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특집
  • 2015/05 제4호

경비노동자 구 씨의 어제와 오늘

  • 구○○
아주 어렸을 때 전쟁이 터졌다. 그땐 너무 어려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어두운 굴 안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땐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38선 이북이었던 고향은 휴전선 이남으로 바뀌어 있었고, 잿더미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박정희가 여기저기 마을에 영농 사업 벌이고 그럴 때 쯤 중학교에 들어갔다. 1학년 6개월, 2학년도 6개월, 3학년이나마 제대로 다녀 2년 만에 학교를 졸업했다.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집에 돈 벌 사람이 필요했다.

어머니가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부탁해 일자리를 구해줬다. 읍내에 있는 전매서 판매 일이었다. 전매청 담배공장에서 제품이 나오면 지정된 담배 판매소에 주는 게 주로 하는 일이었다. 다들 어려울 때였지만 벌이가 나쁘진 않았다. 회사가 어려워지거나 물량이 줄어들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윗사람과 안 좋은 일이 생겨 관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론 읍내에서 이런저런 일을 찾아 하다가 결국 서울에 가는 쪽으로 맘이 굳혀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밖에 다니지 못한 게 아쉬워 자식들만큼은 제대로 교육시키고 싶기도 했다.

무작정 서울로 왔다. 낡은 집들이 빼곡한 하월곡동 언덕배기 아래에 집을 구했다. 용두동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말이 공장이었지 직원도 얼마 안 되는 마치코바, 구멍가게 같은 곳이었다. 그땐 뭐 다들 힘들게 살았지만 하도 열악해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뻘뻘 났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하다 회사가 문 닫을 지경까지 갔다. 수출이 줄어 쥐꼬리만 한 월급 주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운 좋게도 자리가 나 은행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르겠다. 날 좋게 봤는지. 을지로 한복판에 있는 큰 은행에서 전기나 기계를 만지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를 열심히 일만 했다. 박정희가 총 맞아 죽었을 때도, 전두환이가 쿠데타 일으켜 독재질 할 때도,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데모할 때도, 미모의 여가수 이지연이 바람아 멈추어다오 노래할 때도, 나는 일만 했다. 언젠가 명동 한복판에 사람들이 죄다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가 있었지? 내 주위 사람들도 나가봐야 한다고 뛰쳐나가고 그랬다. 그러나 그때에도 난 가만히 있었다. 사실 큰 관심이 없기도 했고 그런 일을 하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 다니던 직장에도 노동조합이 있었다. 하지만 뚜렷한 행동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윗사람들이 시켜서 가입했지 나랑은 별 상관이 없다고 느꼈다. 창밖에선 대학생들 허구 노동자들이 막 투쟁에 나설 때였지만 거긴 그렇지도 않았다. 썩 나쁜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다 IMF가 왔다. 오십 줄 바라볼 때였는데 떠밀리듯이 일을 그만둬야 했다. 오랫동안 일한 직장이었는데 화가 났다. 하지만 다들 일자리 잃고 그럴 때였으니까.

그래도 난 또 운 좋게 아는 사무실에서 계약직 같은 거로 몇 년을 일했다. 박봉이었지만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었다. 그러다가 들어온 게 대학교 경비 일이다. 옛날에 같이 일했던 친구 얘길 듣고 갔는데 용역업체에서 이틀 만에 면접 보러오라고 연락이 오는 것이었다. 그러곤 면접 본 바로 그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가져오고 준비도 안됐는데 상관없다는 거였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모든 게 이상했다. 위에서 말하면 관둬야 했고 정년도 제멋대로 줄여댔다. 임금도 너무 낮았다. 24시간씩 한 달에 열다섯 번을 일했는데 생활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게다가 관리자들이 너무 노예 부리듯 하니까. 그래도 서비스업에 가까운 은행에서 오래 일해서 나름대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했는데, 이건 뭐 북돋아주기는커녕 더 기를 죽이고 깔아뭉개는 식이었다. 휴게시간 같은 것도 없었고 툭하면 시말서였다. 내가 고작 80만 원 벌라고 이렇게 살아야 되나 싶더라.
그러던 어느 날 같이 경비일 하던 형님이 근무 중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생겼다. 보름 정도 입원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사이 다른 사람을 채워 넣었다. 게다가 산재는커녕 치료비, 퇴직금 같은 것도 없었다. 정말 못 됐다. 저게 내 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찔하더라.

그때 나는 노동조합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용역업체 하는 짓이 괘씸하기도 하고 하루라도 더 일하려면 우릴 지켜줄 수 있는 게 있어야 했다. 친한 사람들한테 얘길 꺼내긴 했지만 다들 꺼리고 움츠리는 눈치였다. 그랬다가 잘리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러다 그해 겨울인가? 미화 쪽에서 노조 만든다는 얘기가 들렸다. 나는 바로 가서 같이 해보자고 했다. 처음 출범식 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멋지더라고. 당당하게 학교 안에서 구호도 외치고, 소리도 질러보고.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뭉치니까 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투쟁했던 것 같다. 평생 멀리하던 투쟁, 원 없이 했지. 그래서 우리 노조가 많은 걸 따냈다. 학생들이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노조라는 게, 민주노조라는 게 우리 같은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들한테는 진짜 꼭 필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마지못해 바깥에 연대도 나가고 집회도 가야하는 게 힘들고 귀찮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이기적인 사람들은 그게 싫다고 민주노조 안하면 안 되냐고 하는데 그래두 민주노총 같은 든든한 빽이 낫지 않겠나 생각한다. 

나는 이제 육십두 지났는데 곧 정년이다. 그만 두더라도 계속 이런 저런 일을 찾아서 살 생각이다. 사람은 일을 해야 정신이 맑아진다고 생각한다. 그게 정말 중요하다. 

요즘 젊은 친구들한테 하고 싶은 말? 글쎄. 내 생각에는 너무 끈기가 없다? 열심히 끈기 있게 해야 하는데 편한 것만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노동조합을 해서 바꾸려는 노력도 안 하고. 한편으론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일자리가 너무 없잖아. 일자리가 생겨야 노조도 만들 거 아닌가. 정부가 잘못됐다. 나라가 썩어도 너무 썩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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