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4/11 창간준비1호
민주노총 20년, 한국 자본주의 20년
노조의 기본에서 민주노총 혁신 방향을 찾자!
부산 범일동의 민주노총 부산본부 근처 복권방에는 토요일마다 로또를 사기 위해 수백미터 줄을 서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그 복권방에서 1등만 30명 넘게 나왔기 때문이다. 복권은 확률게임이니 이렇게 한번 이름이 나면 그 집에서 로또를 사는 사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손님이 느니 당연히 그 집에서 당첨자가 나올 확률은 더 높아진다. 이른바 자기실현적 기대가 작동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에도 비슷한 메커니즘이 있다. 노동조합으로 단결해 임금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확신이 퍼지면, 조직률이 늘어나 교섭력이 강해지고 교섭력이 강해지니 임금이 오른다. 노동조합을 통해 임금을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자기실현적 기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그랬다. 전국에서 우후죽순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4년간 임금이 66퍼센트 올랐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조합에는 그런 자기실현적 기대가 작동하지 않는다. 임금소득으로는 미래를 희망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복권방에는 수백 미터씩 줄을 서지만, 민주노총 사무실 문을 두드리진 않는다.
민주노총 20년, 한국 자본주의 20년
한국전쟁 이후 대중적으로 노동조합에 관한 자기실현적 기대가 일어난 것은 단 한 차례다. 1987~89년까 지 3년이다. 물론 노동자대투쟁으로 한국에서 노동조합이 온전한 시민권을 누리게 된 건 아니었다. 노동운 동에 적대적인 정권, 사용자 친화적인 노동관계법은 여전히 노동조합을 강하게 옭죄고 있었고, 여기에 재벌 독식 경제구조와 기업별 노조체계는 전체 노동자의 80퍼센트에 이르는 중소사업장 노동자가 노조를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경제적 힘이었다. 1995 년 민주노총이 50만 조합원으로 출범했을 당시 이미 민주노총은 대공장 위주였다. 1996년 민주노총 조합원 평균 임금은 전체 노동자 상위 40퍼센트에 속했다.
민주노총은 출범 때부터 노동자들에게 노조 건설의 기대를 북돋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노동자 전체의 지지를 받을 수는 있었다. 1996~97년 총 파업에서 볼 수 있듯이, 투쟁을 통해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대의를 가지고 있었고 총파업으로 정부를 무릎 꿀릴만한 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가 많은 걸 바꿨다. 2년도 지나지 않아 재벌 대부분은 완벽하게 부활한 반면 취업자 대부분이 일하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은 계속 위기였다. 노동시장에서는 정리해고제, 파견제 등이 시행됨에 따라 노조의 보호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상시적 해고와 비정규직 고용이 확대되었다. 민주노총 조합원은 회복 국면에 들어섰지만 80퍼센트의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은 위기 상태에 계속 방치되었다.
민주노총은 여러 방도로 싸웠지만, 노동자들의 임금불평등을 막지 못했다. 민주노총 출범 직후인 1996년과 2013년을 비교해보자.
가장 놀라운 건 재벌의 성장과 임금격차 확대다. 1996년 30대 재벌의 매출액은 GDP대비 67퍼센트였으나 2013년에는 GDP보다 큰 120퍼센트다. 현대차는 매출이 5배, 순이익은 13배 늘었다. 1996년에는 30인 미만 소기업의 임금이 300인 이상 대기업 임금의 72퍼센트였지만, 2013년에는 59퍼센트로 하 락했다. 민주노총 조합원 평균 임금은 1996년 월 137 만원으로 임금계층 상위 40퍼센트에 속으나, 2013년 엔 월 372만원으로 임금계층 상위 25퍼센트에 속했다.
민주노총 조합원간 격차도 커졌다. 100인 미만 사업장 평균임금 대비 현대차 임금으로 조합원간임 금격차를 간접적으로 추정해보면, 1996년에는 이 비 율이 1.6배였는데 2013년에는 2.6배로 늘었다. 공공 운수노조의 경우 역시 월 160만 원의 청소 노동자부 터 월 7백만 원 공공기관 노동자까지, 같은 노조에서 임금격차가 네 배 이상 나는 상황도 발생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전체로부터 더 멀어졌고, 또 노동조합 내부 격차가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조합 원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재벌들의 특출한 능력
민주노총 출범 후 20년간 한국 경제는 재벌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한국 재벌의 경쟁력은 중국보다는 나은 기술력과 선진국보다는 싼 비용에 있다. 예를 들면, 현재 현대차 수익률은 최고급 자동차 제조업체인 독일 다임러-벤츠보다도 높다. 이는 벤츠보다 기술력으로 10퍼센트 떨어지는 차이지만 벤츠보다 20퍼센트 더 싸게 생산할 수 있는 비용절감 능력 때문이다.
한국 재벌들의 비용절감 능력은 세계적으로도 탑클래스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1차 하청부 터 4,5차 하청까지 이어지는 수직적 하청구조를 나라 전체에 걸쳐 만들어낸 것이다. 예를 들면 삼성전자는 재료(삼성화학)부터 부품(삼성SDI), 완성품(삼성전자), 물류(삼성로지텍), 판매(삼성리빙), 애프터서비스(삼성서비스)까지 모든 부분에 계열사를 갖추고 각 부분에서 중 소업체를 하청으로 거느린다. 세계 전자업계에서 이렇게 사업을 하는 회사는 삼성뿐이다. 현대차 역시 현대제철(재료), 현대글로비스(물류), 현대모비스(부품), 현대차(완성품)로 이어지는 모든 부문에 계열사를 두고 하청기업들을 거느린다. 세계 자동차 기업 중 이런 사업구조를 유지하는 회사 역시 현대차가 유일하다.
재벌의 이런 산업 지배력은 당연히 정부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새누리당, 민주당 정부 가릴 것 없이 한국 정권들은 재벌의 국제경쟁력을 위해 제도적,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공부문도 수출 산업 편향적으로 발전시켰다. 보건, 보육, 요양과 같은 복지와 사회서비스는 과소 성장하고, 경제 인프라(전기, 수송 등) 관련 공공부문이 재벌과 함께 팽창했다.
민주노총은 이 두 부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민주노총은 한편에서 재벌 중심의 정부정책에 반대했지만, 동시에 재벌 중심 성장의 수혜자일 수밖에 없었다. 20년간 민주노총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민주노총의 모순
민주노총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 노사정위를 통 한 사회적 타협과 산별노조를 통한 단체협약 확대를 도모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독일 또는 스웨덴 으로 대표되는 북유럽 노사관계를 모델로 한 것인데, 기업의 경쟁력에 노조가 협조하는 대신 분배를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이른바 사회적 경제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국의 재벌이 이 나라들의 대기업과는 다르다는 걸 간과한 것이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경쟁하는 다임러-벤츠 자본에는 노동력의 숙련과 협조가 필요조건이지만, 비용절감을 경쟁력으로 하는 현대차에는 쥐어짜기가 필요조건이었다.
사회적 타협이나 산별노조를 통한 상생은 자본에 의해 철저히 거부되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복지국가가 다시 사회적 쟁점이 되었지만, 민주노총은 복수노조 시행과 정권 차원의 노조파괴 기획에 움츠러 들었고, 재벌 중심 경제의 수혜자로 적응했다.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자기실현적 기대가 만들어 지지 못하는데는 민주노총의 이 모순도 영향이 컸다. 1987년에는 3저호황으로 고도성장을 하는 가운데 무노조와 어용노조만 존재했었다. 제대로된 노조를 기대할만 했다. 하지만 지금 민주노총은 기득권 세력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조합원 비율이 늘어나도 이 사실은 변함없다. 민주노총의 3퍼센트 남짓한 조직률로는 조합원 구성에 약간의 변화가 있더라도, 의미있는 사회적 변화가 나타나기 힘들다. 결국, 투쟁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재벌 구조에 흠집도 내지 못 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경제 전략, 노동조합이 힘을 갖는 방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민주노총이 자신의 경제 전략, 노동조합으로서 힘을 갖는 방안은 무엇일까.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대해 자기실현적 기대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민주노총 자체의 모순을 해결할 방안부터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민주노총은 주로 시민단체에서 주장 하는 경제민주화론을 따랐다. 하지만 지배구조 개혁, 원·하청공정거래, 세제개혁 등 경제민주화의 주요 내용들은 노동조합에게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이런 대안들은 노동이 낄 자리가 없다는 점뿐만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무관하게 경제 시스템을 구상한다는 점에서 몽상적이다.
두 가지 방향에서 고민해보자. 첫째, 노동조합을 통한 재분배 전략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임금격차를 줄이는 노총 주도의 연대임금 전략에 대해 민주노총이 어떻게든 물꼬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민주노총의 노동자 포괄 방법이다. 기업별 체계만을 보호하는 법제도적 제약을 극복할 현실적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민주노총의 경제 전략에는 노동조합이 경제 개혁을 매개로 노동자들의 사회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 담겨야 한다.그런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노조 경제 전략의 핵심이다. 그럴 때 민주노총과 거리가 먼 노동자들이 노조에 대한 기대를 가질 것이다.
2천만 노동자를 위한 따뜻한 집이 되자 : 임금 조사와 노동상담소
민주노총의 투쟁은 매우 현실적인, 하지만 민주노총 이 나갈 바를 분명하게 사회적으로 알리는 것이어야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민주노총의 경제 전략, 연대임금과 포괄 범위의 확장은 미조직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의 기초 기능을 제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먼저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시장의 임금 표준을 설정할 수 있도록 정책을 개발하고 사업주단체에 압력을행사할 수 있는 다양한 투쟁들을 만들자. 현재 민주노총의 임금 관련 기능은 최저임금제시안을 만드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 결정 방식의 제약과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최저임금 투쟁에 대한 낮은 참여로 국민임투라는 이름에 걸맞은 싸움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국가 수준의 임금 논의는 경총이나 자본 연구소들이 보수언론을 통해 하듯 반드시 일정한 여론투쟁을 거친다. 민주노총의 임금 교섭은 한편에서 정책 조사와 선전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민주노총 임금조사, 정책기능의 혁신을 위해 주기적으로 대규모 임금센서스를 수행해 이를 가지고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만한 임금 교섭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매년 100명의 조사원 이 200만 명(노동자 10퍼센트)의 임금을 직접 조사하는 임금센서스 사업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민주노총 조사가 가장 신뢰도 있는 사회적 표준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민주노총 임금 조사부터 볼 수 있도록 만들자. 초기업적 교섭에 관한 제도적 틀이 없는 한국에서는 이렇게 권위를 획득하는 것 자체가 연대임금 투쟁으로 나가는 시작이다.
다음으로 민주노총이 2000만 노동자를 위한 노동상담소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하자. 노동시장 유연성, 복수노조법, 사용자들의 탄압 등 여러 이유로 노조 설립이 어렵거나, 노조를 설립한다고 하더라도 노동조건을 크게 개선할 여지가 없는 노동자들이 부지기수다. 미조직 노동자 대부분이 이렇다. 민주노총이 이들 노동자들을 위한 조직이 되어야 한다. 당장의 노조조직화를 바라는 것보다는 미조직 노동자들이 바라는 민주노총의 역할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지역본부들이 하고 있는 상담 업무를 대폭 강화 하고, 더욱 체계화하며, 중앙에서 대규모 상담원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법 등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00명 규모의 전문 상담사를 운영한 다든지 말이다. 지역본부와 지역노동단체들이 이미 하고 있는 상담업무롤 총괄하고 제대로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승리하고, 후에 싸운다’는 원칙으로
이제 87년 세대의 퇴직으로 민주노총을 만든 주력 세 대가 사라진다. 진보정당, 산별노조 등 전통적인 노조 전략 프로그램들의 성과는 미약하고 총파업, 전략조직화, 정치세력화 등 고전적 카테고리를 따라가는 혁 신 정책으로는 딱히 민주노총이 부활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파업 파괴력과 사회적 정 당성이 결합되었을 때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기간 산업노조의 고령화와 산업변화로 파업 파괴력이 감소했고, 민주노총의 사회적 지위도 떨어졌다. 집행부가 파업에 좀 더 진정성을 보인다고 개선될 문제가 아니다. 전략조직화는 자기실현적 기대를 작동시키지 않는한 제약적이다. 많은 노동자들에게 현재 상황은 노조를 만들어 얻을 것보단 잃을게 많은 상황이다.
민주노총 최초의 임원 직선제가 진행되고 있다. 여러 혁신방안들이 나온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어떻게 싸울 것인가가 아니다. 손자병법에 선승후전이란 말이 있다. 전쟁은 먼저 이겨놓고, 전투에 돌입하는 것이란 의미다. 노동조합에게 승리란 계급적 단결이다. 구조적 변화가 쉽지 않은 정세고 민주노총은 재벌독식 성장의 모순을 그대로 체화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2000만 노동자에게 거창한 말이 아니라 노동조합 기초기능부터 제공하며 저변을 넓힐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따뜻한 집이 먼저 필요하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우리의 전망, 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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