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7/09 제32호
청년노동자, 노동조합으로 희망찾기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의 새로운 도전
‘민주노조 운동’이 쟁취했던 많은 권리들이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후퇴하기 시작했다. 20년 전 ‘96-97 총파업’ 당시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도입에 맞서 싸웠지만 지금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과 변형근로 등은 익숙한 일상이다. 특히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청년 노동자들은 하향평준화된 노동조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있다. 누구보다도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인 이해 대변과 권리 실현의 창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노동조합은 그리 가까운 존재가 아니다. 2014년 기준 35~54세 노조조직률이 15.1퍼센트 가량인 반면, 15~34세 청년노동자들의 노조 조직률은 11.5퍼센트, 심지어 15~24세는 4.8퍼센트다. 젊은 세대일수록 노조할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청년들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노동자 대다수에게 노동조합은 먼 나라 얘기다. 전체 노조조직률은 10퍼센트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서울디지털단지의 청년 노동
노동조합은 청년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서울남부지역 노동자 권리찾기 사업단 노동자의미래(이하 노동자의미래)’ 사례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구로공단은 과거 제조업 중심의 수출산업단지였다.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동맹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이 발원했다. 하지만 90년대 이래 구조조정이 진행되었고 지금은 IT, 서비스산업 중심의 서울디지털단지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청년 노동자들이 구로·금천 지역으로 유입됐다.
하지만 디지털단지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근속기간이 채 1년도 되지 않는다. 근속년수 1년 미만 노동자 비율이 41.3퍼센트인 반면, 10년 이상 장기근속자는 4.9퍼센트에 불과하다. 전국에서 1년 미만 근속자가 30.8퍼센트, 10년 이상 장기근속자가 20.7퍼센트인 것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유형근, <청년 불안정노동자 이해대변 운동의 출현과 성장 : 청년유니온과 알바노조>) ‘평생직장이란 없다’는 경험적 인식이 통계적으로 증명된 셈이지만, 서울디지털단지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는 걸 보여준다.
커리어를 쌓기 위해 ‘거쳐 간다’는 청년들의 현실을 악용하는 업체들도 많다. 근로기준법 위반이 88.4퍼센트에 달하는데, 상세 내용을 보면 임금 미지급이 56.7퍼센트로 가장 많았다. 뒤이어 공짜야근, 공짜조출 등 무료노동이 41.8퍼센트, 최저임금 미지급이 24.6퍼센트, 휴업수당 미지급 11.0퍼센트 순으로 나타났다.
2017년에 근로기준법 위반, 임금 체불을 남발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이런 임금 미지급 무료노동은 전통적인 생산직만의 문제는 아니다. 콜센터나 편의점 등 서비스업은 물론 게임, 애니메이션, 광고, 소프트웨어 개발 등 20~30대 노동자들에게 각광을 받는 이른바 ‘첨단지식산업’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새로운 조직화 방식을 실험하다
2011년 금속노조 서울남부지역지회를 중심으로 노동자 조직화 사업단 ‘노동자의미래’가 출범했다. 노동자의미래는 단기근속자들의 천국 서울디지털단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하며, 조직화 사업에 있어서 그간 민주노총이 해오지 않은 새로운 실험들을 해왔다.
우선 2011년에는 가산디지털단지역과 독산역 앞에서 대규모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무려 2895명이 조사에 참여했고, 상담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찾았다. 캠페인의 경우 근로기준법 준수나 무료노동 근절 캠페인 등이 주된 매개였다. 노동자들과 상담하면 노동부에 진정 및 청원을 하는 등으로 일부 사업장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2809명의 노동환경실태조사를 통해 이를 근거로 노동부, 공단사용자단체와 근로기준법 준수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자의미래는 디지털단지 내에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민주노총 또는 사회단체’라는 지역적 상징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직접적인 조직화 성과가 그리 크진 못 했다. 일단 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불만이 있어도 재직 중일 때보다는 퇴사 이후 ‘복수하겠다’는 심정으로 처리하려 했다. 지금의 직장에 애정이 사라져 오래 다닐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대부분 규모가 영세해 노동조합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10명이 일하는 IT 광고업체나 20~30명이 일하는 조그만 공장, 소규모 사무실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나서긴 어려운 일이다.
결국 노동자의미래는 다른 조직화 방식을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디지털단지 노동자들은 하나의 회사에 오래 다니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업종이나 지역 내의 다른 기업에 재취업을 반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바로 여기에 착안했다. 한 회사를 조직하는 게 어렵다면 특정한 지역의 노동시장 단위로 조직하는 방안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를 ‘지역 노동시장 조직화 방안’이라 부른다.
‘지역 노동시장 조직화 전략’은 노동자들이 권리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개별적인 노동조합 가입을 고민한다. 이들 조합원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더라도 조합원 자격은 유지한다. 실업자 상태에서 조합원 자격 유지가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것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조합원들이 수시로 취업하는 지역, 직종 또는 산업 전체의 노동조건 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노동조합 운동의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이는 법·제도적 개선을 통해서든, 사용자단체와의 교섭을 통해서든 해당 지역 또는 해당 산업 노동시장에서 기준이 되는 노동권을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테면 기업을 벗어난 지역 또는 산업에서의 단체협약인 셈이다. 이런 방식을 채택할 경우, 조합원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게 되더라도 ‘지역과 산업의 노동환경 개선’이나 ‘지역협약 체결과 현실화’라는 과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런 중장기적 목표를 갖고 조합원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조합원들만이 아닌, 같은 지역에 있는 비조합원들의 참여, 즉 ‘지역과 사회의 우호적인 여론’이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이슈를 환기하고 개별 기업 또는 사용자들을 여론으로 압박하고, 이를 기반으로 교섭 또는 제도적 개선을 이뤄낸다. 그 효과를 통해 조합원 조직을 확대하는 것이다.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단기 근속자들의 천국인 서울디지털단지에는 이러한 노동조합 활동방식이 더 어울릴 것이다.
노동자의미래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전략 토론회를 진행했다. 아직 구체적인 실천과 사업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중소영세 사업장에서 지극히 유연화된 노동 조건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만나는 것이 노동조합 운동의 주요한 과제라면, 이런 방향이 맞아 보인다.
청년과 노동조합이 만나야 한다
청년들의 노조할 권리는 민주노조 운동의 큰 과제다. ‘87년 세대’가 은퇴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조 운동은 변화된 현실에 어울리는 조직화 방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현재에 안주하는 태도’라고 나무랄 수만은 없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조직화 방식 역시 아직은 ‘실험’ 단계에 머물고 있다. 문제는 새로운 실험들에 주목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특히 지역 협약이 어떻게 강제력을 가질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한국 노동법 상 단체교섭 시에는 조합원이 재직 중이어야 사업체에 교섭 의무가 생기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사회적 여론으로 회사를 압박하는 과정은 청년들에게 ‘노동조합은 우리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하나의 운동이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은 낡았다’는 이미지를 노동조합 스스로 거부하고 탈피하겠다는 일종의 사회적 선언이자, 캠페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을 투쟁으로 돌파해왔던 민주노조다운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 필자 소개
이준혁 | 게임, 만화, 술을 좋아한다. 서울남부지역 노동자 권리찾기 사업단 <노동자의미래>에 함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