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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 2017/08 제31호

노동조합 3천 개가 폭발적으로 만들어진 이유

1987년 노동자 대투쟁 30주년①

  • 배일훈
 

저항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공돌이·공순이’라 불렸던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세상의 전면에 등장했다.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유가 인하, 국제금리 인하, 달러가치 인하) 속에서 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누렸고 정부는 경제대국의 꿈을 유포했다. 기업의 임금인상 여력이 충분했음에도 국가와 자본은 억압적 노무관리를 통해 임금을 억제하는 정책을 고수했다. 날이 갈수록 노동자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한편 1980년대 대학생들은 공장에 투신해 학습모임을 결성하는 등 일터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침체기는 있었지만 80년대 후반까지 ‘학출’이라 불리던 이들 일부는 해고된 노동자, 현장 노동자들과 함께 소모임이나 독서 모임을 만들거나, 공단 지역 노동상담소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인간으로서 굴욕감을 느끼게 만들던 작업장에서 ‘공순이·공돌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하지만 불만과 의지가 있다고 해서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정권의 탄압이 그들을 막아섰다.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고자, 정권은 재야와 민중운동 세력을 ‘용공·폭력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탄압했고, 야당과 민중운동 세력을 분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 등 일련의 사건 이후 여러 노동운동가들이 구속됐고, 이런 빈번한 탄압 때문에 노동운동의 분위기는 위축됐다.
 

저항과 승리의 경험을 일터로

6월 항쟁은 민주주의의 열망을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켰다. ‘직선제 개헌’, ‘정권타도’를 외치며 수백만 명의 시민·학생·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전두환 군부 독재는 궁지에 몰렸다. ‘넥타이부대’라 불리던 사무직 노동자들이 등장했고, 항쟁의 후반기에는 생산직 노동자들도 공단지역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지역에 따라서 노동자들이 항쟁을 주도한 곳도 있었다. 그들은 “독재타도, 호헌철폐”와 함께 “잔업, 특근, 철야 없이도 노동자가 먹고 살 수 있게 힘쓰자”, “최저임금보장, 근로기준법·파업권 쟁취” 같은 구호를 외쳤다.

노동운동은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노동조합을 건설하자”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기 시작했다. 6월 항쟁이 그동안 노동자·시민의 권리를 억압하던 국가권력을 후퇴시킴으로써 가능성을 연 것이다. 거리에서 저항과 승리를 경험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상태와 권리를 깨닫게 된다.
 

옥포의 조선소에서 서울철로 위로

울산이 노동자대투쟁의 출발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전부터 노동자들이 지역 노동운동 세력과 연계해 노동조합 건설을 준비해왔다. 현대엔진,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 노동자들은 은밀하게 지역모임을 만들어 학습, 강연회, 노동상담을 하며 노동조합을 만들 준비를 했다. 교육내용은 노동법, 단체협상, 노동운동사 등이었고, 상담내용은 산업재해·임금·부당노동·퇴직금·기업주의 폭행이었다.

한편 이들은 각 사업장에서 소모임을 운영하였다. 현대엔진은 고적답사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독서회를 꾸려 각 현장에서 일상투쟁을 벌여 나갔다. 성과금 차등지급 철폐를 요구하는 몸벽보 착용하기, 축구시합 후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부터 식당에 한 줄로 서서 식사하기 같은 집단적 행동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러한 준비를 거치며 이들은 일터의 민주주의를 찾을 힘을 길렀다.

7월 5일, 마침내 울산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투쟁의 서막을 올렸다. 7월 초 현대그룹 12개 계열사와 울산 중소사업장까지 휩쓴 투쟁은 7월 말 부산과 마산·창원, 거제 등 남동해안공업지역으로 번지며 확산되었다. 8월에는 대구·경북, 대전·충청, 인천과 수도권, 전북, 광주·전남을 거쳐 서울까지 노조결성과 투쟁이 이어졌다. 투쟁의 열기는 8월 말 이석규 열사 장례식을 기점으로 국가권력이 노골적으로 개입하면서 점차 수그러들긴 했지만 그 열기는 9월까지 지속되었다.
 

뜨거웠던 여름, 3개월간 이어진 파업 참가자는 연인원으로 2백만 명, 파업건수는 총 3341건으로 하루 평균 44건에 이르렀다. 특히 8월에만 2552건, 하루 평균 83건의 파업이 발생했다. 8월 한 달 동안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122만 명으로 당시 10인 이상 사업체 노동자 333만 명의 37퍼센트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민주노조의 확산

이토록 활화산 같았던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무엇을 남겼나? 무엇보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조직으로서 널리 인정받았다. 군사독재 정권 아래 유지된 저임금정책과 억압적·병영적인 노무관리가 노동자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이런 시대에 노동조합은 ‘일터의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창이자 방패’였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건설된 노조의 수가 1361개에 이르고, 특히 8월에는 하루 평균 22개가 새로 만들어질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노동자대투쟁 전인 1986년 말 기준, 노조 수는 2658개, 조합원 수는 103만 명이었으나 1988년에 이르면 노조 수는 6142개, 조합원 수는 170만 명으로 늘어난다. 노조조직률은 15퍼센트에서 22퍼센트로 껑충 뛰어올랐다. 

둘째, 자주성·민주성·노동자의 단결이 노동조합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파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모여 스스로 파업 프로그램을 만들고, 투쟁의 성격과 방향을 토론하는 시간을 통해 전술과 전략을 논의했다. 노동자 대중의 참여로 토론된 결과를 모아내는 것은 노동자 대중의 결의를 집약하는 과정이었다. 반면 조합원들의 요구를 가로막거나 투쟁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어용노조에 대해서는 집행부의 퇴진과 노조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노동자계급의 저력

셋째, ‘선파업 후교섭’이라는 투쟁방식을 경험하면서 노동자들은 노사 간에 존재하는 힘의 논리를 학습했다. 8월에는 하루 400건이 넘는 쟁의가 발생하고, 8월 29일에는 743건으로 최고 기록을 갱신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94퍼센트인 3225건) 쟁의발생 신고나 냉각기간 등의 법적 규제를 아예 무시하고 우선 현장을 점거하고 파업이나 농성 등의 방식으로 투쟁에 돌입하면서 조직을 구성했고, 그 다음 사용자에게 협상을 요구했다. 이런 ‘선파업 후교섭’은 현행법에서 볼 때 불법이었다. 하지만 단결된 노동자들의 거대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법 절차까지도 무력화될 수 있었다.

넷째, 상반기 임금인상에 이어 하반기 대투쟁의 결과로 처음으로 두 자리 수 임금인상을 쟁취했다. 1987년 상반기 임금인상률은 7.7퍼센트였다.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에 대한 재교섭과 20~30퍼센트의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한 해 두 차례에 걸친 임금인상으로 1987년 정부와 재계의 목표였던 한 자릿수 인상은 지켜지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결과적으로 약 17퍼센트의 임금인상을 쟁취하게 된다. 100퍼센트 인상한 곳도 여러 곳 있었다. 이는 다음 해 임금인상을 추진하는 기반을 제공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과제

지난겨울 광장에서 촛불을 밝히며 어떤 이들은 1987년 6월 항쟁을 떠올렸고, 다른 어떤 이들은 같은 해 있었던 7~9월 노동자대투쟁을 떠올렸다. 광장에서 술자리에서 그들은 당시의 열정과 환희를 반추하고, 다음 세대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는지를, 그리고 우리가 되찾아야 할 미래임을 들려주었다.

30년이 지났다. 6월 항쟁에 대한 기억은 언론지면과 각종 기념행사들로 즐비하다. 반면 노동자대투쟁의 기억은 왜소하기 그지없다. 그만큼 2017년 지형에서 ‘노동’, ‘노동운동’의 입지가 좁다는 방증일 것이다. 198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투쟁, 세상을 뒤집어놓았던 투쟁. 그러나 노동자대투쟁을 그렇게 기억 속에 남겨두거나 또는 그 때를 단순히 ‘따라 해보자’가 교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자대투쟁이 남긴 성과와 한계 위에서 현재의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점, 30년이 지난 상황에서 객관적 정세와 주체적 조건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전략과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30주년을 맞이하여, 이후 연속기획을 통해 이를 검토해나가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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