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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 제25호

공순이들의 반란

19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

  • 김진영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삽화: 최설
 

청계노조, ‘공순이’들의 첫 승리

1970년대, 한국 의류산업의 중심지 동대문 평화시장·동화시장·통일상가. 이곳에는 도합 860개의 공장에서 2만 6800명이 일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노동자는 여성이었으며 절반은 18세 미만이었다.1) 농촌에서 태어나 “가시나 키워서 뭐하게. 죽일 수는 없으니 그냥 윗목에 내버려 둬” 같은 말을 들으며 자라난 소녀들이었다. 폐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리며 하루에 15~16시간씩 일하는 이들은 집안을 먹여 살리는 ‘효녀’, 나라를 먹여 살리는 ‘수출역군’이었지만, 보통은 ‘공순이’로 통했다. 

1975년의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오전 내내 허리 한번 못 펴고 와이셔츠를 만들던 이 미싱사들이 식사를 2~3분 만에 급하게 먹고 어디론가 뛰쳐나갔다. 도착한 곳은 와이셔츠 회사 ‘광진복장’의 평화시장 1층 점포와 동화시장 5층 공장이었다. 그 앞에서 미싱사들은 “광진복장 사장 ○○○은 퇴직금을 지급하라”2), “근로기준법 지켜라”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노래도 불렀다. 비좁은 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1시 50분이 되자 노동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공장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점심시간 한 시간 동안의 움직임. 이것이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지 보름 후 결성된 ‘청계노조’ 조합원들의 본격적인 첫 싸움이었다.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를 거치며 이 땅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민주적 노동조합 운동이 재개됐다.

퇴근 후 미싱사들은 자신들에게 처음으로 세상을 알려준 노동교실에 모여서 하루의 경과를 논의했다. 매일 시위가 이어지자 함께 하는 사람의 수도 갈수록 늘어났다. 다니는 공장의 노동자 수가 30명이 안 되어 어차피 퇴직금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한 마음으로 동참했다. 결국 사장은 두 손을 들었고, 퇴직금을 지불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미싱사가 내던 시다(견습공)의 임금을 사장이 직접 내게 되었다. 전해인 1974년 44.6퍼센트라는 엄청난 물가상승을 기록했음에도 꿈쩍하지 않던 월급이 대폭 오르게 되는 투쟁의 시작이었다. 

가장 짜릿한 것은 승리 그 자체였다. 이 승리는 ‘여공’들 개개인의 인생에서도 첫 승리였다. “일은 시키는 대로 월급은 주는 대로”란 표어에 불만조차 가지지 못하던 공순이들은 스스로를 당당한 노동자로 느끼게 되었다. 함께 한 동료들과 청계노조, 전태일은 자랑스럽고 고마운 동지로 마음 깊이 남았다. 
 

동일방직, 여성들이 이끈 민주노조

동일방직 여공들의 모습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1976년 ‘나체시위’, 1978년 ‘똥물세례’ 등의 사건들로 유명하다. 그러나 사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여성노동자운동이 정권과 어용노조(한국노총)의 집중적인 탄압 대상이 될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고, 탄압에 끝까지 맞서 싸웠다는 사실이다. 동일방직 노조는 그야말로 여성들이 세운 민주노조였다.  

동일방직 노조는 원래 남자 지부장들이 조합원들이 낸 조합비와 회사가 준 뒷돈을 마음대로 쓰고 다니는 어용노조였다. 그러나 1972년, 지부장 후보들 중 유일한 여성후보자였던 주길자는 큰 표 차로 한국 최초의 여성 노조 위원장이 된다. 아무리 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이어도 노조 간부는 남성들이 독차지하던 분위기를 깨기 위한 노력이 뒷받침한 결과였다. 

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가 처음 선교 및 다양한 교육을 위해 동일방직을 방문했을 때, 회사는 덕분에 여성노동자들의 분위기가 밝아지고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자리들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직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소모임 교육으로 노동조합, 노동법, 노동자운동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여성노동자들은 결국 지금의 노조는 자신들을 대표하지 않는 노조이기 때문에 직접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조를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먼저 대의원이 되기 위해 대의원선거를 열심히 준비했다. 그렇게 상당수가 대의원이 된 뒤 지부장선거에서 첫 여성지부장을 만들고 상집위원들도 전부 여성들로 세웠다. 여성들이 구성한 노조는 이전의 노조와는 완전히 달랐다. 조합원의 85퍼센트를 차지하는 여성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모으고, 노동자를 위해 활동하는 진짜 노동조합이 되었다. 원풍모방, YH무역, 해태제과 등 이 당시의 주요 민주노조들은 모두 이와 같이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에 서서 운영하는 노조였다.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다

기본적인 노동권 확보, 노동조건 개선을 넘어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특수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여성노동자에게 필요한 권리들을 적극적으로 쟁취한 민주노조의 사례로 콘트롤데이타와 삼성제약 노동조합이 있다. 

콘트롤데이타의 생산직 노동자는 모두 여성이었고 노조 역시 운영위원, 대의원, 조합원 전부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73년 결성 직후 임금 인상, 상여금 획득뿐 아니라 생리휴가 문제를 해결했다. 그전까지는 생리휴가를 쓰려면 보건실에 가서 증명을 받아와야 했고 그렇게 하더라도 허가하고 말고는 회사 마음대로였다. 노조가 단체협약에 생리휴가를 무급휴가로 명시하자 조합원들이 자유롭게 생리휴가를 사용하는 것이 정착되었다.

노조 설립 후 임금수준과 노동조건이 나아지자 여성노동자들이 결혼 후에도 계속 일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탁아 비용보다 여성노동자의 임금이 커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 결혼퇴직이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1977년 한 대의원이 결혼 후에도 계속 다니고 싶다고 노조에 요청하자, 결혼 퇴직 철폐 투쟁을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노조는 여기에 더해 결혼, 임신 후 직장 생활을 창피하게 여기는 조합원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결혼, 임신 후 직장 계속 다니기 운동’을 벌이며 교육을 열심히 진행했다. 이는 여성노동자 개인의 인생에 중요할 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여성으로 구성된 노조의 유지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투쟁들을 거치며 노동자들은 서류를 작성할 때 직업란에 ‘공순이’라고 적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삼성제약 노조 역시 여성 중심 조직이었다. 산전·산후휴가와 수유시간, 생리휴가 사용을 확보하고 결혼퇴직제를 철폐했다.3) 그럼에도 임신 6~7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사직하는 일이 계속되자, 전 노조위원장이 임신 상태에서 스스로 조기퇴직 관행을 깨는 모범을 만들었다. 고참 여성노동자가 임신해도 퇴사하지 않고 출산휴가와 수유시간을 적극 활용하자, 결혼이나 출산을 이유로 퇴직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현장에서 회초리를 들고 돌아다닐 정도로 권위적인 남성 관리자들의 태도와 성차별적인 언사,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성희롱·성폭력에도 저항하였다. 노조에서는 현장에서 즉각 항의하기도 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조합원들에게 지속적으로 교육했다. 남성 관리자가 여성노동자의 뺨을 때리자 노조는 즉각 해고와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다시는 반말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을 하였다. 그 후부터 이러한 일들이 없어졌으며, 노조에서는 지속적으로 관리자 교육을 강조했다. 한국 사회에서 고용주가 성희롱 예방교육을 해야 하고, 성희롱 가해자를 징계하지 않으면 국가의 처벌을 받게 된다는 법률이 통과된 것은 1998년이었다. 삼성제약 노동자들은 시대를 앞선 요구를 쟁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 당시 사회 어디에도 없었던 여성의 권리들을 여성 스스로의 단결로 실현시킨 것이었다. 여성노동자의 노동권을 지켜냈고, 특히 임신·출산에 구애받지 않는 실질적인 평생노동권을 최초로 획득했다.
 

2017년 오늘

도심의 광장은 연인원 천만의 촛불로 가득 찼다.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우리는 1980년 남성임금의 44.5퍼센트를 받았던 여성노동자가 지금도 60퍼센트밖에 받지 못하는, OECD에서 임금격차가 제일 큰 나라(OECD 평균은 85퍼센트)에 살고 있다. 임신·출산으로 인해 여성 고용률이 뚜렷한 M자 곡선을 그리는 나라, 여성의 60퍼센트가 비정규직인 나라, 장시간 노동이 세계 1위를 다투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남성노동자 역시 먹고 살기가 너무나 힘든 사회라는 사실은, 오히려 실체가 불분명한 ‘역차별’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분노와 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수렴되고 있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연속성 있게 이어져 내려오지 못한 데는 1980년대 들어 여성노동력을 활용한 경공업 부문이 쇠퇴하고 중화학 공업이 크게 성장하는 등 여러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경험은 지금 우리에게 확실한 시사점을 준다. 그것은 바로 여성노동자 자신의 힘으로 여성노동자의 삶을 속속들이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군사독재 정권이 여성들의 민주노조를 그토록 두려워해 억압하려 했듯이, 그러다 결국 ‘생존권 보장’을 외치던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유신체제의 끝을 열었듯이, 여성들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일터에서 모여서 함께 무언가를 외칠 수 있을까? 다시 고요한 점심시간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 광장의 촛불을 일상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미래는 오로지 우리의 손에 달렸다. ●
 
1) 이 수치는 1970년 노동청이 발표한 ‘공장 428개, 노동자 7600명’이란 수치가 현실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던 전태일이 직접 조사하여 얻은 수치이다.
2) 1975년 당시 근로기준법은 노동자 30명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되었는데, 광진복장은 30명이 넘었지만 이를 알고 퇴직금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을 주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3) 삼성제약노조는 모성보호조항(생리휴가, 산전산후휴가, 임신 시 경미한 노동으로 전환, 수유시간, 결혼시 특별휴가)들을 단체협약에 넣었고 체결 당시에는 기혼 여성노동자가 없었기 때문에 ‘설마 애 낳고도 다니겠냐’고 생각하였던 회사 측은 이를 수용했다. 덕분에 그 이후로 기혼여성, 특히 아이가 있는 여성들이 직장 생활을 하기 좋게 되었다.
추천도서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현실과 거기에 맞서 만든 빛나는 시간들, 그리고 운동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던 이들의 삶의 궤적을 짧은 글 안에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읽은 글들을 함께 읽어보실 것을 적극 추천한다. 일터를 바꾸고 여성의 권리를 세우는 길을 고민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역사들,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이다.  
《열세살 여공의 삶》, 신순애, 한겨레 출판, 2014
《나, 여성노동자 1》, 유경순 엮음, 그린비, 2011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전순옥, 한겨레신문사, 2004
《청계, 내 청춘》, 안재성, 돌베개, 2007
《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 1》, 이옥지, 한울, 2001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 황선금, 실천문학사, 2016
《공장과 신화》, 이영재, 학민사, 2016
《한국여성노동자운동, 그 길찾기 ① :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 평가를 중심으로》, 문설희, 사회진보연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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