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5/12 제11호

세상의 ‘걸림돌’이 송곳이 되는 이야기

웹툰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진 <송곳>

  • 박문칠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1970~80년대 지식인들은 노동자 출신 작가의 출현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리고 박노해가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열광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여 아무도 시를 읽지 않게 되었고, 활자보다는 영상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영상 작업을 하는 나는, 제대로 된 노동영화의 탄생을 갈망해왔다. 물론 일찍이 <파업전야> 같은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시도들은 대부분 어떤 도식적이고 계몽적인 한계에 갇혀 영화적 재미를 주지는 못했다. 최근에 개봉한 <카트>나 <또 하나의 약속>도 어렵사리 만들어졌으나 투쟁 과정 전반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극적인 재미를 느끼기엔 부족했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갈증을 풀어주는 작품이 등장했다. 영화가 아닌 웹툰이었다. 어린 짜장면 배달부의 밀린 임금을 받아주는 프롤로그를 단숨에 읽고 “이거다!” 싶었다. 한편의 무협지처럼 멋있게 그려진 주인공 구고신의 캐릭터는 레전드급 작품의 탄생을 예감케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웹툰에 대한 댓글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오랜 취재를 통해 다져진 생생한 노동현장의 디테일들은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들의 자식들, 그리고 한 번이라도 비정규직으로 일해 본 젊은이들의 심장을 달궜다.
 
 

사건보다 인물 속으로

이제 이 웹툰은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중이다. 2007년 이랜드 파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송곳>은 대형마트 노동자들의 애환과 노조 결성기를 담고 있다. 이수인 과장(지현우)이 사측의 부당한 해고지시에 맞서 노조를 결성해나가는 이야기는, 운동을 해본 사람에게는 너무 뻔하고, 운동 근처에도 안 가본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운 이야기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극을 단순한 선악구도로 끌고 가거나 투쟁 과정을 다큐처럼 나열하지 않는다. 한 편의 무협지처럼 전통적 영웅서사에 충실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해고의 바람, 노조결성의 과정을 보여주다가도, 사건에 얽혀 있는 인물들의 복잡한 개인사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며 인물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이를테면 주인공 이수인 과장이 회사로부터 부하직원들을 해고하라는 부당한 압박을 받을 때, 그는 육군사관학교 시절 상관들의 부당한 지시에 항거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이런 서브플롯 덕에 우리는 원리원칙에 투철한 개인이 어떻게 조직의 잘못된 관행을 뚫고 나오는 ‘송곳’이 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사건들 사이에서 인간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사실 이수인 과장은 전형적인 노동운동가가 아니다. 되려 애국보수에 가까운 인물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출신으로 원리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까칠한 관리자. 이런 인물이 노조를 하기 까지 어떤 고민과 고뇌를 했는지 보여주기에 극적 재미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가장 평범한 곳에 노동조합을

<송곳>의 미덕은 이렇게 인물 하나하나의 복합적 매력을 놓치지 않으면서 노조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깨는 데 있다. 노조하면 떠오르는 붉은 머리띠와 과격한 구호의 이면에는 사실 우리처럼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속물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작품은 보여준다. 마트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가 보장해주는 안락함에 이끌려 우르르 가입했다가 탄압과 회유에 금세 탈퇴하는 모습은 누구나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대목이다.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을 돕는 또 다른 주인공, 구고신 상담소장(안내상)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외부세력’ 혹은 ‘전문시위꾼’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노동자들을 이용해 사회혼란을 획책하는 불순분자도, 고매한 우국지사도 아니다. 그는 ‘고결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이용하는 파렴치한은 더더욱 아니다. 때로는 거칠고 가벼워 보이지만, 학생운동 시절 모진 고문에 못 이겨 동지들을 배신한 기억을 가슴깊이 새길 줄 아는 인물이다. 작가는 그의 입을 빌려 노동자들의 현실과 노동자가 알아야 할 노동법 상식을 쉽고 재밌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전한다.
 
 
극 중에서 악역을 맡은 정 부장도 단순한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공채출신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겪어가며 힘겹게 그 자리에 오른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적 연민을 갖게 한다.
 
이처럼 완벽한 악인도 완벽한 의인도 없다는 것이 <송곳>이 말하는 세계관이다. 노동조합은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만 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박멸되어야만  하는 사회악도 아니다. 우리처럼 비루한 인간들이 조금이라도 덜 비루하게 살아보려고 만든 게 노조라고 <송곳>은 말한다. 
 

남성 중심 서사의 한계

그러나 미덕이 많은 이 작품에도 아쉬움은 있다. 여성 노동자가 대다수인 사업장에서 주요 인물이 모두 남성으로 설정된 것은 못내 아쉽다. 이수인, 구고신 두 명의 주인공이 남자인 탓에, 노조 싸움에 대한 절묘한 통찰은 대부분 군대와의 유비를 통해 이뤄진다. 대한민국에서 서열과 조직 내 정치에 대한 치열한 훈육이 이뤄지는 공간이 남성들에게는 군대라는 점에서 이런 접근은 물론 매우 현실적이며 효과적인 장치이다. 노조의 조직원리, 노조투쟁의 일진일퇴를 이해하는데, 군대와 전투만큼 효과적인 참고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각되는 노조 내 리더쉽은 무뚝뚝하고 원칙적이면서도 의리와 정이 있는 남성적 리더쉽이다. 이수인의 부하직원인 주강민 주임이 노조에 동참하겠다고 결심할 때에도 “과장님 진정한 남자십니다!”라고 고백을 한 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라며 끈끈한 형제애를 과시한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여성노동자들의 우애와 투쟁, 고뇌는 부차시되고, 여성 캐릭터들은 보조적 역할에 머물게 된다. 물론 원작에 없던 여자 캐릭터 한 명이 드라마에서 추가되긴 했다. 구고신의 상담소에서 상주하며 궂은일을 자처하는 문소진(김가은)이다. 주체적이고 당돌한 그녀는 절대 착한 사람은 되지 않겠다며 자기 잇속을 챙기지만, 결국 노조 싸움을 끝까지 함께 하는 의리파다. 냉소적인 젊은 시청자들을 위해 고안된 캐릭터로 보이나,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상담소 분위기를 쾌활하게 북돋아주는 감초역할에 머무르기 때문에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한계가 있지만, 대중적인 화법으로 대한민국 노동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송곳>의 성취는 앞으로 노동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소중한 디딤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우리는 이 땅 노동자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너도나도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이제는 <송곳>이 노동조합을 배우려는 직장인들이 꼭 봐야할 책이자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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