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기획
  • 2017/11 제34호

1987년 여름은 무엇을 말하는가

  • 김모두
앞서 우리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전개 양상과 성과, 이후의 과제를 살펴보고(“노동조합 3천 개가 폭발적으로 만들어진 이유”, 《오늘보다》 8월호), 그 연원을 1980년대 전반부의 연장선상에서 탐색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변혁적 이념과 전투적 노동자운동의 융합이 1991년에 다다라 빠르게 소멸의 길을 걸었음을 간략하게 돌아봤다. (“80년대 운동을 통해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보다”, 《오늘보다》 10월호)

우리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돌아보려 하는 이유는 단순히 ‘30주년’이어서는 아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사이클이 시효를 만료했고, 주체적으로나 사회구조적으로나 새로운 노동체제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이제 와 노동자대투쟁을 생각한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1987년 여름이 오늘날 노동자운동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영광스러운 기억 유의미한 성과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 대한 평가는 양적으로 지나치게 적은 편이다.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교하면 연구 논문도 매우 적고, 운동 내에서의 평가도 두텁지 않다. 노동조합에서 이뤄지는 교육에서도 단편적이고 극적인 사건의 나열로 그친다. 그러니 고민이 깊어질 리 없다. 학계에서도 노동자대투쟁보단 6월 항쟁이 주목받는 주제였다. 두 사건을 분리해 평가하는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자대투쟁은 전투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이었다.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조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자주성·민주성·단결이 노동조합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으며, 노동자들이 노사 간에 존재하는 힘의 논리를 학습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처음으로 두 자릿수의 임금인상률을 쟁취했다. 무시할 수 없는 성과다.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 내부 격차를 축소하는 일대 진전을 이루었다. 투쟁의 중심에 선 생산직 노동자들은 노동 조건을 급속도로 개선했다.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업장조차 동종업계 임금 인상의 효과를 톡톡히 맛봤다. 물론 제조업 노동자 투쟁에 고무받은 많은 사무직노동자들도 노조 건설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때까지 생산직-사무직, 학력 간 임금 격차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격차 자체도 크게 줄어들었다. 단 사업장 규모에 따른 격차는 늘었다. 기업의 지불능력에서 한계가 있어, 100인 미만 사업장은 100인 이상 기업보다 임금 상승 폭이 낮았다.

노동자대투쟁을 단순히 ‘좋았던 과거’로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다. 동전의 뒷면엔 ‘흘러간 옛이야기’ 쯤으로 치부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낭만적 회고 혹은 청산주의는 역사에서의 성찰을 가로막을 뿐이다. 단순히 그 시절의 전투성을 예찬하는 평가는 1987~1991년 시기 노동운동이 지닌 여러 요소 중 사회운동적 성격이나 노동자 간 단결을 지향했던 측면보다 ‘전투성’에 대한 노스텔지어만을 남긴다. 국가와 자본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했다는 점만 본받는다면, 오늘날 우리가 참조할 점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생디칼리즘 혹은 코포라티즘

운동진영 일각에서는 독재 정권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전투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점을 상기하며, “(파업을 포함한) 대중투쟁이야말로 진정한 변화와 개혁의 동력”이란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면서, “계급의 기억에서 교훈을 배움”으로써, “정치적 과제를 끌어내”고, “전위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90년대 초 이후의 후퇴에 대해서는 당시 노동자운동이 ‘계급 대 계급’의 전면 대결로 나아갈 만한 의식적·조직적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점을 짚는다.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격과 공권력 투입, 지도부 해고·구속과 폐업 협박 등을 능동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이것의 귀결이 조합주의·관료주의·개량주의에 물든 오늘의 민주노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단선적이고 표면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이런 전제에선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힘을 믿자”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노동자대투쟁의 정치적 성격은 평가절하하고, 코포라티즘적 질서를 구축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만 주목하는 관점도 있다. 이러한 관점은 노조의 사회통합적 기능을 강조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대립하는 존재로서의 노동조합의 성격을 무시한다. 현실적으로 군부 독재의 억압과 극악한 작업장 통제로 점철됐던 우리나라 상황에서 타협과 통합은 어불성설이었다. 또한 이는 독일의 산별노조-사회민주당 모델을 적용하려는 시도이기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서구의 노동자운동이 체제 내화되면서 신자유주의 공세에 무기력하거나 협조했던 흑역사를 성찰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귀결됐다.

노동자대투쟁 당시 노동자운동의 조직적·제도적 한계를 지적하는 입장도 있다. 당시 노동자운동이 기업별 노조로 이뤄지다 보니 투쟁 역시 기업별로 분할되었다는 것이다. 또, 사업장별 노동 조건의 향상에는 큰 성과가 있었지만, 실제 정치적·정책적 영향력은 발휘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는 고립됐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 군부 정권의 극심한 탄압과 제도적인 통제(3자 개입 금지, 복수노조 금지 등)에서 기인한다.

실제 민주노조운동은 조직적·제도적 한계라는 모순 속에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사업장 내 투쟁에서의 요구는 임금 인상 등 노동 조건 개선이었지만 이를 통해 민주노조를 건설했고, 나아가 정부의 탄압에 맞서 점진적으로 ‘노조 할 권리’를 쟁취해왔다. 정치·사회적으로도 업종을 넘은 지역 연대를 사고한 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의 경험을 이어받으려 분투했다. 이런 점은 노동자대투쟁의 잠재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1987년 여름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노조 운동의 사회운동적 강화를 이야기해왔다. 이는 오늘의 민주노조운동이 정치투쟁과는 거리가 멀고, 경제투쟁 일변도로 작동하고 있다는 진단과 연결된다. 지난 호 “80년대 운동을 통해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보다”에서 이야기했듯, 한국에서 노동자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고, 1985년 구로동맹파업은 그 상징적 사건이다. 이는 특히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주목할 때 강조된다.

헌데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지향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1987년 이후의 상황은 대체로 암울했다. 우선, 1989~1991년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표면화됐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노동자운동에 주목했던 경향들이 하나둘 노동자운동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이념적 전망의 소실이 실천에서의 퇴각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1990년대 이후 노동자운동이 경제투쟁 일변도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렀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엔 일말의 위기도 없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정부는 3자 개입 금지와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복수노조 허용 등의 노동법 개정 문제를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다. 동시에 어용 언론들을 활용해 반공주의 공세를 가했고, 노동자운동의 정치화·사회화를 억눌렀다. 이를테면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소속의 중소 제조업 노조들과 연대하려 할 때, 정부와 사측은 갖은 공작을 벌여 저지했다. 이를 끝까지 거부한 현대엔진이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무지막지하게 탄압받았다. 1991년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는 이후 전노협 중심의 민주노총 건설을 제약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편 재벌 하청이나 지불능력이 크지 않은 중소 제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전노협은 민주노조 건설과 함께 사회 개혁을 위한 정치투쟁을 방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시장 교섭력과 함께 사회적·산업적 변화를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오랫동안 공단 지역에서 활동해 온 반자본주의 지향의 정치조직들은 민주노조운동이 계급적 지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노동자 간 분할을 좁히고 단결을 촉진하기 위해 정액 임금인상 투쟁을 기획했고, 매년 임금 투쟁의 정책적 가이드라인을 개발했다. 이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촉발된 민주노조운동이 보다 사회운동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전노협은 1990년 출범과 함께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곧 깃발을 내려야 했다. 전노협에 대한 정권의 탄압은 노동조합을 시장과 개별 사업장 안에 가두려는 자본의 전략이었다.

오늘날 노조운동이 직면한 현실을 볼 때 자본과 지배블록의 이러한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언론에서 민주노총의 대표적 사업장으로 부각하는 현대차지부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현대차지부는 지난날 ‘영광스러운’ 투쟁을 벌인 노조였지만, 오늘날에는 사업장 내의 문제에 갇혀 있다. 최근 보수언론들은 이상범 전 노조위원장의 ‘반성 아닌 반성’을 기제 삼아 노조를 공격하고 있는데, 이를 ‘변절’이라고만 욕해선 남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이런 공세가 먹히는 이유는 노동조합이 자신의 정치·사회적 비전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차지부로 상징되는 대공장 정규직 노조의 궁극적 문제는, 이상범이 이야기하듯 “소모적·대립적 노사관계를 고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 앞서 제조업 노동시장 전반에 걸친 사회적·정치적 투쟁에 별 다른 전망이 없다는 점이다. 

30년 간 민주노조를 지켜온 대공장 정규직 노조들은 자신의 사업장을 넘어선 사회운동적 전략을 도출해야 한다. 단지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연대하는 걸 넘어 1·2차 하청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이들의 ‘노조 할 권리’를 확장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지원·연대하는 기획이 필요하다. 공급사슬망을 통한 조직화는 물론이고, 공장이 위치한 울산·전주·아산 등 지역의 모든 중소영세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 캠페인을 통한 지역연대 전략도 노조의 사회적 역할을 부각시킬 수 있다.
 

어제와는 다른 프로젝트

1년 전 박근혜 퇴진 투쟁이 거센 대중 시위의 국면에 접어들자, “87년 6월 이후 노동자대투쟁이 왔듯” 촛불 이후의 직장 민주주의를 만들자는 목소리도 불거져 나왔다. 《오늘보다》 역시 주되게 그런 목소리를 냈다. 여기엔 일말의 기대가 있었지만, 한계에 대한 명백한 인식도 있었다. 과거의 영광의 기적적 부활은 호소만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노조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수가 되려면, 시장과 개별 사업장의 문제에 갇히지 않고 사회와 계급의 영역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성과이자 한계를 성찰하고 계승하며, 혁신할 수 있는 길이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와 억압에 제대로 도전하려면 노동자운동의 반성과 혁신이 필요하다. 그래야 신자유주의 노동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노동체제를 건설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엔 전략조직화 사업의 전면화, 청년 노동자 조직을 통한 세대교체, 국제연대 강화, 리더십의 혁신 등 구체적 과제들이 요구된다.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영광스러운 풍경이 아닌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의 빈틈과 사건과 사건 사이의 적막을 응시함으로써 노동자대투쟁의 기억을 현재화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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