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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 제26호

정치세력화 다시 생각하기

노동자에게 '정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 이상욱 사회진보연대 서울지부 사무처장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이념적·조직적으로 보수주의 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구별되는 정치세력이 되고자 하는 운동 전략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일터와 지역에서의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통해 체제의 부속물이 아닌 대안으로 성장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자정당 혹은 진보정당 건설과 선거 참여라는 축소된 개념으로만 이해되어 왔다. 노동자·민중의 정치가 ‘세의 규합’과 선거 일정에 맞춘 ‘선택’에 그친 것이다.

연초부터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정치방침’을 둘러싼 뜨거운 논의가 있었다. 노동조합에게 정치방침이란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오랜 비전 혹은 프로젝트를 한정된 시기에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달성해나갈 것인지를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월 7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정치방침 결정 무산은 과거와 같은 당위의 반복만으로는 노동자 정체세력화가 추동력을 가질 수 없음을 드러냈다. 따라서 민중운동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노동자민중의 정치를 구성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97년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

1996~1997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맞선 총파업을 경과하면서 민주노총은 정치영역에서 노동자를 대표하는 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이는 1997년 건설국민승리21(약칭 ‘국민승리21’)의 창당으로 이어졌고, 총파업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던 권영길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국민승리21은 1997년 대선에서 1.2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1999년 11월 15일 정당 해산 신청을 하고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전환한다.)

2000년에 공식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결의와 지원을 통해 건설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대표적 산물이다. 창당 이후 민주노동당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노동자운동 탄압, 이라크 파병 등을 비판하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투쟁했다. 그 과정에서 성장을 거듭하여 창당 4년만인 2004년 총선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2004년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은 후퇴를 거듭했다.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2000년 즈음은 민중운동이 사회 변혁을 위한 전략을 분명히 설정하지 못하던 시점이었다. IMF 외환위기를 경과하며 민중운동은 김대중 정권의 극심한 탄압에 휘둘리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전략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위기도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회 변혁을 만들어갈 것인지에 관한 합의는 불분명한 채로 노동자운동의 역량은 지속적으로 민주노동당 건설과 성장에 집중되었다.
 
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

결과적으로 노동자운동의 분열은 심화되었고, 민주노동당의 변혁적·사회운동적 지향은 퇴색했다. 2004년 원내 진출 이후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사회운동 활성화나 조합원들을 정치적 주체로 세우려는 노력보단 ‘실행 가능한 정책 대안’ 마련과 입법 활동에 주력하고, 노회찬·심상정 등 스타 정치인에 대한 의존이 심해졌다. 민주노동당은 원내정당 지향을 강화하며 민주노총 상층부와의 정치협상을 통한 지원 획득에 몰두해야 했다. 배타적 지지 방침은 선거 시기 인적·물적 동원으로 대체됐다. 심지어 당 안에선 “민주노총당을 벗어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사회운동적 성격의 축소와 의회 의존성은 결국 당권 장악·권력 독점을 위한 각 정파들의 비민주적 행태와 노선 갈등으로 정면충돌했다. 당권과 지분을 둘러싼 싸움, 지구당 장악을 위한 위장전입, 기관지 ‘진보정치’ 사태, 북한 핵실험에 대한 입장차 등을 둘러싸고 심각한 수위의 갈등이 표면화됐다. 그리고 2007년 대선 슬로건 ‘코리아연방공화국’을 둘러싼 노선 갈등과 ‘일심회 사건’을 통해 폭발했다.

당내 정파 간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 민주노동당은 2008년 초 평등파들이 대거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들면서 분열했다. 정파연합의 붕괴는 민주노총 내부 갈등으로 이어졌다. 급작스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 운동의 토대는 강화되지 못했다.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치이념은 후퇴하고, 대중운동과 연대의 확장성은 잃어갔다.
 
 

분당 이후 분열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진보신당 간 경쟁은 선거주의·의회주의 경향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11년 12월, 민주노동당(이정희)과 국민참여당(유시민), 진보신당의 탈당파인 새진보통합연대(노회찬·심상정)는 ‘반MB 야권연대’를 외치며 통합진보당을 창당한다.

이후 민주노총은 2012년 총·대선 전 반MB 야권연대를 겨냥한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 계획을 제출하지만, 내부의 갈등만 확인한 채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비정규직 양산, FTA 등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민중의 삶을 파탄으로 내몬 노무현 정부의 한 축을 담당했던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은 민중운동 진영 내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총의 많은 현장 활동가들도 격렬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이를 묵인·방조함으로써 정치세력화의 원칙을 훼손시킨다. 결국 이념과 노선이 다른 세력 간의 동상이몽 통합은 비례대표 경선 부정선거와 폭력사태라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폭발했다. 이로써 민중운동 전체를 조롱거리로 만든 채,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은 파산한다. 지금의 진보정당의 난립과 노조 운동의 위기라는 복잡한 상황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기에 민주노동당에서부터 통합진보당 사태로 드러난 진보정당 운동의 실패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총체적인 진단과 성찰을 필요로 한다. 더욱이 민주노조 운동의 침체를 돌파할 계획과 역량강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진보정당 건설 운동은 앞으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당운동 그 자체에 의해서만 한국 사회를 전환시킬 계기가 도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나간 역사와 과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건너뛴 채로 모든 논점을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만으로 환원하는 것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급변하는 정세

지난 겨울 민중운동은 연인원 천만을 훌쩍 넘긴 박근혜 퇴진 촛불과 함께 투쟁했다. 2월 말까지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과 기각 대결로 치닫던 정세는 이재용 구속 등 쟁점이 정리되면서 본격적인 대선 국면으로 옮겨가고 있다. 대권 주자들은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속도를 높이고 있다.

총체적 난국에 빠진 한국사회의 개조를 외쳐온 촛불 민심이 ‘反박근혜-정권교체’라는 모호한 합의로 끝날 경우, ‘적폐 청산’의 방향과 내용을 둘러싼 쟁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힘 있는 자의 편에 서왔던 검찰과 보수언론, 갑질 일삼는 재벌의 정경유착과 청부입법, 지배 엘리트들의 망언, ‘흙수저’ 청년을 절망하게 만든 부와 권력의 대물림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박근혜 정권 내내 ‘무능 야당’이던 민주당이 집권 후 경제 침체와 민생고를 해결하지 못하고 촛불 민심을 적당히 잠재우기 위한 타협을 시도할 경우, 민심은 이반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기 위한 투쟁과 더불어, 본래적 의미의 정치세력화 운동을 새로이 시작해야하는 이유다.
 

다시 시작하기 위한 조건들

혼돈 속에서 단결의 계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신자유주의 지배연합과 신자유주의 위기를 넘어서는 계급적 운동과 평등사회 건설을 향한 싸움의 시작점은 어디인가?

그동안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등 자본의 공격을 막기 위해 싸워왔다. 민중의 보편적 권리를 지키는 정치·사회운동을 벌인 경험과 역사가 있다. 그럼에도 자본권력은 확대되었고,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 간 방어에 급급한 싸움들 속에 위축되어 왔다. 무엇보다 지속되는 경제 침체로 노동자계급 내부 격차는 커지고, 청년·여성·비정규직·임시직 등 노동조합이 없는 ‘무권리’ 노동자들은 늘어났으며, 조직률 역시 5퍼센트 남짓으로 정체해있다. 이를 획기적으로 타파하지 못하면 새로운 도약은 불가능하다. 대중 투쟁과 영향력이 하락하면 진보정당과 노동자운동 사이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것은 민주노총 조합원의 실리주의적 선택(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을 제어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작금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노동자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과거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혁신을 위한 비전을 새로이 만들고, 전면적인 전략 조직화 사업이 정치세력화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여러 갈래로 분열된 진보정당은 사회운동 활성화를 통해 세력 관계의 역전을 꾀하고, 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핵심 목표로 삼아야한다.
 
사진 : 참세상 김용욱

물론 이런 변화에는 조합원들이 정치·사회운동의 주체로 나서는 과정이 병행해야 한다. 전쟁 위협에 맞서는 운동, 노동자운동의 여성주의적 혁신, 경제위기에 대한 불만을 ‘반이민’ 정서와 이주민 혐오로 돌리는 지배계급의 시도를 막는 운동도 중요한 과제다. 이러한 당면한 정치·사회적 모순들에 맞서 공동의 행보를 만들 때, 신자유주의 세력과 단절하고, 야당에 의탁하는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부터 노동자운동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필요성과 방향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역과 현장의 정파 갈등과 대립을 지양하는데 힘을 다 해야 한다. 지난 시기 정치세력화 운동의 수다한 과오들을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성찰하고, 기층의 노동자들과 함께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아가 민중의 권리를 확대하고, 노동자운동에 대한 사회적 승인을 넓혀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조직으로서의 신뢰와 자부심을 만들 수 있고,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운동도 되살아 날 수 있다.

비전과 정체성을 상실해버린 길을 갈 것인가, 힘들고 어렵지만 새로운 길을 갈 것인가. 사회운동의 일대 변화를 간절히 호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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