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여성
- 2016/09 제20호
"말 대신 행동!"
영국의 전투적 여성 참정권 운동
투표권 중심, 1세대 페미니즘
1852년,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잔 드로앵. 망명 후 그녀는 운동을 지속하지 않았지만 역사 속의 페미니즘 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 전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운동가를 이르는 말)’, 바로 여성 투표권 쟁취를 위한 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1세대 페미니즘이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과 미국에서 전개된 여성운동을 일컫는다. 이 운동은 남성과의 평등한 권리를 상징하는 ‘여성 투표권 쟁취’라는 요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의 투표권 운동은 다른 나라와 달리 대단히 전투적이었고 여성들만의 분리주의적 양상을 보였다. 오늘의 이야기는 잔 드로앵이 망명한 영국에서 시작한다.
영국의 서프러제트 운동
영화 <서프러제트>에 등장한 여성 투표권 운동의 리더 에멀린 팽크허스트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 실비아 팽크허스트, 아델라 팽크허스트는 처음에는 어머니와 함께 여성 투표권 운동을 하지만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에멀린과 첫째 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는 전투적 여성투표권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다. 영국 독립노동당의 여성조직에서 출발한 여성사회정치연합(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에서 활동한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의 페미니즘 운동은 ‘말 대신 행동’이라는 모토에서 알 수 있듯 전투적이고 급진적이었다.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을 깨거나 우체통을 폭파하는 등 폭력적인 전술을 채택했고, 이를 통해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것을 촉구했다. 물론 사람에 대한 폭력은 기피하였다. 수차례의 구속과 투옥 후 단식투쟁이 이어졌고, 정부는 단식하는 이들에게 강제 급식을 했다.
뿐만 아니라 서프러제트들은 시위 중에 경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호신술로 주짓수를 배우며 조직적 훈련을 하고, 보디가드를 꾸려 에멀린 팽크허스트 같은 대표자를 보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격렬한 집회가 있을 때면, 경찰과의 충돌로부터 집회 참가자를 지키기 위해 ‘사수대’를 꾸리고 훈련을 했던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운동은 1913년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마대회에 뛰어든 에밀리 데이비슨의 사망으로 정점에 이른다. 수많은 여성들이 흰 옷을 입고 그녀를 추모하는 꽃을 들고 런던 중심가에서 열린 데이비슨의 장례식에 참여해 행진했다.
두드러진 전투성
유독 영국에서 전투적 운동 양상이 나타났던 이유는 뭘까? 영국에서의 투표권 운동이 유난히 고립되었던 현실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투표권 쟁취가 쉽지는 않았어도 자유주의적 정치가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스웨덴이나 핀란드와 달리 영국은 자유주의적 정치인들조차 여성투표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당대의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아일랜드 민족해방운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점도 영국에서 전투적 전술이 나타난 배경이었다. 이처럼 극단적이고 전투적인 전술은 단순히 선전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게 아니라, 정치적 좌절이 계속되면서 탄생한 것이었다.
반면,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둘째 딸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차츰 다른 행보를 보였다. 사회주의자인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엄마와 언니의 방향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투표권 운동에서 여성노동자계급의 문제를 함께 고민한다. 그녀는 여성사회정치연합의 지부인 이스트런던 투표권연맹을 통해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전쟁의 발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멀린 과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는 그동안 벌인 전투적인 활동들을 즉각 중단했다. 그들은 전쟁에 찬성하고 전쟁 기금을 모았다. 이미 전쟁 직전에 일어난 파업의 물결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등 노동운동과의 결별을 통해 그들의 이 같은 행보가 예견되긴 했으나, 전쟁은 그들의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주었다. 그들은 재산에 따른 투표권 제한을 지지하며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했고, 노동계급과의 어떠한 관계도 원하지 않았다. 이후 팽크허스트 모녀는 전쟁이 끝날 무렵 여성당을 조직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고, 노동자 투쟁을 반대하는 흐름에 적극 가담하면서 보수당에 입당해 선거에 나가는 등 점차 우익적인 모습으로 변모했다.
반면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이스트런던 투표권연맹을 통해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고, 전쟁 시기에는 노동자계급의 여성들을 돕기 위해 작업장에 탁아소를 세우거나 식량을 공급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실비아 뿐 아니라 막내딸 아델라도 엄마와 큰 언니의 전쟁 지지에 반발하며 반전운동을 펼치고 여성노동자와의 연대에 적극 나선다. 안타깝게도 아델라는 이후 파시스트가 되어 나치를 도운 죄로 수감이 되는 등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지만, 전쟁에 반대하고 노동자계급 여성들과 함께 했던, 전쟁에 즈음한 실비아와 아델라의 활동은 고무적이었다.
투표권의 획득
전쟁이 끝난 후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가정폭력, 근친강간, 알콜중독 등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 역시 성병이라는 성적 악덕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여성들이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부부간의 정조, 특히 성매매와 외도를 일삼는 남성들에게 엄격한 규범을 적용해야 한다는 요구를 제출했다. 이 캠페인의 슬로건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남성에게 정조를’이라는 구호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을 겪으면서 여성 투표권 운동의 불꽃은 꺼져가고 있었다. 1918년 영국에서는 30세 이상의 중간계급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부분적 투표권이 주어진다.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에 대한 투표권 보장은 1928년에서야 가능했다.
영국의 여성 투표권 쟁취는 엄밀히 말해 투표권 운동 자체의 성과는 아니었다. 혹자는 서프러제트들의 열렬한 투쟁의 성과라 평가하기도 하고, 혹자는 군수물품 생산 등 전쟁 수행에 기여를 한 여성들에게 보상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스러운 사회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위에서부터의 개혁 조치였다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여성 투표권의 보장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의 기운이 확산되는 세계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침투할 것을 우려하고, 의회 진출 과정에서 여성 당원을 확보하여 세력을 확장하려는 노동당의 정치적 계산속에서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그렇다고 운동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투쟁하는 여성들의 물결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 투표권은 사회의 안정을 위해 보장해주어야만 할 권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여성 투표권 운동은 영국에서 폭발적인 양상을 보이며 페미니즘 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1세대 페미니즘의 한계
그러나 1세대 페미니즘이 최초의 여성운동이었던 것은 아니다. 강렬했던 영국의 여성 투표권 운동으로잔 드로앵과 같은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실천은 사라져갔다. 남성과 다른 여성의 차이가 권리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은 잊히고, 투표권으로 상징되는 남성 시민과 평등할 권리, 동일한 권리만 얘기되었다.
1세대 페미니즘 운동은 사회변혁을 통해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부과된 역할을 거부하고 경제적 독립을 쟁취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독점해온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권리를 그대로 부여받기를 요구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투표권이라는 형식적인 평등을 쟁취했음에도 여전히 실질적인 차별과 억압 속에 놓인 ‘2등 시민’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제 투표권과는 다른 방식으로, 더욱 근본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이 요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