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8/02 제37호

용산 참사를 돌아보는 뼈아픈 시선

용산 참사 9주기를 맞아 개봉한 영화 〈공동정범〉

  • 성상민
사건번호 2010도7621. 2010년 11월 11일, 대법원은 서울시 용산구에서 구속된 철거민들이 고등법원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며 제출한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이들은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위험한 물건을 사용하거나 단체 또는 여러 사람의 힘으로 공무의 집행을 방해하며 경찰을 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구속된 상태였다. 판결에서 대법원은 “화재의 원인도 철거민들에게 있으며, 경찰특공대의 진압작전도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정당하다”고 상고 기각에 대한 이유를 밝혔다. 그렇게 용산의 철거민들은 원심의 판결대로 건물에 불을 지르고, 정당한 공권력 집행도 방해한 것은 물론 사람까지 죽인 ‘중범죄자’로 규정됐다. 2009년 초에 일어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용산 참사’가 공식적으로는 철거민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법이 용산 참사의 진범을 아무리 철거민으로 몰아가도 용산 참사의 참혹한 순간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철거민들의 힘겨운 싸움을 계속 지켜봤던 사람들에게 용산 참사는 여전히 진실을 밝혀야만 하는 숙제와도 같았다. 몇몇 문화 창작자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용산 참사를 기록하며 한국 사회에서 용산 참사가 쉽게 잊히지 않도록 힘을 내었다. 2012년에 개봉한 김일란·홍지유 감독의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은 이를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 법정에서 녹취한 진실 공방, 용산 참사 진압에 투입되었던 경찰을 비롯하여 사건과 연관된 다양한 이들의 증언을 수집하여 만든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공권력에 편향된 대다수 언론에 맞서 용산 참사의 진실을 차근차근 짜 맞춰 나가는 작품이었다.

<두 개의 문>이 개봉한 이후 7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구속되었던 철거민들은 모두 형기가 만료되어 석방됐고, 새해를 얼마 앞두고 있던 2017년 연말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용산 참사로 구속되었던 이들이 모두 사면 복권되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 경찰은 얼마 전인 1월 18일,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밀양 송전탑 사건, 제주 강정마을 사건, 평택 쌍용자동차 파업 진압 사건과 함께 용산 참사를 ‘5대 주요 인권침해사건’으로 선정하여 재수사에 착수했다. 촛불이 이뤄낸 정권 교체에 힘입어 다스 실소유주 의혹과 관련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도 기세등등하고, 이와 연결해 용산 참사도 종종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용산 참사를 사회적으로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높은 상황에서 <두 개의 문>의 후속작 성격의 다큐멘터리가 극장의 문을 두드렸다. 바로 김일란·이혁상 감독의 〈공동정범〉이다.
 
 

용산 참사 ‘이후’, 철거민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본래 〈공동정범〉은 <두 개의 문 2>라는 이름으로 기획된 작품이었다. 2014년, 용산 참사로 구속된 철거민들이 모두 석방된 뒤에 이들이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해 어떻게 다시 똘똘 뭉치고 함께 싸워나가고 있는지를 카메라로 담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작진들은 기대와 전혀 다른 풍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함께 피해를 겪은 만큼 석방된 뒤에도 꾸준히 연대하고 있으리라는 믿음과 달리 철거민들 사이에서는 쉽게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기고 만 것이다.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왜 서로를 불신하며 반목하게 된 걸까. 감독을 비롯해 감독들이 속해있는 다큐멘터리 제작집단 ‘연분홍치마’의 멤버들은 후속작을 <두 개의 문>처럼 끌고 나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대신 철거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무게를 짚으면서 용산 참사의 문제를 직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 순간부터 <두 개의 문 2>는 〈공동정범〉이라는 새로운 제목과 방향으로 재탄생했다. <두 개의 문>의 후속작 성격으로 제작된 것은 변함이 없지만, <두 개의 문>과는 또 다른 시선으로 용산 참사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두 개의 문>은 철거민들이 모두 구속된 상태에서 법정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용산 참사를 ‘재현’하고, 이를 통해 용산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공동정범〉 역시 목표는 <두 개의 문>과 똑같다. <두 개의 문>이 제작된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추가하여 사건의 진상에 한 걸음 더 다가서고,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를 묻는다. 하지만 〈공동정범〉은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재현’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긴 교도소 생활이 끝나고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오게 된 철거민들 다섯 명의 시선을 오가며 이들이 느꼈던 용산 참사의 모습을 충실하게 지켜보고 기록하려 노력한다.
 

교도소를 막 출소한 철거민들의 삶은 너무나도 고달프다. 자신들이 그렇게나 지키고자 했던 용산 남일당 건물을 비롯해, 철거민들 각자 자신이 살던 공동체의 삶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재개발 구역 대다수도 모조리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경찰특공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온몸이 성하지 않지만, 정부는 이들이 ‘피의자’라는 이유로 어떠한 보상이나 지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고달픈 것은 용산 참사의 끔찍한 광경이 만든 마음의 병이다. 이충연 용산철거민대책위원장은 같이 투쟁에 참가한 아버지를 비롯해 연대를 이유로 함께 망루에 오른 철거민들을 자신이 죽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계속 죄책감에 시달린다. 용산에 살지 않았지만, 같은 철거민인 처지로써 연대하는 마음에 남일당 건물에 남았던 다른 철거민들은 지옥과도 같았던 참사 당일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함께 싸워온 소중한 동지들이 제대로 된 진상 규명도 없이 스러져 간 가운데, 남은 이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용산 참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 나선다. 그러나 이와 함께 철거민들 사이의 갈등도 함께 스멀스멀 올라온다. 가장 큰 갈등은 이충연 위원장을 비롯한 원래 용산에 살던 철거민과 용산에 살지는 않았지만 함께 연대하기 위해 망루에 올랐던 연대 철거민 사이에 생긴 감정의 골이다. 연대 철거민들은 이충연 위원장이 자신들과 깊은 상의도 없이 망루 농성을 결정하고, 용산 참사 당일에도 ‘철거민대책위원회’의 대표로서 응당 지녀야 할 책임을 회피했다고 생각한다. 출소한 뒤로 자신들의 연락도 피하고 함께 만나지도 않는다면서 그를 원망스러워 한다.

반면 이충연 위원장은 연대 철거민들이 자신만을 피해자로 여기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 역시 아버지를 용산 참사로 잃은 큰 피해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최대한 이겨내려 노력하며, 용산 참사가 한국 사회에서 잊히지 않도록 다양한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연대를 하고 있다”며 연대 철거민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서로를 섭섭해 하던 이들은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개시한 자체적인 진상 규명을 위한 간담회에서야 출소 후 처음으로 마주친다. 그리고 쌓여왔던 감정과 분노들이 마구 폭발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며 날선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진상규명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한 번 생긴 불신은 쉽게 가시지 못한다. 철거민들 사이의 화합은 너무나도 어려워 보인다.
 
 

무엇이 철거민들을 ‘공동정범’으로 만들었나

이렇게 〈공동정범〉은 용산 참사 이후 철거민들 사이에 발생한 갈등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공동정범〉이 가십적으로 이들의 감정 싸움을 다루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영화는 철거민들 사이에 생긴 감정의 골을 짚으면서도, 어느 한 쪽의 편을 쉽게 드는 대신 철거민들 각자에 가까이 다가가서 용산 참사 당시는 물론 이들이 인터뷰를 촬영하는 당시의 삶에 깊이 있게 담아낸다. 작품이 촬영되던 2014년에서 2016년 사이, 정부의 수장은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정부는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이라는 과제에는 소홀했다. 철거민들이 처한 삶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이 교도소에 갇힌 사이 자신들이 원래 살던 터전이 처참하게 망가진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거시적인 차원의 진상이 규명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철거민들의 원망스러운 감정은 정부가 아닌 내부를 향한다. 참사 이전이나 당시에는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각자의 실수나 아쉬운 점들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당시에는 사소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더 이상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가운데, 내부의 책임 공방은 어떤 의미로는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위안을 마련하는 길이 된 것이다. 〈공동정범〉은 그렇게 철거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과 이들의 삶, 그리고 여전히 변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철거민들의 현실을 계속 교차하며 용산 참사 철거민들 사이의 갈등이 결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참사와 갈등의 책임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고민한다.

누군가는 그 근원이 ‘이명박’과 ‘김석기’라고 쉽게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공동정범〉이 후반부에서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용산 참사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이었던 김석기나 이명박의 모습을 넌지시 비추는 것처럼, 이들은 분명 참사의 총책임자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책임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무엇이 진정 철거민들을 ‘참사의 주범’으로 내몰았는지를 고민한다.
 

참사의 근간엔 불안정한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누구든 벼랑 끝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객관적 현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현실은 부도덕한 위정자 한 명이 인위적으로 만들기 보다는, 철거 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이데올로기)과 시스템에 있음을 〈공동정범〉은 말하고 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제2의 용산 참사’는 언제 어느 곳이건 다시금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다시 누군가는 〈공동정범〉의 전개에 답답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시원하게 김석기와 이명박을 욕하지 않고, 영화 내내 철거민 내부의 갈등을 묘사하는 것에 불편한 심정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용산 참사의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도, 이들 내부의 존재했던 문제들을 짚는 과정 역시 필요했으리라. 마치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일어난 현대자동차의 파업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정규직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과 차별을 낱낱이 드러낸 다큐멘터리 <밥·꽃·양>이 순회 상영 당시 운동진영에서조차 ‘운동을 모욕한다’는 부당한 비난에 시달렸지만, 시간이 흐른 후 노동운동 내부의 모순을 짚어낸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듯이 말이다.

어느덧 9년이 흘렀다. 이명박과 김석기는 참사의 최종적 책임을 마땅히 지어야 하고, 동시에 우리 역시 지난 시간을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 〈공동정범〉은 저항 주체들의 문제에 접근해, 내부의 갈등을 기록한 보기 드문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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