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여성운동12장면
  • 2016/10 제21호

러시아 혁명과 콜론타이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새로운 사회와 가족제도의 변혁

  • 문설희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노조페미니즘팀

편지1: 남편과 아들의 곁을 떠나며

1899년, 고향을 떠나는 러시아 열차 안. 콜론타이는 매 역마다 열차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자신을 떠나보낸 남편의 고통이 상상되고, 5살 난 아들의 조그맣고 따뜻한 손이 자꾸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차에서 내리는 대신 그녀는 두 통의 편지를 쓴다. 하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다른 하나는 그녀의 절친한 친구 조야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편지에는 아마 이런 이야기가 담겨있었을 것이다.

“3년 전이었어. 나르바의 직물 공장 엔지니어를 만나는 남편의 일정에 동행했지. 그곳엔 커다란 기계와 뒤섞여 직공들의 침대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음침한 구석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조그만 아이… 맙소사! 내 아들 또래의 그 아이는 조용히 죽어있었던 거야. 공장의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아이를 치우며,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고 하더군! 사랑하는 조, 아이를 잃고도 일을 해야 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삶은 어찌나 절박한지! 그곳에서의 전율, 그 악취! 그날의 모습은 결코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어. 결국 나는 떠나기로 결심한 거야.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싸움 속으로.”
 
열차 안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콜론타이. (그림: 최설)
 

사회변혁과 여성해방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레닌과 더불어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이자, 혁명 정부 초기의 여성정책, 특히 모성보호와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위한 제도와 기구를 만드는 데에 주력했던 여성 혁명가다. 콜론타이는 여성의 권리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러시아 혁명이라는 공간에서 검증하고자 했다. 사회변혁과 여성해방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간 그녀의 실천은 프랑스 혁명기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과 투표권 쟁취 요구로 대표되는 1세대 페미니즘 운동 사이의 간극을 채우고 한계를 극복하는 실험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 학위를 받을 권리를 위한 투쟁, 동일한 노동에 동일한 임금을 받을 권리를 위한 투쟁이 평등을 위한 투쟁의 전부가 아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가족형태라는 무거운 사슬을 벗어 던져야 한다. 여성에게 있어서 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독립을 얻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1909)
 
콜론타이는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이 ‘여성 불평등의 외형적 형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발생시키는 원인’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투표권 등 남성이 독점해온 정치·경제적 권리를 여성에게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1세대 페미니즘 운동의 한계를 비판했다. 대신 “여성들은 새로운 사회관계 및 생산관계에 맞춰 조직되는 세계에서만 진정 자유롭고 평등해질 수 있다”며 ‘가족의 변혁’을 여성운동의 주요한 과제로 제시했다. 이제까지 가족 내 여성의 의무로 여겨졌던 육아와 재생산 노동의 기능이 사회적으로 수행되는,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에서 여성은 비로소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남성과 다른 여성의 고유한 권리, 즉 아이를 낳아 안전하게 기를 권리(모성권)와 그것을 행사하지 않을 권리(독신의 권리)라는 독창적 개념이 형성된다. 콜론타이가 제시한 여성의 권리는 기존의 남성적 권리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차원이 아닌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단절되고 주변화되었던 여성권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러시아 혁명과 가족의 변혁

여성해방과 가족변혁에 대한 콜론타이의 사상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만났다. 콜론타이는 후생성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여성정책을 주도했다. 1918년 혁명 정부는 가족법을 제정하여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법적 신분, 남편과 아내 성의 조합이나 아내의 성 역시 가족의 성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이혼의 자유 등을 보장하고, 1919년에는 제노텔이라는 여성 사업 전담기구를 설치한다.

제노텔은 콜론타이가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원했던 기구로, 모성과 유아 보호를 국가적으로 책임지는 작업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주인공이 될 여성들의 단결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제노텔 설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1918년 12월 ‘제1차 전 러시아 여성노동자·농민대회’에 불편한 교통과 날씨, 남편과 아이들 곁을 떠나야 한다는 부담감 등을 떨치고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규모의 여성 대표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어 레닌조차 깜짝 놀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여성의 해방은 여성의 손으로 쟁취된다는 명제를 콜론타이는 100년 전 실천적으로 검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결된 여성의 힘으로 새롭게 건설될 사회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1918년 출간한 <공산주의와 가족>에서 콜론타이는 “여성들이 지원을 찾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노동에서의 그녀의 재능이며, 노동자의 국가가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당연히 맡을 것이므로, 러시아 여성들은 더 이상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과거의 혼인 노예제 대신 동지애 속에서의 굳건한 자유결합, 개별적이고 이기적인 가족 대신에 노동자들의 위대한 보편가족이 발전할 것”이라고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전망했던 것이다.
 

아브람 아르히포프, <세탁부>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콜론타이의 노력은 일부 볼셰비키들에 의해 ‘분리주의적’ 행동으로 오해되었다. 볼셰비키들은 모성수당이나 여성의 노동조건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지만, 숙련·임금·가사·성욕과 관련하여 남녀 간에 존재하는 갈등에는 주목하지 않았으며 여성노동자들을 노동자계급의 ‘후진적’ 부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러시아 혁명을 촉발한 집단은 바로 여성이었다. 1917년 2월 23일, 전쟁으로 인한 생활고에 분노하고 여성의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위해 거리로 나온 여성들의 시위가 러시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콜론타이는 끊임없이 병사 부인과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일의 중요성을 당에 제안했다. 1917년 봄 콜론타이는 세탁부들의 파업을 지도하도록 파견된다. 그림(아브람 아르히포프 <세탁부>)은 사설세탁소에서 극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던 러시아 여성노동자들의 모습이다.

 

 

신여성

한편 콜론타이는 새로운 사회 건설의 주체가 되는 여성상을 ‘신여성’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했다. 신여성은 여성을 예속하는 관습과 체제에 맞서 싸우며, 특히 남성에 대한 심리적 의존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적 자율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남녀관계를 실천한다. 여성의 문제가 비단 경제적 종속에 그치지 않고 심리적, 성적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콜론타이는 날카롭게 파악했던 것이다. 

여성의 경제적 의존 및 가사와 양육에 대한 부담이 사라진 사회에서 남는 문제는 무엇일지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한 콜론타이의 통찰력과 시대를 앞선 고민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신여성의 모습은 콜론타이가 직접 쓴 소설들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녀의 소설 속 여성들은 남성을 매개로 정체성을 인정받으려 하거나 남성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기 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독립적인 삶을 설계하고 연대하는 특징을 보인다.
 

편지2: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

1922년 콜론타이는 젊은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국가라는 공동체가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을 담당할 때, 남녀 노동자가 담당하는 역할과 사회적 유대의 내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당대의 점잖고 엄숙한 혁명가들과 달리 사랑과 성의 문제를 공론화했다. 그녀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성매매나 간음의 형태로 존재하는, 동지애 없는 육체적 관계를 ‘날개 없는 에로스’라 비판하며, 이와 다른 새로운 사회의 사랑으로서 ‘날개달린 에로스’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은 뿌리 깊은 사회적인 감정이다. 사랑은 한 집단에 가치 있는 요소들을 결합하게 해준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새로운 문화의 생산자로서 필수적인 내면적 자질을 획득한다. ‘사랑과 연대’는 부르주아 체제에서 ‘경쟁과 자기애’가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사회의 주축이 될 것이다. 관계에 있어서의 평등, 타인의 권리와 타인의 마음과 영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사랑하는 이의 내적 움직임을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능력(부르주아 문화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이것을 요구한다.) … 인간사회의 문화적, 경제적 기초가 변하면 사랑도 변화할 것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는 젊은 노동자들의 관심이 ‘타락’의 증후는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 명확하게 이해하길 바란다.” -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젊은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1922)
그러나 콜론타이의 원대한 여성해방 프로그램은 안타깝게도 러시아 혁명 초기, 짧은 시기의 실험을 끝으로 중단된다. ‘가족의 변혁 이후 국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새로운 공동체에서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어떻게 재조직될 것인가?’에 대한 합의는 불분명했고, 시대를 앞선 콜론타이의 질문들은 혁명 이후의 혼란, 전쟁과 기근 속에서 표류하다가 결국 스탈린 집권 이후 망각되고 말았다.

독창적이고 실천적이었던 콜론타이의 상상력과 담대함은 어쩌면 여성혐오라는 현상이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 절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암울한 미래가 주는 좌절감을 혐오라는 감정으로 발산하는 퇴행이 아닌, 그리고 그러한 퇴행에 대한 적대감의 확산 또한 아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상상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콜론타이는 새로운 사회가 다만 몇 가지 정책을 추가하거나 기존의 권리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차원이 아니라, 변혁을 통해 가족과 남녀관계가 재구성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00년 전 부쳐진 그녀의 편지에 대한 답신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 여성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이들의 몫이 될 것이다. ● 
 

기획연재 : 여성운동 열두 장면

 

오늘 우리에게 페미니즘이 갖는 의미를 찾기 위해 12회의 기획연재를 통해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려 합니다.
 
[세계]
혁명을 여성 앞에서 멈추지 마라 :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투적 여성참정권 운동 : 1세대 페미니즘
새로운 사회에서의 가족과 사랑 : 러시아 혁명의 실험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일 수 있나 : 2세대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여성들
단일한 여성은 없다 : 페미니즘의 분화와 반격
 
[한국]
공순이들의 반란: 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
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주류화를 꾀하다 : 젠더주류화 전략
대학가를 휩쓴 영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
IMF 구조조정, 여성을 겨누다
성매매 특별법과 성노동자 운동
오늘날 여성 억압과 대안 찾기
 
덧붙이는 말

콜론타이의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공산주의와 가족> <날개 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의 번역본 전문은 《오늘보다》 홈페이지 해당 기사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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