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여는글
  • 2017/08 제31호

서퍼가 되자

  • 홍명교
8월호 편집이 한창인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재벌들과의 청와대 만찬에 한창이다. ‘시나리오도 제한도 없이’ 진행하는 ‘격식 파괴’ 만찬이라고 한다. 대체 어떤 격식을 파괴한 걸까? 밤샘 야자라도 하는 걸까? 시진핑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양꼬치앤칭따오?

지금껏 한국에서 대통령과 재벌 간의 격식이란 무엇이었나. 겉으로는 ‘경제 성장’을 독려하고 나라 경제를 이끄는 장군처럼 떠받들었지만, 실상 뒤에선 돈과 권력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노동자 때려잡는 일은 적극 지원하고, 세금 떼먹고 불법 세습하는 일은 눈감아줬다. 재벌들은 선거 때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공물을 갖다 바쳤고, 이보다 수배의 이익을 챙겼다. 재벌에겐 아낌없이 주고, 노동권은 거침없이 축소하는 친재벌 정책 덕분이었다.

지난겨울 촛불을 생각한다. 본 집회가 끝나면 행진을 시작했다. 《오늘보다》 편집진들도 행진 코스 중 한 곳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가장 많이 외쳤던 구호는 “재벌 총수 처벌하라!” “이재용을 구속하라!”였다. 트럭 뒤를 따르는 수만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함께 외쳤다. 단순히 박근혜 최순실쯤 끌어내린다고 해서 헬조선 한국 사회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게다.

촛불은 대통령도 끌어냈고, 삼성 이재용도 구속시켰으며, 정권을 교체시키고, 진보정당 후보에겐 최대의 득표를 안겨줬다. 겨우내 울린 ‘최저임금 만원’ 구호는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만들었고,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보이지 않는 변화의 물결은 좌파의 미진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일기 시작했다. 이 물결에 올라타느냐, 혹은 종잡을 수 없는 파도에 쓰러져 떠밀려 가느냐가 오늘날 사회운동의 처지일 게다.

한데 촛불의 성취가 아득히 먼 옛날얘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얼마 전 청와대는 “8.15 특별 사면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 촛불보다 1년 일찍 광장에 섰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다. 그는 ‘재벌이 만든 노동자 지옥을 바꾸자’며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1년 먼저 거리로 나서자고 한 것밖에 없다.

청와대가 “스킨십과 친밀감을 가지고 아주 솔직하게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겠다”며 초대한 이들은 삼성전자, LG, SK, 신세계, 현대차, KT, 대한항공, 두산 등 굴지의 재벌 총수들이다. 1년 내내 번영과 착취의 뉴스를 선사해주신 그분들이다. 두 달 내내 ‘대통령, 소주 한잔합시다’ 소리친 삼성전자서비스 하청 기사들 대신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난단다. 수년째 현대차의 부품사 노조 죽이기에 맞서 투쟁한 유성기업 노동자들 대신 현대차 3대 세습한 정의선을 만난단다. 촛불이 하지 않은 용서를 대통령은 이미 해버린 걸까? 여전히 청와대와 재벌들의 관계 사이엔 룰이 있어 보인다. 자본과 민중 사이의 힘 관계에서 적당한 타협점 찾기. 스타일은 달라도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감옥에서 한상균은 “노조 가입률 30퍼센트의 시대를 열자”는 편지를 썼다. 지금은 노동조합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도, 전체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말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결에 올라탈 것인가, ‘만찬’에서 남은 떡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영영 혁신의 길을 회피할 것인가. 사회운동의 힘을 모으고 미래를 치밀하게 준비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파도는 더 험난할 수밖에 없다. 지금 파도가 온다. 우리 모두 서퍼가 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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