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글
- 2015/11 제10호
웃음기 사라지는 희극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19세기 프랑스 역사를 하나의 서사로 읽어낸다. 그가 저 유명한 도입부에서 서술했듯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 우리는 아버지의 역사를 희극적으로 반복하려는 한 인물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매일 신문과 뉴스를 통해 보고 있는 셈이다.
이웃나라를 침략해 제국의 영토를 확장해나가던 나폴레옹은 연합국의 반격에 패배하면서 몰락한다. 그리고 왕정이 복고된다. 그러나 이 왕정은 1848년의 2월 혁명으로 다시 제2공화정에 자리를 내준다. 이렇게 재개된 공화정을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뒤엎고 다시 제정 체제로 만든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역사의 반복이다.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의 가면을 쓰고 희극을 연출했듯, 박근혜 역시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 가히 역사적인 소극을 연출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이해나, 대중의 삶에 대해선 거의 무관심하다. 그에게 있어서 ‘통치’는 사회에 웃음을 주는 게 아니라, 이 사회를 제물 삼아 스스로 웃음을 거머쥐는 것이다. 이쯤 되면 통치가 아니라 사기행각, 범죄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다.
지난 수년간 우리는 이런 사기행각에 도미노처럼 무너져왔다. 박근혜야말로 억압받는 이들의 광범위한 지지 속에서 당선된 대통령 아니던가. 대중들이 독재자-영웅의 딸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었던 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냉정한 현실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따른 사회운동의 대응에 기시감을 느낀다. 국정교과서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교과서가 될 것이라는 논리로는 결코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 또 교과서 논란 그 자체에 함몰되어 ‘공존’이나 ‘다양성’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것 역시 아무것도 방어해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근본적인 관심은 어떻게 이런 희극의 연출이 가능해졌는지 살피고, 역사를 박근혜의 것이 아니라 민중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