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6/03 제14호

괴짜들이 꿰뚫어 본 역대 최고 금융 위기

영화 <빅쇼트>

  • 박문칠 다큐멘터리 감독
영화는 시대의 거울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영화화할 수 있는 역량은 한 사회의 문화예술적 성숙도를 가늠하는 지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한 선배가 우리는 ‘광주’를 영화적으로 제대로 담아낸 작품조차 없다고 한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하면 미국은 문화제국답게 자기의 역사를 부지런히 영화화하고 있다. 

몇 해 지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역사상 최대의 위기라 할 만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대한 영화들도 이제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마진 콜: 24시간, 조작된 진실>(2011)은 리먼사태가 터지기 하루 전, 한 대형투자사 내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24시간을 다뤘고, <라스트홈>(2014)은 모기지를 갚지 못해 집에서 쫓겨난 가장이 먹고 살기 위해 역설적으로 강제퇴거 일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일찌감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종합적으로 살핀 <인사이드 잡>(2010) 같은 다큐멘터리도 만들어졌었다. <빅쇼트> 역시 이런 영화 중 하나다. 
 
 

아웃사이더들의 반란 

2011년 실제 인물들을 취재해 출간된 동명의 논픽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월가와 서브프라임 사태를 다루고 있지만, 색다른 각도로 접근을 한다. 위기를 일으킨 장본인들을 다루기보다 시스템에서 한발 비켜나 있는 일군의 괴짜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들은 각자 비범한 재주를 가졌으되, 사회적으로는 부적응자들에 가깝다. 사무실에서 헤비메탈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맨발로 돌아다니며, 남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펀드매니저 마이클 버리(크리스찬 베일). 월가의 부패를 극도로 혐오하는 신경질적인 펀드매니저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 그리고 콜로라도 시골에서 뉴욕으로 상경해 큰 돈을 벌고 싶어하는 젊은 초짜 촌뜨기 펀드매니저들…. 

하나 같이 아웃사이더들이지만, 주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그들의 반사회적 성격은 오히려 사태를 직시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리하여 모두가 “곧 죽어도 고!”를 외칠 때 그들은 주택 시장이 망한다는 쪽에 전부를 건다. 그리고 주변에서 온갖 비난과 조롱이 빗발쳐도 꿋꿋하게 버텨내 기록적인 수익을 올린다. 
 

고수익의 비결은? 

그들은 어떻게 위기가 닥칠 거라는 확신을 가졌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남들이 보지 않으려는 것을 보았고,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해냈다. 
 
 
實事求是(실사구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월가에서 인기리에 판매되던 모기지 펀드의 값어치를 실제로 따져본 것이다. 수천 개의 모기지로 구성된 펀드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수고를 한 것이다. 엑셀 지표상의 숫자가 도무지 믿기지 않을 때에는 현장 답사도 다녀왔다. 집을 사고 파는 현장을 다녀온 그들의 수고 덕에, 관객인 우리는 버블이 터지기 직전, 흔들리는 경제의 여러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내 집 마련의 꿈에 부푼 서민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이민자들에게 모기지를 팔아 요트와 고급 스포츠카를 소유하게 된 모기지중개인, 대출로 집 5채를 산 스트리퍼, 금융 감독 기관에서 피감 금융사로의 이직을 아무 거리낌 없이 준비하는 직원,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묻지마 최고등급 (AAA)을 자판기처럼 인증해준 무디스나 S&P같은 신용평가기관들, 비리를 제보 받고도 자리보전에 연연해 기사를 쓰지 못하는 기자까지. 거품의 징후는 도처에 널려있었다. 
 

코믹한 톤과 하이브리드한 형식 

얼핏 퇴폐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거품 말기의 이 증상들은 그러나 심각하게 다뤄지기보다 코믹하게 그려진다.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같은 영화가 월가 주류의 퇴폐와 환각을 다뤘다면, 이 영화는 한발 떨어져서 관조를 하고 있기에 거품에 동참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부각된다. 순간의 자기 이익을 위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머저리들과 좌충우돌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는 괴짜 주인공들이 어우러져 이 영화의 블랙 유머는 빛을 발한다. 

영화의 형식 역시 이런 코믹한 톤과 마찬가지로 재기 발랄하다. 빠른 편집 리듬을 기본으로 하면서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2008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각종 대중문화 아이콘들이 나오는 영상 클립이나 뮤직비디오 컷들을 빠른 몽타주로 묶어서 보여주기도 하고, CDO나 CDS같은 복잡한 경제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셀레나 고메즈 같은 유명인들을 이용해 뜻풀이 영상을 주석처럼 삽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따금씩 극중 인물들은 극영화의 규칙을 깨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관객인 우리에게 이런저런 부연설명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 안과 밖을 넘나드는 연출을 통해 영화는 이질적인 영상들이 뒤섞인 하이브리드한 톤을 갖게 됨과 동시에, 극중 이야기가 실제였음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이 외에도 영화는 명시적인 대사를 통해 이 사태가 수백 수천만 보통 사람들의 삶을 망치는 일임을 주지시킨다. 주인공 중 하나인 마크 바움이 막판 수익 실현을 앞두고 윤리적인 갈등을 겪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극중 주인공들의 한탕은 성공으로 끝나지만, 본인들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씁쓸할 수밖에 없다. 

색다른 캐릭터들과 독특한 형식을 통해 미국 금융시스템의 단면을 들여다본 영화를 보며, 한국에서도  IMF 사태에 관한 영화가 나올 때가 됐는 생각이 들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 어떻게 재벌의 지나친 차입 경영, 관료들의 무능, 외국계 투기자본의 장난질로 한꺼번에 무너졌는지 되돌아볼 때도 되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헬조선이 된 이유가 바로 그 시절에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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