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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 제12호

송민영을 기억하며

  • 황수진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허락된 생이 삼십 년 남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리 없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그 사실을 알았던 것처럼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재능, 성실함, 열정은 매순간 반짝이는 성과들을 남겼다. 
고인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며 그녀가 이 세상에 새긴 의미를 짚어보자. 
 

2003~09년 :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학생운동에 헌신하다

고인은 1984년 11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2003년에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학생운동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으면서도 몇몇 대학에서 건재하며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었다. 민주화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 정권이 만들어내는 모순에 저항하고, 노동자·농민·빈민들과 연대하는 것이 이 시대 학생운동의 임무라 믿는 청년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은 2003년부터 7년간 전국학생행진(구 전국학생연대회의)의 일원으로서 학생운동에 매진했다.

고인이 대학에 입학한 2003년은 노무현 정권 첫 해였다. 미국의 침공으로 이라크 전쟁이 터졌고 대통령은 파병을 결정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약속은 허공에 흩어졌고 한 해 동안 6명의 노동열사가 있었다. 고인은 반전평화운동과 비정규직 투쟁에 참여하며 학생운동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고, 대학시절 내내(노무현 정권부터 이명박 정권까지) 노동자민중이 투쟁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했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취업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학점·스펙 경쟁이 치열해지고 대학공동체가 파편화되어갔다. 전국학생행진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차별, 착취, 경쟁에 맞서 평등-자유-연대의 가치를 지향하는 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학생자치도 되살아날 수 있다고 봤다. 고인은 2005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모반 학생회장, 2006년 인문대학생회 집행위원장, 2007년 총학생회 정책국장을 역임하며 그 길에 앞장섰다. 

많은 사람들이 품 넓고 따뜻하며 명석한 그녀를 따랐다. 고인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가득해, 사람들의 개성이나 매력을 발견해서 별명을 지어주곤 했다. 신림동 녹두거리에서 자취를 하던 고인은 자신처럼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하는 후배들이 외로울까봐 집으로 불러서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만화와 영화도 빌려보며 친언니, 누나처럼 잘 챙겨주곤 했다. 미니홈피에는 늘 누군가를 만난 기록을 다정히 담아놓은 게시글이 가득했다. 

2008~09년에는 전국학생행진 중앙운영위원회에서 페미니즘 사업 담당자와 조직국장을 맡았다. 조직 내외의 다양한 문제를 다루는 어려운 위치였지만 특유의 세심함을 바탕으로 토론과 문제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선후배, 동기들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 
 
 
 

2010~12년 : 민주노총 젊은 간부로 충북지역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단결하고 투쟁할 때 세상이 바뀐다는 신념을 따라 노동운동을 시작한 고인의 첫 직책은 민주노총 충북본부 총무차장이었다. 고인은 뛰어난 친화력과 활동력으로 낮선 지역에 금방 적응해나갔다. 먼저 충북본부의 살림을 살뜰하게 꾸려나갔다. 보리쌀을 파는 재정사업으로 쏠쏠한 수입을 남겨 방송차 한 대를 마련했을 정도다. 조직의 재정을 책임지는 총무는 그 중요성에 비해 빛이 잘 나지 않는 자리다. 그러나 그녀는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또한 교육선전업무를 겸해 소식지 <단비> 발간, 현장활동가 맞춤교육을 맡아 진행했다. 젊은 간부답게 ‘SNS 활용법’ 교육을 신설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요청받은 선전물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지역의 투쟁사업장에 어떤 기획과 선전이 필요할지 먼저 고민해서 뚝딱뚝딱 만들어내곤 했다. 특히 정성스레 그린 손그림이 돋보였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낸 ‘학비가 너무해’ 카툰, 교사·공무원·비정규직 모두 학교에서 일하는 노동자임을 그림으로 표현한 ‘우리는 모두 교육노동자’ 뱃지, 이명박 정권의 노조탄압에 맞서 싸우던 유성기업지회를 위한 재정사업 ‘희망커피’, 청주대 청소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쌈싸먹자’ 행사 포스터 등 그녀의 작품들에는 좋은 메시지와 디자인에 대한 깊은 고민이 묻어난다.
 
고인의 진면모는 바로 이런 대목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주어진’ 역할을 ‘적당히’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충북지역운동에 활력이 될 만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먼저 나서서 조직하고 실천했다. 여성사업과 소모임 활동에 열성적이었던 것도 그렇다. 고인은 충북본부의 여성사업 물꼬를 튼 사람이었다. 학생시절부터 페미니즘 운동을 자신의 과제로 여겨왔기에 탄탄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매년 치르는 3.8 여성의 날 행사를 형식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여성노동자 이야기마당, 여성의 날 촛불문화제 등을 열어 지역에서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모아내 생동감 넘치는 행사를 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여성노동자 강연, 야유회, 여성조합원의 밤 등 후속사업도 꾸준히 진행했다. 지역문선패와 여성활동가 독서모임을 조직하기도 했다. 

지역의 노동운동 선배들이 “요즘처럼 어려운 시절에 왜 운동에 뛰어들었냐”, “이렇게 작은 지역에 왜 왔느냐” 궁금해하면 고인은 “그러게 말이에요 … 그런데 어려울 때 운동을 하는 게 옳은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민주노총 충북본부 간부로서 헌신했던 시절 고인의 숨결은 현재까지도 충북지역운동에 따스하게 남아있다.
 
 
 

2013~15년 :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에서 사회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다

2013년부터 고인은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으로 활동했다. 조직 전반을 관장하고 구석구석을 살피며 필요한 논의와 소통을 담당하는 것이 조직국장의 기본 임무였다. 진심을 다해 사람을 대하는 고인이 조직 내 소통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녀는 늘 회원들을 먼저 찾아가는 조직국장이었고, 한명 한명의 활동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조언하며 지지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분야와 지역을 막론하고 운동이 쉽지 않은 시대에 그런 그녀의 노력은 더 소중했다. 활동가들은 그녀 덕분에 고립감을 덜고 자신감을 가졌다. 요컨대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타입의 활동가였다. 

고인은 공공운수노조 관련 사업과 활동가들의 모임을 맡아 진행하며 민주노조운동의 혁신과 강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세대가 고령화되어가는 가운데 오래된 노조조직들의 힘을 잘 지키면서도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2000년대 들어 새롭게 조직된 비정규직·특수고용 노동자들이 공공운수노조의 희망이라고 생각했으며 더 많은 노동자들을 노조로 묶어세울 수 있는 전략을 고민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도 공공운수노조 조직화 사례의 시사점을 분석하고, 정세와 주체적 조건에 맞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은 글을 썼다(이번 호 60~63페이지에 수록). 풀무원 화물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리는 선전물을 만들고 연대를 조직하는 것도 그녀가 생의 마지막까지 힘썼던 일이다. 

고인이 사무처 회의에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제가 할게요”다. 기본 업무만 해도 바쁜 와중에 연대해야 할 중요한 투쟁이나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생길 때면 늘 “제가 할게요” 하며 나섰다. 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과제를 적극적으로 찾아 움직였다. 민주노총의 다양한 산별연맹의 투쟁에 연대하고, 노동개악에 맞선 선전활동에 앞장서고, 빈곤사회연대를 필두로 한 반빈곤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다양한 주제의 연구팀을 조직해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사회운동의 전략적 목표와 전망에 관한 학습과 토론에 매진하기도 했다. ‘한국경제와 재벌’ 연구팀에 참여하며 올 초에 결과물을 낼 예정이었고, ‘장기불황, 고령화 시대 일본 노동운동의 시사점’을 정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페미니즘 신간서적은 꼭 챙겨보며 어떤 점이 인상 깊었는지 주변에 이야기해주곤 했다. 

 
그러나 고인은 활동밖에 모르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가장 일찍 사무실에 출근해 하루 종일 부지런히 일한 후에 저녁때는 꼭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사실 그녀에게는 회원들과 친구, 선후배 관계가 구별되지 않았고, 다이어리에는 매일 만날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연남동 일대의 맛집과 술집들을 섭렵한 것은 물론이고, 사회진보연대 댄스 1인자답게 홍대 클럽도 누볐다. 음악을 사랑해 콘서트와 페스티벌도 자주 찾아다녔다. 그러고도 다음날이면 또 말끔한 모습으로 제일 먼저 출근해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남은 과제는 우리의 몫

고인이 남긴 아름다운 발자취들을 따라가다 보니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일을 빨리 잘 하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그녀가 미소 지으며 “저는 어릴 때부터 숙제를 다 하고 나서야 마음 편히 노는 아이였대요.”라고 답했던 장면이다. 어쩌면 고인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숙제를 남들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완수하고, 더 좋은 세상으로 훌훌 떠난 건 아닐까.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의 몫이다. 고인이 좋은 곳에서 영면하기를 바란다. ●
 
 
 
덧붙이는 말

지난 12월 사고로 세상을 뜬 송민영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을 추모하는 특집을 구성했습니다. 고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글과 생전에 썼던 글 두 개를 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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