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2014/11 창간준비1호
예술과 정치 사이를 묻는다
“예술 좋아하고 있네. 탄 캐는 것도 예술적으로 해봐라.”- 희곡 <대결>(1989) 중 #1탈의실, 광부의 대사
많은 사람들이 예술과 정치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둘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중문화 속에서 영화나 음악, 미술 등 다양한 경로로 예술을 접하면서도 정작 ‘예술’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해명’한다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은 소위 평론가나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국한되어왔고, 언제나 그렇듯 노동자의 몫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그저 매스미디어가 던져주는 ‘예술-떡밥’을 받아먹는, 일방적인 수용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정치’, 혹은 사회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었다. 실천의 측면에서나 해석의 측면에서나 다르지 않다.
2000년대 이후 한국 현대문학의 무수한 논쟁들은 죄다 ‘소설의 정치성’ ‘시와 정치’에 대한 것이다. 영화계 역시 충무로는 왜 좌파 편향적인가, 왜 정치 영화가 대두되는가 등등의 논란들로 뒤범벅이었다. 미술계는 이보다 더 복잡한데, ‘민중미술’이 소멸되고 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이 주류 영역에 편입된 이후 10년이 지나자 갑자기 미술과 정치의 관계, 포스트-민중미술 논쟁, 현대미술의 금융화 따위의 토픽들이 미술판의 한쪽을 흔들어왔다.
그러나 사회운동에 있어서 예술은 언제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혹은 도구적으로만 다루어져 왔다. 정치적인 상상력을 불어넣어 노동자계급에게 저항의 방법들을 발굴하고 대중운동을 자극해야 하는 사회운동에게나, 항상 논란거리 속에서만 정치를 사유하고 정치와의 거리를 가늠해왔으나 결국 가장 급진적인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 실천의 영역에 들어서야 하는 예술에게나, 예술과 정치라는 양자의 조우, 혹은 충돌이 필요하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주의가 예술에 대해 가타부타 주장하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주의가 예술가들에게 창작에 대한 신묘한 지침 따위를 제공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영화를 찍거나 시를 쓰거나 기타를 연주하는 방법 따위는 없다. 마르크스주의적인 문제의식에 기초해 현실을 바라보고 영화를 만드는 켄 로치(Ken Loach; 영국의 영화감독, 사회적 리얼리즘을 고수하며 영화를 찍어왔다.)나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 프랑스의 영화감독, 실험적이며 혁신적인 영상 미학을 선도하며 '현대영화의 아버지'라 불린다.)는 모두 ‘정치적’이고 ‘문제적’이지만 이들이 영화를 다루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오늘날 이 땅의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이 마르크스주의 예술론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당대의 예술에 대해 제대로 비평하고 그것이 정치 혹은 사회운동과 충돌할 수 있도록 개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실천적으로는 대중운동의 단초를 찾겠다는 목표를 갖고 전문성을 고취시키고, 담론의 영역에서는 당대의 예술 작품, 혹은 문화운동에 대해 급진적이며 동시대적인 비평의 시각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행히도 오늘날 평론가들과 전문가들의 비평-기능은 제대로 작동을 멈춘 지 오래다. 타당하고 올바른 입장조차도 소수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판’ 내의 문제의식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당대의 작품들과 사회운동 사이의 가교를 놓아 사회운동 내부의 편협하고 조야한 시선을 변화시키고, 동시에 일종의 ‘살롱 문화’에 갇혀 있는 예술계 전반에 퍼진 포스트-모더니즘적이며 동시에 자유주의적인 시각을 비판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지배계급에게 빼앗긴 ‘예술’을 되찾아오자. 우리 노동자운동의 면면에 정치적 상상력의 긴장이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자본의 일방적인 소비자에서 당파적이고 정치적 감각을 놓치지 않는 주체로 나서기 시작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