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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 제31호

사회를 치료하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

서평 :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 - 일하다 죽는 사회에 맞서는 직업병 추적기》

  • 최우식
“혹시 문송면 알아?” 얼마 전 한 선배로부터 7월 2일 ‘문송면 추모제’에서 발언해줄 수 있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글 재주도, 말 재주도 없었고, 문송면이 누군지도 몰랐다. 방학 중 연대 활동을 해보고 싶었던 난 그저 ‘새내기’의 열정으로 문송면 원진레이온 산재노동자 추모제의 추도사를 쓰게 됐다.

문송면은 1988년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수은에 중독되어 15세의 나이로 사망한 청소년 노동자였다. 문송면의 죽음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산업재해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황화탄소중독으로 직업병을 얻은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문송면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들의 직업병을 알리는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결국 원진레이온은 폐업하게 됐고, 고통받는 산재노동자들을 위해 원진재단과 녹색병원이 설립됐다. 이는 여러 제도를 개선하는 계기였고, 노동안전보건운동의 큰 전환점이었다.

물론 대한민국은 여전히 ‘산재 공화국’의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년,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산업재해 사건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LG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감정노동에 시달리다 자살한 현장실습 노동자, 노동절에 일하다가 크레인 충돌 사고를 당한 삼성중공업 하청 노동자,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사망한 집배 노동자, 광운대역에서 연이어 열차사고로 숨진 철도 노동자, 메탄올 실명 노동자 등 셀 수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간의 주목조차 받지 못하는 산업재해가 얼마나 많을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오늘날 노동안전보건운동이 과거의 분투와 성과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송면 추도사를 쓰고 나서, 노동안전보건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왔는지를 자세히 알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추도식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 책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로서 의사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하루에 일정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세요”,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세요”, “스트레스 받지 않게 조심하세요” 등. 하지만 현대 한국인들 중 이런 의사의 조언들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 때문에 스스로 건강한 삶을 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병의 치료가 환자 개인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의료 체계에서는 같은 처방이 내려질 것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조언을 하는 의사들이 있다. 그들은 “일터의 작업환경을 바꿉시다”, “노동조합이 필요합니다” 같은 ‘불온한’ 조언을 한다. 그들은 직업과 질병의 관계를 밝혀내고, 노동자들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고민과 실천을 하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이자 노동안전보건활동가이다.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은 그런 의사들이 한국 산업재해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직업병의 실태를 추적하고, 그 원인인 불안정노동을 고발한다. 책의 저자인 14명의 의사들은 “아프다는 것을 넘어 노동자의 작업장과 현장의 노동조건을 담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관찰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함으로써, 대중들이 질병을 정치적 시각에서 접근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이를 위해 책은 산업재해가 발생한 노동조건과 사업주들의 행태를 고발한다. 나아가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한 노동자들과 의사들의 투쟁, 정부를 대상으로 만들어낸 제도적 이슈도 소개한다. 실제 현장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이 보장하고 있는 내용과 현장에서 어떤 식으로 사업주들이 법의 허점을 피하고 있는지, 의사들의 생생한 현장 경험을 통해 말하고 있다.
 

공공성 잃어버린 병원과 산재은폐

2015년 여름, 청주에 있는 화장품 회사 에버코스에서 한 노동자가 지게차에 치여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사업주는 119구조대 신고를 취소하고, 환자를 회사지정 병원에서 치료받게 하려했다. 산재사고를 은폐하기 위해서다. 불행히도 중상을 입은 노동자는 응급대응이 늦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에버코스는 왜 구급차를 돌려보냈나’, 《오늘보다》 2015년 9월호)

기업 입장에서는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산재보험률이 올라가고 노동부 집중감독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서는 산업재해가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보통 안전에 비용을 투자하는 대신 산업재해를 은폐하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이때 기업과 유착관계인 회사지정병원이 산재은폐에 중심적인 기능을 한다. 사고기록이 남지 않도록 119신고를 하지 않고 지정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경우 산업재해가 아닌 개인적 이유로 다친 것으로 처리한다. 치료비도 개인 건강보험에서 부담하게 한다. 그 후 기업은 약간의 위로금을 환자에게 쥐어주고 일을 무마한다. 응급의료체계가 잘 갖춰졌다 해도 병원의 공공성이 훼손됐을 경우, 자본과 유착해 응급의료체계가 얼마든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에버코스 지게차 사고와 일련의 은폐 시도 사례가 말해주고 있다.

얼마 전 산재은폐를 막기 위해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이 발의됐다. 법안의 주요 내용은 사기업, 공기업, 공공기관 모두의 산재은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피해대상에 노동자 외 일반주민들도 포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의료가 영리를 추구하는 경향을 적극적으로 억제하지는 못한다. 인간을 착취하는 자본의 영역에 의료가 관여되지 못하도록 막는 제도적 장치 역시 마련돼야 할 것이다.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환자

배치 전 건강검진은 취업하기 전에 몸에 이상소견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본래 목적은 소견결과에 따라서 더욱 주의해야할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적합한 업무를 할당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자본은 이를 취업 차별의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직업병이 있는 노동자들이 의기소침해지며 질병의 원인을 개인화 한다.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의 저자들은 장시간 불안정 노동이 행해지고 “안전의무도 버려진 지뢰밭”같은 작업장 속에서 “아픈 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석면공장에 살던 주민과 노동자들을 수소문하고, 삼성의 갖은 방해 공작 속에서 백혈병 환자들을 찾아 작업환경에 대해서 조사해온 저자들은 노동자들이 아픈 이유가 노동환경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노동자들 역시 수동적이고 나약한 피해자가 아닌 작업장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참여자”의 정체성을 갖고 싸워왔다.

사회를 치료하고, ‘병의 원인은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의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자본에 맞서 사회적 권리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 환자들의 역사를 담은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은 노동안전보건운동이 후대의 노동자들을 살리는지를 말하고 있다. 보건의료분야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
 
 
필자 소개

최우식 | 건강한 세상을 위한 연대를 위하여 보건의료학생 매듭에서 활동 중인 늦깎이 의대 편입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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