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2018/03 제38호
노동조합, 세상을 바꾸자
“현장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자!” 노동조합 활동에서 으레 들었을 법한 구호다. 민주노조 운동은 그 출발부터 현장에서 시작한 변화의 바람을 지역과 사회 전체로 확산하기를 꿈꿔왔다. 하지만 실제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보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매년 찾아오는 교섭과 일상적인 조직 활동만 해도 벅차다.
그럼에도 치열한 고민 끝에 진짜로 ‘노동조합, 세상을 바꾸자’고 나선 이들이 있다. 그 중 대표선수들을 모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와 공공운수노조 전국집배노조,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다.
삼성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자!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삼성’을 빼놓고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스마트폰부터 가전 제품, 심지어 놀이공원까지.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삼성공화국’이다. 그런데 삼성이 고용한 180만 가량의 노동자들은 ‘노조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 시절부터 시작된 ‘무노조 경영’ 때문이다.
한데 그 한복판에서 당당히 민주노조의 깃발을 올린 이들이 있으니, 바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다. 이들은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사장’이라 부르지 못한다. 삼성전자의 자회사 (주)삼성전자서비스 산하 100여 개에 달하는 협력업체 소속이기 때문이다. 국내 소비자들이 삼성전자 제품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편리한 A/S(애프터서비스) 때문’이라고 하는데, 막상 그 수리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위장도급이 강하게 의심되는 상태에서 열악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2013년 7월,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탄생했다. 조합원이 1500명에 달했는데도 삼성은 어김없이 ‘무노조 경영 원칙’을 들이밀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대삼성·대재벌 투쟁을 펼쳐야만 했다. 물론 한국 최고의 재벌 삼성이 주는 떡고물을 받아먹고 사는 노조로 안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회는 ‘삼성독재’의 현실을 체감하며 삼성을 바꿔야만 파견노동자인 조합원들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스엔에스(SNS)를 통한 선전은 물론이거니와, 일상적인 회의 체계를 통해 조합원들과 부단히 토론했다.
그렇게 나온 구호가 바로 ‘삼성을 바꾸고 우리 삶도 바꿔보자!’ ‘삼성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자!(삼바삶바)’다. 이는 조합원들이 가장 많이 외치는 구호가 됐다. 재벌개혁 투쟁의 일환으로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 3대 세습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2016년 말부터 이어진 박근혜·최순실·이재용 게이트 정국에서는 ‘국정농단의 몸통 재벌을 처벌하라’고 요구하며 광장을 점령했다. 덕분에 당시 광장에서 ‘이재용 구속’은 촛불 집회에 나선 시민들의 주요 요구 중 하나가 됐다.
‘재벌 개혁’이라는 구호를 외치다보니 막상 눈에 보이는 성과가 적다는 한계도 지적됐다. 그럼에도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재벌이 뒤에서는 간접고용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는 추악한 현실을 고발하고, 스스로 노동조합으로 뭉쳤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사회적 공감대를 투쟁의 동력으로! 집배노조
우리나라에 우체국이 생긴 것은 무려 130년 전이다. 지금도 인터넷 홈쇼핑의 발달로 택배업은 갈수록 성황이다. 그러나 정작 우체국 집배원들은 만성적인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자기 이익을 실현할 통로가 마땅치 않았다. 한국노총 소속의 전국우정노동조합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우정노조는 보수적 성향에 사용자와 타협적인 노선으로 60년이란 세월을 지내왔다.
2016년 4월 민주노조인 집배노조가 탄생했다. 그러나 우체국에는 복수노조만 6개다. 직군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경쟁도 치열하다. 게다가 공무원조직이라는 특성상 노동권 방어가 쉽지 않다. 당연히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따르며, 2015년 1000명의 구조조정도 별 무리없이 통과될 정도다.
이에 집배노조는 조합원들의 업무 특성에 주목했다. 2만여 명의 집배원과 수만의 택배원이 전국을 누비며 시민들에게 택배를 전달했다. 시민들의 호응도 높았다. 이를 바탕으로 집배노조는 소수노조의 한계를 사회적 연대와 지지로 돌파하고 있다.
안타까운 사건도 많았다. 30대 중반의 집배원이 배달 중 사망하는 등 과로사와 과로자살이 잇달았다. 하루 평균 9시간 40분에서 11시간 이상도 허다한 배달 시간에 토요근무까지 겹치면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집배노조는 과로사 투쟁에 집중했다. 특히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한 과로 문제와 함께 집배원의 장시간 노동 문제를 제기했다. 사회의 요구가 맞물리는 지점을 발굴하고 끊임없이 파고든 것이다. (〈목숨 걸고 편지 전하는 집배노동자들〉, 한건희, 《오늘보다》 2017.11월호.)
결국 집배노조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대재해 사업장에 국민 참여를 보장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발표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는 130년 우정 사업 역사상 최초라고 한다.
신생노조이기도 하고, 조합원들이 이전 우정노조 시절 대리주의적 활동에 익숙하다보니 현장 장악력이 약하다는 한계도 있다. 그러다보니 더더욱 폭로 중심의 활동에 의존하려는 경향도 보인다고 한다. 또, 집배원의 노동조건의 진정한 개선을 위해서는 우체국만이 아닌 사기업 택배 노동자 모두와의 연대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현장 조직력을 강화하면서도 사회적 연대를 더욱 넓혀갈 것이라는 결의가 이어졌다.
서울대병원을 시민의 품으로! 서울대병원노동조합
서울대병원분회는 1987년 설립된, 꽤나 나이 지긋한 노동조합이다. 공공병원의 상징인 서울대병원과 보라매병원의 의사를 제외한 모든 직종의 노동자가 조합원이다. 그러다보니 창립 초기부터 의료공공성을 지키는 싸움이 노조 활동의 중심을 차지했다.
특히 박근혜 정부 때는 더 거센 투쟁을 해야만 했다. 2014년 박근혜 정부가 각종 규제를 풀어 민영화를 추진하는 ‘투자활성화 대책’을 내놨기 때문이다. 병원이 영리 목적의 자회사를 둘 수 있게 하는 방식의 “우회적인 의료민영화 방안”이었다. 서울대병원분회는 시민단체와 함께 의료민영화반대 100만 서명운동을 벌였다. 시민들의 큰 반향을 얻어 보건복지부 홈페이지가 마비되고 서명은 140만 명을 넘길 수 있었다.
대중적으로 의료민영화 반대 여론은 거셌다. 하지만 조합원들 가운데서는 “병원의 영리행위로 수익이 나면 우리에게도 돌아오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많았다. 조합원의 이해와 공익이 충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서울대병원분회는 끈질긴 내부 토론으로 조합원들을 설득했다. 2014년만 하더라도 부서별 간담회 4회, 전 조합원 간담회 10회 등 토론 자리를 끈질기게 만들었다. 조합원들의 다양한 실천도 모색했다. 서명 받기만이 아니라 지역 상인들에게 의료민영화 반대 문구가 적힌 비닐봉지를 나눠주는 등 시민과의 만남을 최대한 가졌다. 조합원 스스로 시민들의 여론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2015년과 2016년에는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저지 투쟁을 진행했다. 백남기 농민 투쟁도 있었다. 백남기 농민이 1년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사망하자, 병원 측은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터무니 없는 진단서를 발표했었다. 그간 서울대병원 경영진이 정부의 부적절한 지시를 적극 이행해온 것을 본 조합원들은 백남기 농민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결국 병원 측의 진단서 철회라는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진정한 히포크라테스 선언〉, 《오늘보다》 2016.11월호.)
사회를 바꾸는 주체가 되기 위하여
질문이 이어졌다. 언뜻 보기에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투쟁’, ‘시민들과 함께 하는 투쟁’은 노조 외부의 실천으로 보이기 쉽다. 그럼에도 어떻게 조합원의 이익과 시민의 이익을 일치시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주되게 나왔다.
서울대병원분회 우지영 조합원은 “제각각 사정은 다르지만, 조합원을 끈질기게 설득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또 조합원이 자신의 이야기를 사회에 스스로 말하는 경험을 해보는 것 역시 강조했다. 집배노조의 경우, “집배원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는 현장르포를 많이 기획했는데, 자세한 사정이 알려지자 시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어낼 수 있었고, 조합원들도 자신의 경험이 지지를 넓히는 걸 보며 자신감을 얻었다”고 답변했다. 서울대병원분회 역시 지역 상인들에게 의료민영화 반대 등 메시지를 담은 비닐봉지를 나눠주는 선전 활동에서 상인들의 반응도 좋았지만, 조합원들이 자신감을 넓혔다는 점에서 더 좋았다고 이야기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라면 누구나 가입하고 조직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대중조직이다. 바꿔 말하면, 대부분이 노동자인 시민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기초 중의 기초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동조합 혼자 세상을 다 바꾸지는 못한다. 더 많은 시민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뭔가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세 노조의 사례는 그 어느 것보다 ‘시도하는 것’, ‘끈질기게 조합원을 설득하고 시민과 토론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