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기획
  • 2017/10 제33호

80년대 운동을 통해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보다

변혁 이념과 대중운동 결합의 분기점이었던 1987년

  • 편집실 박상은
6월 항쟁 직후인 1987년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에서 시작된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렇게 촉발된 투쟁이 1990년 전노협 결성과 1995년 민주노총 건설로 이어졌다는 게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일반적 서사다. 이 글에서는 이 서사에서 소략하게 다루거나 생략하는 1980년대 노동운동 역사 속에서 노동자대투쟁을 파악해보려 한다. 1980년대는 한국 역사 중 변혁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대이며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바꿔야 하고, 바꿀 수 있다는 이념이 가장 널리 퍼져있었던 시기다. 많은 활동가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의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1980년대라는 맥락을 통해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돌아보는 것은 어떻게 노동자들이 변혁운동의 주체로 설 것인지 사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1980년대 전반기의 노동운동

1980년은 ‘서울의 봄’으로 시작한다. 1979년 10월 박정희 사망 이후 일시적으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되고, 노동자들의 투쟁도 급격하게 분출했다. 사북 탄광노동자들의 투쟁, 청계피복노조의 임금인상투쟁을 비롯하여 1980년 5월 중순까지 2천여 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이 시기 전개된 노동쟁의 건수는 1980년 한 해의 쟁의행위 중 90퍼센트 이상이었다. 1980년 5월 3일에는 전국적 민주노조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이 건설된다. 이들은 1970년대 노동운동의 이념이 경제주의와 조합주의라는 틀 안에 갇혀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적 운동 이념과 조직 건설, 대중투쟁 활성화, 노동자 역량의 강화, 진보적 학생운동의 노동운동으로의 전화 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민노련은 구로공단 삼경섬유노조 민주화투쟁과 남영나이론 투쟁을 주도하는 등 부분적 성과를 낳기도 했지만, 1981년 조직원 대부분이 검거되어 당초의 구상을 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노총을 대체하는 새로운 전국적 노동조합 조직 건설에 대한 전망을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80년 ‘서울의 봄’의 좌절과 광주민중항쟁을 경험하면서 한국의 변혁운동은 크게 성장한다. 학생운동이 그 중심에 있었다. 학생운동가들은 노동운동을 변혁운동의 중심으로 설정하고 1980~85년 동안 수천 명 이상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지식인의 노동현장 투신은 1970년대에도 없지 않았지만, 1980년대에는 훨씬 목적의식적이고 조직적이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고 노동자계급을 사회변혁운동의 주체로 조직하기 위해 투신했다.

지식인들의 노동현장 투신은 노동운동에 새로운 흐름을 불어넣었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침체됐던 노동운동은 1983년 말 이후 유화국면이 조성되자 활성화된다. 1984년경부터 신규노조 결성이 증가하고, 전두환 정권이 1984년 9월부터 다시 탄압 기조로 돌아섰음에도 1985~1986년에는 노동쟁의가 증가했다. 이중 수도권 지역 신규노조 건설·노동쟁의는 대부분 학출(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의 직·간접적 영향 하에 이뤄졌다. 이 중 특히 1985년의 대우자동차파업과 구로동맹파업은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1987년 대투쟁은 물론 그 이후까지 전체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5년 대우자동차파업과 구로동맹파업

1985년 4월 대우자동차파업과 6월 구로동맹파업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신호탄이라 볼 수 있다. 1984년 대우자동차의 학출 활동가들은 노동현장문제 해결을 위해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에 대한 사측의 탄압에도 노조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조합원들 사이에서 노조민주화 분위기가 조성됐고, 1984년 12월에는 ‘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듬해 4월, 사측이 계속 교섭을 연기하고 어용집행부가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가운데, 노조정상화추진위원회는 24.9%의 임금인상안을 제시하며 집행부를 압박했다. 4월 15일 임금협상이 재개되었으나 사측은 5.7% 인상안을 고집하여 협상이 결렬됐고, 노조 집행부는 조합원들의 열기에 밀려 1985년 4월 16일 파업에 돌입했다. 결국 열흘간의 투쟁 끝에 기본급 등 16.4% 인상, 복지 조건의 개선 등 노동자들의 요구가 대부분 반영됐다. 1985년 대우자동차파업은 대규모 사업장의 파괴력과 영향력을 보여주었고, 노동조합 민주화투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임금인상 등 경제투쟁에 머무르고 외부의 운동단체와의 연대를 거부한 점,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됐다.

한편 1984년 6월 구로공단에서는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노조 등 신규 노조가 잇달아 건설됐다. 이들 노조 역시 학출활동가들이 주도하거나 그 영향력 하에서 조직됐다. 구로공단의 신규 노조들은 1985년 초 공동으로 임금인상투쟁을 벌였다. 노조 결성을 주도하던 소모임들이 다른 소모임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녔고, 신규 노조 간 일상적인 교류와 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들 노조는 동시교섭 동시투쟁을 계획하고 실행하여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무력화시키는 높은 인상률을 쟁취한다.

1985년 6월 22일, 정부는 대우어패럴노조 간부 3명을 구속했다. 4월의 임금협상 시 노동쟁의 조정법 등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그날 밤 구로공단 내 민주노조 조합 간부들과 지역 해고자 등은 대책회의를 열고 이번 탄압을 지역노동자들이 막아 내지 못한다면 정부에 의해 노조가 각개격파될 것이라고 파악했다. 6월 24일 오전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여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24일 오후에는 효성물산 조합원 400여 명, 선일섬유 조합원 70여 명, 가리봉전자 조합원 500여 명이 연대파업에 돌입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의 시작이었다. 연대투쟁 이틀째에 세진전자, 남성전기, 롬코리아, 5일째 부흥사 노동조합과 삼성제약이 가세하여 구로연대투쟁 사업장은 10개로 늘어났다. 외부 지지투쟁도 활발해, 임금인상투쟁 당시 해고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연합·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와 청계피복노조 등이 공단지역에 연일 유인물을 배포했고, 대학생들도 시위를 벌였으며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의 지지투쟁도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정부와 사측은 탄압으로 일관했다. 29일, 닷새 동안 굶주리며 농성을 계속하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구사대와 경찰에 의해 진압되면서 연대파업은 막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구로동맹파업은 43명의 구속자와 1,300여 명의 강제사직 및 해고자, 130여 명의 부상자를 남기고 종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조합이 경제투쟁에 한정되지 않고 구속자 석방·노동3권 보장·노동운동 탄압 중단 등의 정치적 요구로 수행된 대중적인 투쟁이었다. 특히 단위노조의 틀을 넘어서 연대투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80년대 중반기의 가장 중요한 투쟁으로 평가받는다.

구로동맹파업 이후 다양한 정치조직들이 등장했다. 1985~1987년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격렬한 노선 논쟁이 진행되었던 시기로, 각 운동조직은 변혁의 경로와 변혁 주체 형성 방식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분화하며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시도했다. 이에 대해 크게 두 경향의 평가가 존재한다. 대중성을 중요하게 여긴 입장에서는, 노동운동이 관념적 논쟁만 벌였으며 지나치게 정치주의로 기울며 분파주의가 깊어지고, 노동자대중과 분리된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대중운동과 활동가운동 혹은 노동자와 지식인의 결합의 경험을 다음 시기 노동운동의 성과와 유산으로 남겨주지 못하고 양자의 분화·분리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노동자운동의 주체형성에 중심을 두는 입장은 이 시기를 훗날의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이자, 1987년 대투쟁이 일어날 바탕을 마련하고 대중적이면서도 변혁적 노동운동을 형성하는 모색 과정으로 본다. 1987년 7·8·9월에만 한정하지 않고, 장기적인 운동의 역사 속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구동파추진위
 

1980년대 노동운동세력의 기여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강조된다. 노동자대투쟁을 1987년 7·8·9월 3개월만 떼어내 보면 그렇게 볼 수 있다. 학출 활동가들이 얼마 진출해있지 않은 영남권에서 시작됐고, 1986-1987년에 형성된 다양한 정치조직들이 직접적으로 대중투쟁을 조직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 노동운동세력은 노동단체활동을 매개로 작업장·지역·전국 차원의 민주노조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결합했으며, 노동자들의 분출되는 투쟁 동력을 확산시키는 매개 역할을 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1월에는 ‘사무전문직 노동조합협의회’가, 곧이어 12월에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결성되면서 사무직 노동자는 ‘업종노조협의회’로, 제조업 노동자는 ‘지역노조협의회’로 결집했다. 이것이 1988년 12월 지역·업종별 노조 전국회의(전국회의)로 이어진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출범한다. 이 과정에서 80년대 변혁운동에 뛰어들고,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성장한 활동가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전노협 출범과 운영에 큰 역할을 한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의 활동을 예로 들어보자. 전노운협은 전국의 노동운동단체들이 결집한 상설적인 공동투쟁체였다. 80년대 노동운동세력은 노동조합에 국한된 것이 아닌, 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을 촉구하며 지역마다 노동운동단체를 세웠다. 이들은 연대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구체적인 전술을 기획하여 민주노조운동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몇 차례의 협의회 활동을 거친 노동운동단체들은 1988년 2월 현대엔진 투쟁을 계기로 다시 모였고, 같은 해 6월 전노운협을 결성한다.

전노운협은 전국회의 결성과 운영 과정에 참여했고, 임금인상 투쟁 시기엔 전국만이 아니라 지역투쟁본부의 대부분 실무를 맡았다. 또 전국회의의 투쟁사업과 전노협 건설투쟁에 긴밀하게 결합해 정책 기획과 대중토론을 조직했고, 전노협 초기의 실무집행력을 감당했다.

이러한 직접적 기여 외에도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1987년 이후에 활발히 진행된 사회구성체논쟁 등 지식인·학생운동의 논쟁 역시 노동운동의 변혁지향성을 강화시켰다. 이처럼 80년대 변혁이념은 1985년의 노동자투쟁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라는 엄청난 대중운동의 분출을 경험하면서 대중적인 노동자운동과 결합한다. 
 
ⓒ구동파추진위
 

‘80년대’의 종료

80년대 노동운동이 한국사회의 ‘변혁’이라는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한 노동운동의 대중적 발전과정에서 ‘노동해방’, ‘평등사회건설’이라는 요구로 표출될 수 있었다. 또한 노동자대투쟁은 변혁운동세력에게 대중 투쟁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이후 여러 운동조직의 활동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1987년의 긍정적 효과가 이후 몇 년간 지속됐다는 점에서 구로동맹파업과 그 이후의 변혁노선 논쟁이 노동운동의 분화, 노동자와 지식인의 결합 해체를 미리 예고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7~9월 3개월의 폭발적 조직화 뿐 아니라 사후 효과, 즉 변혁이념과 노동운동의 강력한 융합을 낳았다는 점에서 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노동자대투쟁은 변혁운동의 시도와 대중적 노동운동이 결합하는 분기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결합은 1991년을 전후로 종료된다. 한국에서는 5월 투쟁이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며 실패로 끝나고 ‘민주화의 보수화’가 진행된다. 세계적으로는 연말에 소련이 붕괴하면서 변혁 이념이 크게 뒤흔들린다. 80년대 노동운동에 적극 결합했던 정치조직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스스로 자신의 운동을 청산하는 경우도 많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이후 1990년 전노협, 1995년 민주노총 건설, 96-97년 총파업까지 발전했다는 서사는 노동운동의 위기가 1997년 외환위기와 더불어 도래했으며, 그 이전까지는 발전 일로를 걸었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변혁적 노동운동을 사고한다면, 1987년의 효과가 종료한 1991년 역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80년대의 변혁운동의 청산이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노동운동 위기론도 80년대 운동의 청산 과정 중 하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87년’을 다시 재현하기 어려운 이유에는 경제적·정치적 조건의 차이와 더불어 이념과 주체의 문제도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80년대 변혁운동과 노동자대투쟁의 관계를 통해 이를 잠시 훑어보았다. 다음 연재에서는 1987년을 오늘날 다시 생각하는 의미와 1987년으로부터 형성된 오늘날의 노동운동이 나아갈 바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
 
 

참고문헌

 

김용기·박승옥 편, 《한국노동운동논쟁사》, 현장문학사, 1989
김원 외, 《민주노조, 노학연대 그리고 변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7
김정한, 〈민주화운동의 시대〉, 《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80년대》, 창비, 2016
김창우, 《전노협 청산과 한국노동운동》, 후마니타스, 2007
양규헌, 《1987 노동자 대투쟁》, 노동자역사한내, 2017
임영일, 《한국의 노동운동과 계급정치(1987-1995)》, 경남대학교출판부, 1998
전국금속노동조합, 《금속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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