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X정치
- 2016/12 제23호
두 여성이 고통스러운 세상과 싸우는 법
영화 <비밀은 없다> 리뷰
마침내 퍼즐이 맞춰진다. 연홍이 고통스럽게 맞추어 온 이 퍼즐의 끝은 딸아이의 은밀한 아지트에서 맞춰진다. 그곳엔 짐승 같은 남편의 모습이 있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연홍은 오열한다. 그러나 이내 다시 일어서서 걸어간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비밀은 없다>는 어느 호화로운 주택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연홍의 남편 종찬은 앵커를 거쳐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첫 선거를 앞두고 있다. 유세 첫 날, 연홍은 해가 밝기도 전에 선거 캠프를 위한 김밥을 손수 만들며 늦게까지 과제를 하고 오겠다는 딸 민진과 짧게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날 밤, 딸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로봇 아내
딸이 사라지기 이전의 연홍은 능숙한 주부이자 아름다운 아내, 말하자면 종찬의 ‘스텝포드 와이프’였다. 스텝포드 와이프는 중산층 마을 스텝포드에 살고 있는 완벽한 아내들, 즉 최고의 내조를 선사하는 동시에 아름다움까지 유지하는 아내들이 사실은 모두 로봇이었다는 기괴한 내용을 그린 영화다.
<비밀은 없다>에서 단 한번 함께 등장하는 모녀의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중학생 딸을 둔 엄마의 얼굴이라기엔 지나치게 젊은 연홍의 얼굴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스텝포드 와이프란 완벽한 ‘내조’에 대한 욕망뿐 아니라 바비인형 같은 외모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이런 아름다운 아내와 이제 갓 정치에 입문하려는 남편이 사라진 딸이라는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또한 남편이 몸담으려 하는 정치판이 얼마나 추악한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지 자세히 보여주는 데도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영화는 딸을 잃은 연홍이 힐러리 같은 영부인을 꿈꾼 “징하게 예쁜” 소녀였던 동시에 “가수한다고 설치”며 밖으로 나돌던, 공부머리가 없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다녔던 소녀이기도 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리고 마치 소녀시절로 돌아간 듯 머리를 풀어헤친 연홍을 사건 해결의 의지를 가진 유일한 인물로 그린다.
그녀는 밤을 꼬박 새워 5만 개가 넘는 딸의 이메일을 모조리 살펴보고, 경찰의 서류를 얻기 위해 자해마저 서슴지 않는다. 붕대를 대충 감싼 손으로 거칠게 운전을 하면서 “생각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 생각하자….”고 히스테릭한 주문을 걸기도 한다. 분명 흔히 보아오던, 딸을 잃어 실의에 빠진 엄마의 모습은 아니다.
복수의 시간
결국 시체로 발견된 딸을 땅에 묻고 돌아온 연홍은 이전의 그녀와 사뭇 다르다. 그녀는 풀어헤쳤던 머리를 다시 질끈 묶고 범인 찾기를 시작한다.
연홍은 죽은 민진의 주변을 맴돌다 마침내 민진의 아지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곳은 민진과 그녀의 하나뿐인 친구 미옥의 숨겨진 세계다. 둘의 내밀한 우정과 사랑을 짐작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연홍은 다시 미옥을 만난다.
이전까지 연홍과 미옥의 만남은 주로 미옥에게 억압적인 공간, 즉 학교(미옥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와 경찰서(미옥은 민진의 죽음에 유력한 용의자다)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입을 꾹 다물었던 미옥은 이제 민진과 자신만의 것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비로소 입을 연다.
미옥의 조력으로 범인이 밝혀진다. 남편 종찬이 대상이 딸인지 모른 채 죽음을 사주했던 것이다. 연홍은 복수에 앞서 다시 한 번 호사스러운 상을 차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수의 시간. 연홍은 제 손으로 종찬의 삶을 끝장낸다. 목숨이 아니라 사회적 삶을, 그를 구성하던 세계를, “어디 한 번 끝까지 살아봐”라는 저주와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은, 연홍이 자신을 구성했던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딸이 사라지기 전까지 연홍의 삶을 지탱한 것은 자신의 꿈과 남편의 꿈에 대한 동일시였다. 종찬을 파멸시키는 것은 바로 그 동일시를 끝장내는 것이다. 피범벅이 된 종찬이 “여보, 나 오늘 (선거) 이겼다”라고 말할 때, 연홍은 마치 짐승처럼 흐느낀다.
평면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
<비밀은 없다>를 모성에 관한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모성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봐도 독특하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를 모성이란 틀로 봤을 때는 어딘가 빗나가는 구석이 있다. 연홍이 민진에게 어떤 엄마였는지 카메라는 보여주지 않는다. 이에 대해 영화는 남편의 세계에 대해서 만큼이나 관심이 없다. 오히려 연홍이라는 인물의 상태, 감정, 행동을 집요하게 묘사하며, 거기에 소녀들의 세계를 문득 문득 겹쳐놓는다. 요컨대 영화의 진정한 관심은 연홍과 민진, 미옥이 관계 맺은 세계다.
이 영화를 ‘상실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본다면 어떨까? 전라도 출생이라는 이유로 언론에 비방 당하는 연홍은 가난해서 왕따를 당하는 미옥과 어딘가 닮았다. 출생지, 가난으로 인한 두 사람의 상처는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혐오와 편견의 다른 모습이다.
핸드폰의 비밀번호 패턴을 푸는 미옥의 손짓은 어딘가 연홍의 히스테리를 닮았다. 두 사람의 상실은 애도로 안착하지 못하고 지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자 비틀대며 걸어온 끝에 미옥은 자신을 짓누르던 진실을 연홍과 나눈다.
연홍은 진실과 슬픔을 공유하면서 온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 둘은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했으나 언제나 선하지만은 않았고, 잘못을 저질렀으며, 어리석기도 했다. 부재하는 딸 대신 미옥을 끌어안으며 “엄마야 민진아. 괜찮아”라고 말한다. 이는 죽은 딸에게 보내는 무력한 작별 인사이고, 동시에 혐오와 편견을 건너 여기까지 온 자신과 미옥을 위로하는 말이기도 하다.
<비밀은 없다>는 여성의 위치를 전복시키고, 평면적으로 그려졌던 여성을 보다 다층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가족 이데올로기 안에서 ‘아내-딸-남편’으로 구성된 트라이앵글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온 연홍은 그것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또한 연홍을 포함한 영화 속 여성들은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개의치 않고 세상에 주저 없이 부딪힌다. 이는 혐오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에게 흥분을 주기도, 씁쓸한 뒷맛을 주기도 한다.
애도의 시작
영화가 복수의 순간 대신 위로로 끝을 맺는 건 이제 비로소 애도가 가능한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상실한 이에 대한 애도를 지연시켜 온 연홍과 미옥은 서로를 위로한다. 민진의 유품과 함께 남은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응시하는 것도 연홍과 미옥의 몫으로 남았다.
아마도 둘은 그 조각들을 애써 주워 담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똑바로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영화가 끝나고 다시 이 세계를 살아가야 할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우리의 전망, 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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