산업
저는 병원에서 식이요법으로 만성질환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동물성 식품과 정제한 곡물, 당분을 피하면서 현미 채식을 하게 합니다. 치료를 하면서 환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밖에 나가서 먹을 게 없다”, “외식을 못하니 친구들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채식으로 이루어진 메뉴는 소수일뿐더러 그나마도 현미밥이 아닌 흰밥을 줍니다. 어째서 밖에서는 건강한 밥 한 끼 찾기가 어렵게 된 걸까요? 식당 주인 개개인이 무지하거나 비도덕적이어서가 아닙니다. 몸에 안 좋은 음식만 맛있다고 느끼는 대중의 입맛 때문도 아닙니다. 자본주의적 식품 산업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메뉴가 고기입니다. 삼겹살, 치킨, 양념갈비, 닭볶음탕, 설렁탕, 족발, 보쌈, 제육볶음, 스테이크, 삼계탕, 양꼬치, 햄, 소시지. 우리가 언제부터 고기를 이렇게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었을까요?
세계대전이 끝나고 찾아온 냉전시대 이래 미국은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굶주린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에게 곡물을 원조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녹색혁명’이 일어나죠. 품종개량, 단종경작, 화학비료, 살충제 등을 통해 곡물생산량이 급증하고 곡물의 가격이 저렴해집니다. 동물에게도 곡물을 먹일 수 있게 되자 동물의 성장속도가 빨라져 고기 생산량도 늘어납니다.
나아가 축산기업들은 수직적 통합이라는 시스템을 이뤄냅니다. 동물이 태어날 때부터 자라서 가공하고 판매하는 과정까지 하나의 기업이 관리함으로써 중간비용을 절약하는 겁니다. 반면 가축을 기르며 나오는 오물이나 가공되기 전에 죽은 동물의 사체를 처리하는 환경과 관련된 비용은 사회적으로 부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좁은 공간에 많은 동물을 키워서 시설비를 절약합니다. 좁은 공간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키워서 발생하는 질병에는 항생제로 대응하고, 성장호르몬을 투여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성장시킵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생산량을 늘리고 가격을 낮출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것과 질 낮은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동물성 음식의 유해성이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미국심장협회가 동물성 음식에 들어있는 포화지방과 질병과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를 하고, 포화지방 섭취를 줄이라고 권고합니다. 이를 반영해 미국 정부의 영양위원회가 식생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고요.
그러자 축산기업들이 강하게 반발합니다. 결국 가이드라인 발표 불과 한 달 뒤, 영양위원회는 구조조정되고, 그해 말엔 가이드라인 개정판이 발표됩니다. ‘육류 섭취를 줄이자’는 본래의 문구 대신 ‘포화지방이 적은 육류·가금류·생선을 섭취하자’라는 반대 뉘앙스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대체된 된 것입니다. 이후에도 축산기업들은 끊임없이 정책과 국가 및 영양사협회의 영양권고에 개입해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먹도록 유도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육류 섭취량은 과학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결과에 가깝습니다.
흰 밥과 흰 빵이 ‘표준’이 된 이유
사람들이 고기만큼 많이 먹는 음식이 정제된 곡물입니다. 흰 쌀밥과 흰 밀가루 음식인 빵, 국수, 라면, 파스타, 피자, 과자까지. 그래서 현미밥이나 통밀빵을 사먹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정제된 곡물을 널리 먹게 된 것도 자본주의 발전과 관계가 깊습니다. 1890년대 미국에서 빵의 90퍼센트는 집에서 구워졌고, 통밀빵과 흰 빵 모두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빵의 90퍼센트가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이는 모두 흰 빵이었습니다. 통밀가루는 흰 밀가루보다 유통기한이 짧고, 글루텐이 잘 형성되지 않아서 기계적으로 대량생산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거대 제빵기업은 흰 빵 소비량을 늘려야 했습니다. 마침 세균학의 발전으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세균을 두려워하고 청결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거대 제빵기업들은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기계로 생산해 깨끗한 흰 빵’을 마케팅합니다. 열악하고 불결한 환경의 소규모 빵집들은 문을 닫고, 산업화된 흰 빵의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통밀빵이 영양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미국의 거대 제빵기업들은 정부를 압박해 성명을 발표하게 합니다. 정부가 흰 빵이 통밀빵보다 영양적으로 부족하지 않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안 그래도 논란이 있던 상황에서 이 성명은 정부가 흰 빵을 강력히 추천하는 것으로 해석돼 전국의 신문에 실립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안심하고 흰 빵을 사먹었구요.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 국가들 역시 예전에는 현미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서구에서 온 식민지배자들은 쌀 수출 증대를 위해 현미보다 부패가 느리고 보관이 용이한 백미를 생산하는 도정기계를 점차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필리핀의 경우 100년 전 도정기계가 도입되면서 현미를 ‘더러운 쌀’, 백미를 ‘미국쌀’이라 부르며 백미를 선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때 도정기계가 들어오면서 백미를 먹기 시작했는데, 거칠고 누런 현미밥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밥이고, 흰 쌀밥에 고깃국이 부자의 상징이었습니다. 아시아 민중 대부분은 지금도 백미를 먹습니다.
노예 노동으로 생산해 노동자 착취에 쓰인 설탕
마지막으로 설탕입니다. 설탕을 대량생산할 수 있었던 건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죠. 유럽인들은 새로 정복한 아메리카의 섬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과 정제시설을 만들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대량생산된 설탕은 대부분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자본가들에게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의 음료였던 맥주는 가격도 비싸고, 취하면 작업에 지장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차와 설탕의 가격이 낮아지고 대중화되면서 설탕을 넣은 달콤한 차를 짧은 시간 안에 마시고 빠르게 혈당을 높일 수 있었고, 이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장시간 노동을 감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축산기업이나 제빵기업과 마찬가지로 설탕기업들도 판매량이 감소하지 않도록 정부의 식품 가이드라인에 관여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가 먹는 음식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측면이 훨씬 큽니다. 사람들의 건강보다는 거대 기업의 이윤을 고려한 음식들이 널려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물성 식품, 정제된 곡물, 당분의 소비량이 증가하면서 만성질환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식생활, 개인적 실천이 아니라 공동의 행동 통해 바꿔야
식품기업들이 돈으로 과학과 정책에 개입하여 사람들의 식탁을 지배하며 건강을 위협하는 동안 의료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의료가 오롯이 동떨어진 어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와 관련을 맺고 변화하는 것이라면, 현대 의료는 자본주의적 의료이고, 자본주의적 의료는 질병을 치료하기보다는 관리하려고만 합니다.
식품자본이 사람들의 건강을 희생시키며 이윤을 추구하고, 의료자본은 의료를 병원 안에서의 문제로 한정하며 오히려 환자를 늘리려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요? 어떻게 실천해야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먼저 의료가 어렵고 전문적이고 좁은 영역이라고 한정 짓는 자본주의적 의료를 넘어서 의료를 새롭게 정의해야 합니다. 나의 건강은 자본주의적 노동·식품·주거 문제와 관련이 있고, 건강이란 누구나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이므로, 건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것까지 포함하는 것이 진짜 ‘의료’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신약이나 신의료기술 개발같이 이윤이 많이 남는 연구에만 돈을 쓸 게 아니라 노동, 주거, 식품, 공동체와 같은 다양한 문제와 건강과의 관련성을 연구하는 데 돈과 인력을 투자하자고 주장해야 합니다.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것만 과학적인 게 아니라 이런 연구들이 오히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의학지식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산된 대안적 의학 지식을 통해 자본주의적 식생활을 공적인 것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식품 선택이라는 개인적 실천에 맡기면 자신의 식생활을 주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나 양질의 식품을 구매하지 못하는 저소득층은 소외받게 됩니다. 개인적 실천이 아니라 대안적 지식과 결합한 제도의 변화,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를 통해서만 우리 식생활이 건강해지고 모두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우리의 전망, 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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