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건강과 사회
  • 2016/05 제16호

김상덕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보편적 의약품 접근권을 위해 싸웠던 故 김상덕

  • 이승운 사회진보연대 보건의료팀·약사

1. 

2001년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에게 글리벡이라는 치료제의 등장은 구세주와 같았을 것이다. 50~60퍼센트의 생존률을 보이는 골수이식만이 완치방법이었던 환자들에게, 먹는 약만으로 90퍼센트 가까운 생존률을 보장할 수 있다는 건 구세주라는 말로도 부족했으리라.

하지만 그 구세주는 환자들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환자들이 자기에게 쉽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 알에 2만 5000원. 하루에 4~8알은 먹어야 하기에 한 달 약값은 적어도 300~600만원! ‘살고 싶으면 돈을 내라!’ 구세주는 돈을 밝혔다.

백혈병 환자들은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한 돈이 누구에게나 있을 리는 없다. 그들은 외쳤다. “사먹을 수 없는 약은 효과적이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환자들은 병실을 박차고 나와 거리로 나섰고 그 선두에 바로 그, 김상덕이 있었다.
 

2.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인 김상덕을 마주하게 되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삐쩍 마르고 윤기 없이 까무잡잡한 피부에 군데군데 흰 반점이 있는 그의 모습. 골수 이식을 받았지만 부작용이 피부로 나타나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건강하지 못해서 피를 토하기도 하고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지만 그는 항상 앞장섰다. 글리벡 제조사인 노바티스 사 항의 방문에도, 국가인권위원회 점거농성에도, 기자회견이든 항의집회든 그는 늘 그곳에 있었다.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응, 괜찮아.”
 

3. 

백혈병 환자들이 글리벡 투쟁의 주축이 되었지만 민중의료연합, 사회진보연대, 정보공유연대 등 사회단체들도 ‘글리벡공공성확대 공동대책위원회’를 통해 함께 했다. 백혈병 환자들은 ‘한국백혈병환우회’를 결성했고 김상덕 씨가 간사를 맡았다. 환우회 전반을 챙기고 조정하는 역할 뿐 아니라 공대위 소속 사회단체들과 입장을 조율하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

환자들은 당연히 투쟁이 처음이었고, ‘의약품 접근권’이라는 말 자체도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자회견, 토론회, 항의방문, 점거농성, 강제실시(특허를 가진 자의 동의 없이 강제로 특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로 주로 정부가 자국민 보호의 목적으로 행사함) 청구, 글리벡 제네릭(복제약) 직수입 등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투쟁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환자들이 직접 들고 일어나서 그처럼 강력한 투쟁을 한 것은 처음이었고, 혁신적인 신약을 개발한 회사가 수십 년의 독점판매권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논쟁도 활발했다. 이 과정에서 글리벡 제조사인 노바티스는 2만 5000원으로 약 가격을 유지하는 대신, 환자 본인부담금(20~30퍼센트)을 글리벡에서 대신 지불하는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거부하기 힘든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환자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환자들 자신은 걱정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지만 결국 노바티스가 부담하지 않는 나머지 70~80퍼센트의 금액은 결국 국민의 세금이나 다름없는 건강보험 재정에서 지원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환자들 좋다고 국민들에게 부담을 전가시킬 순 없었다.

환자들에 대한 노바티스의 회유는 실패했다. 글리벡 투쟁이 의약품 접근권 투쟁이 전설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햇수로는 2년을 끌어온 글리벡 투쟁은 글리벡 공대위의 강제실시 청구를 특허청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김상덕 씨의 투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 아프고 그 병을 치료하는 약이 있다면, 그 치료약에 대한 접근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변함없이 확고했다. 민중의료연합 공공의약센터의 일원으로서, 건강세상네트워크의 간사로서 그는 의약품의 공공성과 접근권을 위해 항상 싸웠다. 환자 당사자로 시작했지만 아픈 사람들, 아플 사람들을 위해, 만인의 의약품 접근권을 위해 싸우는 투사가 되었다.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의 가격과 공급중단에 관련한 투쟁이나 에이즈 환자들의 치료접근권을 위한 투쟁에서도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그의 투쟁을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2006년 5월 26일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 됐다. 10년이 지난 지금, 의약품 접근권은 나아졌을까?

2005년 산정특례 제도의 도입으로 중증·희귀질환자들에 대한 본인부담금은 5~10퍼센트로 줄어들었지만 초국적 제약회사의 신약에 대한 특허권은 한미FTA를 통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재난적 의료비라는 말은 이제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사람들은 의료비 부담이 두려워 너도나도 실비보험, 암보험에 가입한다. ‘4대 중증질환 100퍼센트 국가보장’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병원의 비급여 진료에 대한 대책은 내지 않고, 오히려 병원의 영리행위를 부추기는 의료민영화만 적극 추진하고 있다.

故 김상덕 10주기를 기념하는 것은 단지 그를 회상하는 것을 넘어 그의 투쟁을 오늘에 되살려 보편적인 의약품 접근권 쟁취를 다짐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김상덕처럼 생각하고 김상덕처럼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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