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2015/12 제11호
청년을 보호하는 건 노동개악 아닌 노동조합
유럽노동자들의 노동개악저지와 청년조직화 시도에서 배울 점
11월 12~13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민주노총 20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이 ‘경제위기-노동개악에 맞선 세계 노동자들의 투쟁’이란 주제로 열렸다. 첫째 날은 경제위기에 맞선 유럽 노동자 투쟁과 초국적 연대 가능성, 이탈리아 일자리법 대응, 비정규직 확대에 맞선 아르헨티나의 투쟁, 미국 ‘15달러를 위한 캠페인’, 한국 노동시장 구조개악에 맞선 투쟁 발표로 진행되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노총(CGIL)과 유럽노총의 시도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과 똑 닮은 이탈리아의 노동개악
세계금융위기 이후 경기침체에 빠져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시장 구조개악과 흡사한 노동개악이 이미 시행된 바 있다. 이탈리아 렌치 총리는 ‘과보호되고 경직된 노동시장을 바꿔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며 ‘일자리법’을 내놓았다. 한국의 보수언론은 중도좌파로 평가받는 렌치 총리의 당시 행보를 ‘진보가 주도하는 노동개혁’, ‘40세 개혁의 기수’, ‘데몰리션 맨’(파괴자)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2014년 12월에 통과되어 올해 3월부터 시행된 일자리법은 8개의 시행령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근무연수에 따른 고용보호가 강화되는 무기계약직(중규직) 도입
▲ 실업급여 개혁 및 정리해고 조치, 국가 고용청 창설
▲ 고용계약 재검토 및 직무기준개정
▲ 일·가정 양립
▲ 근로감독, 사회입법 단순화
▲ 직장 내 사회안전망 개정
▲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및 공공고용서비스 개정
▲ 노동시장 행정 간소화 및 동등 기회
▲ 실업급여 개혁 및 정리해고 조치, 국가 고용청 창설
▲ 고용계약 재검토 및 직무기준개정
▲ 일·가정 양립
▲ 근로감독, 사회입법 단순화
▲ 직장 내 사회안전망 개정
▲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및 공공고용서비스 개정
▲ 노동시장 행정 간소화 및 동등 기회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발표한 살바토레 마라(이탈리아노총 CGIL 국제국/유럽노총 청년위원장)는 2007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유럽 각국은 재정위기에서 벗어나고자 긴축재정·노동개악을 시도해왔지만 청년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기는커녕 기존의 일자리를 나누어 계약직만 늘었으며, 세대 간 갈등만 부추겼다고 평가했다.
이에 맞서 2014년 12월 12일 이탈리아노총은 총파업을 벌였으며, 세대 갈등을 일으켜 단결을 방해하려는 정부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그 의미를 살바토레 마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부는 기존의 노동자들이 과보호되고 있다며, 일자리법을 통해 청년들을 보호하는 우산을 씌워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세대와 청년세대간 갈등을 만든 정부에 항의하는 의미로 ‘고장 난(부러진) 우산’ 행동을 벌였다.
마라는 8개 시행령이 가져온 위험을 한국의 노동시장 구조개악과 연결하여 설명했다. 우선 3월부터 시행된 일자리법으로 인해 사용자는 더 쉬운 해고, 법적 책임 약화라는 특혜를 얻었다. 해고규정 완화로 노동자는 해고 후에 ‘불법 해고’ 판결을 받아도 보상금만 받을 뿐, 사용자에게 복직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일반해고 요건 완화 가이드라인이 시행될 경우 나타날 부정적 후과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40여 개에 달하는 고용계약의 종류가 간소화되지 않았음에도, 이른바 ‘중규직’(한국의 고용형태로 보면 무기계약직) 채용을 늘려 고용률이 나아지고 있다고 선전한다. 이는 기존의 일자리를 질 낮은 계약직으로 대체하는 효과일 뿐이다. 실업급여의 경우, 적용대상은 확대했으나 적용 기간 및 급여액을 삭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마라는 더 심해지는 노동권 후퇴의 예로 사용자가 노동자의 활동을 추적하는(카메라 감시, 휴대폰 및 전산시스템 점검) 통제 강화, 장애인 의무고용(할당) 축소를 꼽았다. 자본의 위기를 노동권의 후퇴와 세대 간 갈등으로 완충하려는 렌치 총리의 시도는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마라는 일자리법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긴축 권고와 국가별 정책 권고의 실행과정의 하나임을 강조했다. 즉, 유럽 내 경기침체와 적자재정을 극복하기 위한 노동개혁과 긴축재정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진두지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기가 심각한 남유럽뿐 아니라 중도좌파 집권당도 유럽연합의 노동개악 지침을 충실히 실행 중이다. 그럼에도 고용창출 효과는 미진한 채 남유럽 국가들의 청년실업은 30~50퍼센트에 육박한다. 전 세계적으로 장기불황에 처한 자본의 전략이 노동비용 감축과 고용보호 완화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 역시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는 전 세계적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노조의 무력화, 노동기본권 축소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라는 각 국의 대응뿐만 아니라 유럽노총의 대응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11월 5일에 열린 이탈리아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노동자에 관한 새로운 법률” 발의, 전국적 집회 개최, 일자리법 일부 폐지를 위한 국민투표 발의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청년, 위기, 조직화
유럽노총 청년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마라는 청년, 위기, 조직화를 강조한다. 그는 노조의 미래이자 힘이 되어야 하는 청년들이 사용자에게 쉽게 착취당하고 있다며, 20년 후 노총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청년위원회를 설립했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미조직 분야, 특히 이주노동자와 여성노동자를 적극 조직하여 이들이 노조에 가입하고 현장의 현실을 반영할 때, 힘 있는 노조로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노총 청년위원회는 “청년 노동자들이 서로 만날 기회, 노조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다양한 조직화 사례를 시도하고 있다. “청년 노동자를 함부로 쓰지 말라”는 캠페인과 비인간적인 일자리 구인을 비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대기업에서 외국어 능력, 골고루 스펙을 갖춘 인재를 모십니다. 업무: 커피타기, 복사하기’ 등과 같이 기업의 행태를 비꼰 모의 구인광고를 통해 청년 착취를 폭로하고 비슷한 사례의 청년들의 제보를 받아 조직화 사업을 한다.
또한 노조에 접근하기 힘든 동유럽·북아프리카 등지에서 건너온 이주노동자(미등록 포함)들을 직접 찾아가기도 한다. (‘CGIL 이동사무소’라고 써 붙인 캠핑카가 농장에 찾아간다) 캠핑카 이동 사무소는 정보 제공 및 지원·보호를 수행한다. 이러한 이동식 노조 사무소는 노동조합, 노동 상담, 문화행사, 세미나 등을 지원하며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취약한 환경의 노동자들을 방문하고 있기도 하다.
노조의 생존을 위해 조직화 사업을 다각도로 고민하면서 노조가입의 문턱을 낮추고 있는 시도는 민주노총에 시사하는 바가7 크다. 유럽노총 청년위원회의 고민은 민주노총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조직률 자체가 낮은 한국의 노조 현실과 더불어 87년 노동자대투쟁 시기부터 민주노조 운동을 경험한 조합원들의 많은 수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또한 청년실업과 고용불안으로 파편화된 청년노동자, 신규취업자에게 노조 가입은 엄두를 내기도 힘든 조건이다. 따라서 노동시장 구조개악에 맞선 민주노총의 투쟁은 한편으로 수많은 미조직·청년·이주·여성노동자들이 노조에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싸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라는 한국의 민주노총이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박근혜 정부의 공격을 무너뜨리고, 정주-이주노동자들의 분열이 아닌 연대의 강화를 보여주길 바란다 말했다. 민주노총 앞에 놓은 과제와 사명은 무거워 보이지만,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민주노총이기에 앞으로의 행보를 더 기대해 보고자 한다.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은 노조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지만, 노동권을 지켜내고 확대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 생동감 있게 하는 길, 헬조선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우리의 전망, 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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