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란을 찾아서
- 2015/10 제9호
87년 6월 민중봉기와 넥타이 부대 사이에서
87년 6월, 두 개의 길
1979년 유신체제 붕괴가 김재규의 총구에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다가왔듯이 1987년 6월 10일도 그랬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87년 6월 항쟁은 ‘호헌철폐, 독재 타도’를 외친 대학생, 시민, 넥타이부대 등에 의한 전국적인 반독재 투쟁이었다. 87년 6월 10일 전날까지만 해도 학생운동 지도부는 6월 10일 시위가 그토록 확대되고 밑으로부터 대중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킬지에 대해서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그 뿌리는 1986년 이후 잇따른 패배감 탓이었다.
87년 대회전을 목전에 뒀던 86년은 개헌 문제로 시작됐다. 야당의 직선제 개헌을 포함해 제헌의회 소집, 헌법제정 민중회의 등 ‘어떤 방식’의 개헌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화됐다. 이 와중에 5월 3일 인천에서 야당의 직선제개헌1천만명 서명운동 인천본부 발족식이 열리던 날, 전국의 사회운동 조직이 결집해 대규모 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이 이른바 ‘5.3인천항쟁’이었다. 개헌을 둘러싼 각종 구호와 슬로건이 등장한 5.3인천항쟁은 ‘직선제 개헌’ 이외에도 사회운동이 지향했던 개헌론을 외치는 백가쟁명의 장이었다. 이때만해도 87년 개헌의 방향은 직선제라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들이 모색되고 있었다.
하지만 5.3인천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은 수도권 지역 사회운동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고, 이 와중에 발생했던 사건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었다. 대학생 출신 노동자로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던 권인숙을 부천서 문귀동이 성고문한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한국사회의 젠더 문제에 대한 인식을 극적으로 드러내 준 사건이었다. 이런 와중에 87년 벽두에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 ‘박종철고문치사 조작 은폐 사건’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과 폭력성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이 사건도 초기에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도 88년 올림픽 전까지 개헌 논의를 중지한다는 ‘4.13호헌조치’를 발표해서 저항의 화살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했다.
어쩌면 국가폭력에 의한 죽음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 박종철의 죽음은 잊혀질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에 대한 은폐조작이 폭로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공권력에 의한 인권의 유린과 이를 축소, 은폐해서 집권의 정당성을 얻고자 했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5월 23일, 종로 가두 투쟁 때도 시민들의 호응이 눈에 띄었다. 시민들은 시위대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옆으로만 흐르는 목소리’로 죽음과 분노에 대한 소식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6월 항쟁을 주도한 국민운동본부, 속칭 국본이나 서대협조차 6월 10일이 전국적인 대중 봉기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예측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길, 명동성당 농성과 시위의 전국화
그러나 국본과 서대협의 예상과 달리 6.10 대회는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통해 서울과 대도시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중심에는 ‘명동성당 농성’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명성, 그 6일의 기록>에 잘 기록되어 있듯이, 명동성당 농성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6월 10일 당일 명동 인근에서 시위를 하다가 전투 경찰에 쫓기던 시위대가 우연하게 자신들의 피난처로 명동성당을 선택했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개헌과 새로운 사회의 방향을 주장하던 학생운동가, 도시빈민, 넥타이를 맨 소시민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정권의 퇴진을 외쳤다. 몇 번에 걸친 공권력의 명동성당 침탈 위기를 넘긴 뒤 명동성당 농성은 87년 6월을 전국적인 봉기의 장으로 만드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명동성당 농성이 일치된 목소리를 담았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농성단과 항쟁의 지도부인 국본·서대협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농성 첫날인 6월 10일 국본은 인명진 목사를 통해 농성은 국본과 무관하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며, 서대협 역시 무질서와 폭력 투쟁은 대중과 운동 진영을 괴리시킨다는 명분 아래 농성 해산에 무게를 실었다. 다음으로 지적해야 하는 점은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중산층이라는 존재와 또 다른 시민인 노동자·민중 간의 괴리였다. 13일 이후 서울 투쟁에서 넥타이 부대의 출현은 침묵하던 중산층의 대반란이었고 이 소식은 언론과 해외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정치적 지도자를 통해 안정적인 민주화 이행을 지향했던 이들, 그리고 이들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는 87년 6월 전국적인 봉기 과정에서 나타난 요구를 ‘봉합’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정세 고양에 따른 대중 의식을 가두려고 했던 국본과 서대협 지도부와 농성단 간의 갈등이었다. 6월 10일 농성단 결성 때부터 국본과 서대협은 농성단의 해산을 유도했지만 끝까지 계속 투쟁을 주장한 것은 학생이 아닌 시민들이었고, 농성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실제 농성에 참여한 이들은 중산층과 구분되는 실업자와 도시 빈민 등이었다.
이는 6월 18일 국민대회를 앞두고 농성 해산을 주장한 국본과 명동성당 관계자와 농성 대오 사이의 논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본과 서대협 그리고 재야 진영은 호헌 철폐와 직선제 쟁취라는 수용가능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대중의 고양된 정치의식을 제한하거나 투쟁 수준을 낮추려 했다. 6월 23일 2만여 명이 운집한 연세대 투쟁 때도 서대협 의장 이인영은 준비되지 않은 투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쟁을 농성으로 제한하며 대중의 열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당시 서대협의 정세 인식은 대중 노선을 근거로 투쟁을 특정 방식으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명동성당 농성을 둘러싼 상이한 태도와 갈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도부는 ‘예상할 수 없는 길’로 갈지도 모르는 대중과 봉기적 실천을 제한하고자 했고, 이는 87년 6월을 ‘호헌철폐-직선제 쟁취’라는 단일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이들의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국화된 시위는 국본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일자별로 주목할 만한 흐름을 정리하면, 6월 15일 전국 59개 대학 9만여 명이 교내외 시위를 전개했으며 평화적 시위를 하던 충주에서 투석전으로 경찰이 무력화되고 민정당사 지구당에 화염병이 투척되었다. 16일 들어서 대전 등지에서 밤이 깊어짐에 따라 실업자와 룸펜 청년들의 폭력 시위가 벌어졌는데, 중산층이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한 서울과 달리 지방에서는 밤 시위의 중심이 하층민들로 변해갔다.
이튿날인 17일 부산에서는 18일 새벽까지 시위가 이어졌다. 17일 밤 시위가 18일 아침까지 이어질 정도였다. 심야에는 택시들이 경적 시위를 벌였고 사상공단 노동자들은 퇴근 후에 “8시간 노동으로 생활 임금 쟁취”, “민주 노조 결성”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에 참여했다. 최루탄추방대회날인 18일에는 인천에서 4만 명이 넘는 노동자, 학생들이 거리를 점거했고, 부산에서는 파출소 습격, 경적 시위, 파출소 방화, 바리케이트 설치 등 더 이상 공권력이 시위대를 막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20일이 되어도 전국적 시위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성남에서는 1000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이 성호 시장 앞에 집결해서 돌과 화염병을 투척했고, 국본의 비폭력 지침에도 불구하고, 투석전, 경찰서와 방송국 습격으로 경찰력을 마비시키는 등 초반부터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21일 광주에서는 새벽 1시경 공원 쪽 시위대가 중앙로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10만여 명이 운집했다. 특히 광주와 목포에서는 고교생들이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다. 순천에서는 시위대의 80퍼센트가 고등학생이었다. 전국 37개 도시에서 평화 대행진 시위가 전개된 6월 26일에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산에서는 시내 전 지역에서 27일 새벽 2시 즈음까지 차량시위가 연이어졌으며, 광주에서는 20만 명이라는 최대 인파가 자정까지 거리 시위를, 안양에서는 전투경찰이 시위대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등 전국적인 시위가 지속되었다. 이른바 전국적 봉기의 ‘도미노’ 현상이었다.
엇갈림과 교착, 6월 이후 대중들
널리 알려진 것처럼 87년 6월의 전국적 봉기와 시위는 6월 29일, 6.29선언을 통해 잦아들었다.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87년 6월 29일은 술값도, 커피값도, 밥값도 공짜였던 ‘행복했던 날’로 기억된다. 물론 이것도 일면은 진실일 것이다. 직선제 개헌의 수용, 언론집회출판의 자유 등 시민권의 보장 등을 포함한 6.29선언은 6월 10일부터 불붙은 전국적인 시위의 도미노 현상을 일시에 잠재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거리와 현장에서 6.29와 전두환 정권의 직선제 수용의 한계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7월 9일 백 만여명이 운집했던 이한열 열사 노제였다. 연세대를 지나 시청에 모인 시위대는 청와대와 광화문으로 나아갈 것을, 6.29로 항쟁이 종료되지 않았음을 요구했다. 하지만 국본과 서대협 지도부는 명성 때와 마찬가지였고 시위대는 흩어져 갔다.
채 두 주가 지나지 않아서 울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사업장에서 다른 민주주의를 외치는 더욱 강력한 봉기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대투쟁’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노조민주화, 임금 인상, 차별 철폐 등 노동법에 이미 규정된 것이었지만, 그들은 불법을 상식으로 만들며 전국의 사업장과 거리를 가로질렀다. 6월 29일 이후 ‘직선제에 만족하는 국민’으로 돌아간 듯했던 대중은 얼마 안 있어 ‘봉기하는 대중/노동자’로 다시 등장했다. 물론 87년 6월의 대중과 노동자대투쟁의 대중은 겹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점은 새로이 등장하는 봉기하는 대중/노동자에 대한 또 다른 대중/중산층의 ‘공포’가 교착(交錯)하는 중요한 국면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