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특집
  • 2017/08 제31호

‘탈핵’ 문제 앞에 선 노동자운동의 오늘

‘부인’과 ‘선언’ 넘어 에너지 전환의 주체로

  • 구준모
“단결 투쟁”이 쓰인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신고리 5·6호기 건설중단 결사반대” 피켓을 들고 앉아 있는 100여 명의 중년 남성노동자들. 7월 15일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신고리원전 앞에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노동조합의 집회가 진행됐다. 이날 김병기 한수원노조 위원장은 “대정부 투쟁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에너지 노동자들이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반대하는 건 익숙한 모습이다. 2002년 발전, 가스, 철도의 민영화 반대 공동파업부터 최근의 민간 발전소 확대 및 천연가스 시장 개방 저지 활동까지, 그 주된 타깃은 에너지 산업의 민영화·시장화였고, 주체는 민주노조들이었다. 반면 한수원노조의 투쟁은 새로운 현상이다.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에 맞선 투쟁으로, 상대적으로 친기업적인 성향의 노조가 주도한다.
 

문턱을 넘지 못한 민주화

한수원은 우리나라의 핵발전소 전부와 수력발전소 일부를 운용하는 한국전력 자회사로, 공기업이다. 수력을 포함하고, 이름에도 원자력보다 앞에 배치돼 있지만 사실상 99퍼센트의 업무는 핵발전과 관련돼 있다. 핵발전 독점 공기업이자 전문기업인 것이다.

한수원노조는 한전에서 발전 분야가 분할된 2001년 한국노총 전력노조에서 분리·설립됐다. 하지만 민영화 반대 투쟁과 노조 민주화를 통해 민주노총에 가입한 한국발전산업노조(한전의 화력발전 자회사 다섯 곳을 포괄하며, 전국공공운수노조 소속)와 달리,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에 가입하지 않은 기업별 노조로 남았다. 한수원노조 내에서 노조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창립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민주파가 집행부를 맡고 활동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정부들의 원자력산업 육성으로 한수원은 매출액은 물론 조직 규모에서도 성장을 이어왔고, 한수원노조의 활동은 공기업 정책에 대한 방어 투쟁에 집중됐다. 민주파 집행부에서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를 통한 시민사회와의 연대와 에너지전환 관련 토론이 지속됐지만, 현장 단위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세 차례의 민주노총 가입 실패는 이런 한수원 노조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민주파 집행부는 민주노총 가입을 통해 노조 민주화의 한 단계를 뛰어넘으려고 했지만 사측과 정부의 치밀한 대응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최근 사례로, 2015년 5월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가입 투표를 실시했으나 55대 45로 부결됐다.
 

한수원노조 보수화

2016년 3월 한수원노조 선거에서 친기업성향의 김병기 위원장과 윤원석 부위원장이 당선됐다. 그 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한수원노조는 진보적 에너지 정책 토론의 장이자 대시민사회 연대 창구였던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를 탈퇴하고, 한국노총 전력노조와 공공운수노조 탈퇴 사업장들이 주도하는 ‘보수적인’ 에너지정책연대에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한수원노조의 현 상태를 노조 민주화의 실패나 친기업 집행부의 탓으로 모두 돌릴 수는 없다. 민주파 집행부라 가정해도 현장 조합원들의 정서나 사회적 고립감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나, 각종 원전 비리나 원전 사고 은폐 의혹이 있을 때에 민주파 집행부가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돌이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6개월간의 촛불시위와 박근혜 탄핵, 정권 교체라는 격변의 시간을 생각할 때, 민주파 집행부였다면 지금 같이 보수적인 대응에만 머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도 합당하다.
 

멀게만 보였던 문제가 눈앞으로

2000년대에 우리나라 노동조합은 기후변화나 에너지 전환과 같은 새로운 환경 이슈에 맞닥뜨렸다. 하지만 그 이슈들은 대부분 멀리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유엔기후변화협상이나 해외 노동조합들의 대응이 주로 알려졌고, 대안세계화운동의 일환으로 기후변화에 맞선 여러 운동이 소개됐다. 그 결과 2000년대 중반부터는 노동조합 간부들이 매년 12월에 열리는 기후변화협상당사국총회와 집회에 참가했다. 민주노총이나 공공운수노조 등 산별노조들도 기후변화에 대한 대안으로, ‘친환경 재생에너지로의 정의로운 전환’을 수용했다.

2010년 16차 기후변화당사국총회를 앞두고 발표된 ‘COP16 한국 노동조합 공동대응단’의 성명서 “한국 노동조합은 성공적인 기후협상을 요구한다”는 이런 입장을 잘 드러냈다.
우리는 국제 노동조합들이 개발하고 제시하고 있는 ‘정의로운 전환’ 전략을 지지하며, 기후변화와 대응 정책에 의해서 발생할 수 있는 고용의 변화 등에서 노동자,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노동자들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한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입장은 선언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것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노동 배제적인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노동조합의 입장이 전달되고 토론될 통로가 없었다. 에너지 정책이 친기업적인 일부 전문가들과 관료들의 손아귀에 놓여있을 때, 노동조합의 대응은 정책이 발표된 후에 이를 두고 다투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 정부는 원자력과 석탄화력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유지했다.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을 경제정책의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으나, 에너지 전환과 재생에너지 육성에 있어서 어떤 성과도 내놓지 못했고,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한국은 재생에너지 이용 비중이 1퍼센트 수준으로 세계 최하위다. 따라서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의 노동조합에게 에너지 전환은 먼 외국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셋째, 민영화·시장화와 노조 탄압으로 에너지 전환은 현안 투쟁의 뒤로 밀렸다. 김대중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일관되게 에너지 산업의 민영화와 시장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보수 정권들은 공기업 노조를 ‘악’으로 규정하고 탄압해왔다. 이런 투쟁에 노조의 생존이 걸려있어, 모든 사업의 최우선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물결이 바뀌었다. 문재인 정부는 탈핵과 탈석탄을 국정 과제로 삼고 있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 매우 높다. 세계적인 추세, 정권의 의지, 시민들의 압력 측면에서 에너지 전환이 눈앞의 과제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에너지 시스템 재편과 노동조합

노동운동은 탈핵과 탈석탄이라는 에너지 전환의 시대를 능동적으로 개척해나가야 한다. 6월 19일과 7월 26일 공공운수노조와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는 ‘공공적이고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시장이 아니라 공적 기관이 주도하는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주도해 새로운 입장을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신고리 5·6호기에 한정되지 않는, 전체 에너지 시스템의 개혁을 위한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사실 지금과 같은 산업구조 속에서 한수원 노동자들의 반발은 구조적으로 조장된 측면이 있다. 핵발전 부문의 사업이 99퍼센트인 기업의 노동자들에게, 핵발전 사업의 축소는 자신들의 생존권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는 최근 화력발전 5개사와 원자력발전 1개사로 나뉜, 한전의 발전자회사 6개를 지역별 3개로 재편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민영화와 강제적인 경쟁을 위해 괴상하게 나뉜 현재의 발전공기업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편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한 발전공기업 내부에서도 석탄, 화력, 천연가스 간에 에너지 전환과 인력 전환이 가능하게 된다. 나아가 재편된 발전공기업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최우선의 사업목표로 해야 하고, 사업 운영과 감시의 측면에서도 지역사회, 시민들과 노동조합이 참여할 수 있게 변화해야 할 것이다. 공기업의 녹색화와 민주화가 필요하다.

물론 이는 필요한 개혁의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우리사회의 에너지 시스템은 단순히 기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탈핵을 둘러싼 그동안의 시민사회와 지역 주민들의 활동과 최근의 갈등으로도 드러나듯, 작은 에너지 전환에도 큰 이해관계가 개입되고 당사자들의 갈등이 동반된다. 이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 많은 토론과 갈등 속에서만 거대한 전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이제 부인을 극복하고, 선언도 넘어서서, 이러한 전환의 주체로서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
 
덧붙이는 말

7월 26일,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와 전국공공운수노조는 언론이 “선정적인 기사와 화면으로 극단의 분열을 증폭시키고 있다”며, 그 중 누구도 올바른 대안 없이 단편적인 자기 이해관계만 내세우고 있는 것에 대해 유감을 밝혔다. 또, “에너지 전환에 동의하는 한국수력원자력 노동자들을 비롯해 원자력 발전 유관기관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묻히고 있다”며,  “원전 이권 및 공생 세력과 원전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덧붙여, “거대한 전환에는 이해관계자들의 수많은 갈등과 분쟁이 따를 수밖에 없다"며, 그 전환은 시민의 안전과 행복, 공공성이라는 정의의 기준이 작동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에너지 전환 정책에 동의하며,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의 길에 앞장설 것”이라고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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