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5/09 제8호
무엇이 그리스를 구할 것인가?
그리스 구제금융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대안
8월부터 그리스에 대한 3차 구제금융이 시작됐다. 그리스가 구제금융 대가로 채권단과 맺은 각서는 독일의 요구 대부분을 담았다. 주요 내용은 연금 삭감, 서민증세, 노조의 단체협약 규제, 국유자산 매각 등 긴축 프로그램들과 채권단이 그리스 정부와 금융기관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감시 제도들이다. 채권단과 그리스의 구조개혁 각서는 긴축이 성장을 제약해 빚을 오히려 늘릴 것이라는 경제학적 논쟁과 더불어 그리스 주권이 채권단에 의해 훼손당하고 있다는 민주주의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급진 진보정당의 집권과 긴축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지난 8개월을 떠올려 보면 이는 다소 실망스러운 결말이다. 1, 2차 구제금융을 이끈 이전 정권들과 긴축을 내걸고 당선된 집권 정당 시리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도 지금까지는 불분명하다.
시리자 정부가 이렇게 굴욕적인 각서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유로’ 때문이다. 그리스가 유로화로 표시된 채무에 대해 일방적으로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면 같은 화폐를 쓰고 있는 국가들이자 채권국이기도 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큰 손실을 입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그리스에 대해 신뢰를 상실한 이들 나라들이 그리스를 유로존에 그냥 두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
즉 그리스는 유로 화폐를 버리고 자국 화폐를 쓸 각오를 하지 못하면 구제금융 칼자루를 쥔 독일 요구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건 시리자보다 더 급진적 세력이 집권해도 마찬가지다.
‘유로’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
그리스가 굴욕적인 각서를 체결하면서까지 유로통화동맹(유로존) 잔류를 원하는 건 지난 15년간 유로화가 가져다 준 달콤함이 강한 반면에, 드마크라화(그리스의 예전 화폐)로의 복귀 전망에 대한 확신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유로존은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1990년대까지 달러의 보조적 기축통화 역할을 하던 독일 마르크화를 유럽의 다른 18개 나라가 함께 쓰는 제도다. 화폐 사용 지역의 총생산과 인구가 크게 늘어나니 화폐의 가치와 안정성이 더 상승했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 유로화는 유로 당 1달러 수준에서 2007년 1.5달러까지 상승했다. 화폐가 표시하는 경제규모는 미국 다음으로 컸고, 유로로 표시된 자산의 가격은 2007년 말부터 시작된 금융위기 전까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한 그리스 역시 이런 강한 화폐 덕에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시장 활황 혜택을 봤고,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데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 유로는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화폐다. 마르크스주의 화폐론에 따르면 화폐는 인간노동으로 만들어 진 생산물 또는 그 노동생산물에 대한 교환권이다. 예를 들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달러는 노동생산물의 하나인 금에 대한 태환기능을 가지고 국제화폐로서 역할을 했다. 물론 현대 화폐들에서는 이런 직접적 노동생산물에 대한 태환 기능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화폐의 본질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다. 현대 화폐들은 미래 조세수입을 담보로 발행된다. 그리고 시민이나 기업이 내는 세금은 그들의 노동생산물 중 일부다. 즉 현대 화폐는 국가가 조세 형태로 거둬들일 현재와 미래의 노동생산물을 토대로 한다. 한국의 원화를 예로 들면, 경제전망이나 무역상황이 안 좋아 미래 국가가 거둬들일 노동생산물(조세수입)이 줄어들 것이라 예상되면 화폐가치가 그만큼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유로는 국가 간 재정통합이 없는 상태, 화폐가 토대로 삼아야 할 노동생산물이 모호한 상태에서 발행되고 있다. 유로존은 국가연합이 아니라 통화연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다른 나라들이 재정통합 없이 독일 마르크화를 함께 사용하고, 독일이 요구하는 몇 가지 재정과 통화 규칙들을 지키는 방식이다.
유로의 이런 구조적 결함을 보완하는 건 엄격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이다. 화폐 실체가 모호하다보니 시장에서의 통화가치를 엄격하게 지키지 않으면, 순식간에 통화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근원적으로 존재한다. 유로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2008년을 제외하면 0~2퍼센트 수준에서 인플레이션을 관리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치는 각국의 재정적자도 엄격하게 통제된다.
이런 철저한 반인플레이션 정책은 그리스와 같은 나라에게는 치명적이다. 먼저 높은 화폐가치로 인해 유럽의 다른 국가와의 생산성 격차를 극복할 길이 없다. 그리스의 산업적 기반이 유로존 참여 후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이유다. 높은 화폐가치가 가져다주는 혜택은 대부분 자산가격 상승으로 인한 투기 차익이나 국채를 예전보다 더 쉽게 발행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금융화 혜택들이었다.
그런데 2008년 세계경제위기로 자산시장이 몰락하자 그리스는 해외자본을 유치할 수 없게 됐고, 무역수지와 재정수지 쌍둥이 적자를 견뎌내지 못하고 부도가 났다. 그리스는 유로존에서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린 다른 국가들(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과 위기의 원인을 공유한다. 그리스가 가장 심각하게 위기를 겪는 이유는 그동안 다른 나라보다 유로존의 혜택을 더 많이 봤기 때문이다. 금융세계화의 역설이다.
문제는 그리스가 유로를 벗어나 다시 독자적 화폐를 쓰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화폐는 국가의 미래 조세수입을 토대로 하는데, 경제가 망가진 상태에서 미래 조세를 충분하게 기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분위기면 유로존 탈퇴 시 그리스는 유럽의 원조도 기대할 수 없다.
반긴축 투쟁과 근본적인 사회변화
일부 경제학자들은 그리스 사태를 긴축을 둘러싼 경제학 논쟁의 대리전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시장근본주의(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매년 재정적자가 GDP의 20퍼센트 가까이 발생하는 그리스가 회생하려면 재정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조조정 없는 구제금융은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에 불과할 것이란 이야기다. 반대로 케인즈주의 경제학자들은 그리스 부채는 성장을 통해 갚는 게 불가능한 규모라고 진단하며, 대규모 부채탕감과 성장을 위한 투자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긴축은 경기침체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부채가 더 늘어나는 부작용만 있을 것이라 경고한다.
2010년부터 진행된 1, 2차 구제금융과 긴축정책 결과를 보면 분명 긴축정책은 문제가 있다. 그리스는 2010년 1차 국가부도가 난 뒤 5년 간 정부지출을 30퍼센트 가까이 줄였다. 하지만 이런 긴축재정의 결과 빚이 오히려 늘었는데, 국가 경제 자체가 크게 위축되다보니 세입도 함께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지난 5년간 국내총생산(GDP)이 25퍼센트 감소해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세계에서 경제가 가장 어려워진 나라가 됐다. 실업률이 치솟았고, 자영업자들이 몰락했으며, 부자들은 자산을 해외로 빼돌렸다.
물론 그렇다고 케인스주의식 재정확장 정책이 온전한 해법이 될 수도 없다. 시장근본주의 경제학자들은 그리스의 분명한 구제금융 절약(재정긴축) 없이 채권자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국민들이 부채탕감을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문제 이전에 정치적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논리는 자본의 이해관계를 국민적 이해관계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을 통해서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 사태는 1990년대부터 어려워진 그리스 경제가 유로존으로 10년 가까이 금융세계화 혜택을 입으며 연명한 후, 발생한 일이다. 따라서 단기적인 경기 진작만으로는 중장기적인 경제 재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0여 년 전부터 이미 심각한 축적, 생산성 증가 둔화를 겪은 그리스 자본주의가 몇 가지 정책개혁 꾸러미로 부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세계경제 위기가 계속되고 있는 정세이며, 유럽은 이 위기의 중심에 있지 않은가.
무너진 실물 경제 ⇨ 긴축 정책 ⇨ 경기 침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은행과 재벌에 대한 사회화, 노동자들의 경영통제 등 경제 구조를 보다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방안을 현실적 대안으로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 유로존에 남기 위해서는 빚을 갚기 위해 그나마 남아있는 모든 생산자원을 소모해야만 한다. 현재와 같은 경제체제를 유지한 채 유로존을 탈퇴하면 생산을 재조직할 민족화폐를 만들 수 없어 경제가 무너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유로존에도 남고, 재정긴축도 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20년 이상 계속된 구조적 위기를 해결할 대안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해법이 없다면 결국 남은 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들이다.
이는 당연히 채무불이행과 유로존탈퇴(그렉시트)를 필요로 하지만, 선언으로 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그리스 시민들이 현실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로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유럽의 노동자운동이 그리스를 옭죄고 있는 유럽의 채권자들을 압박하고, 그리스 노동자들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는 이 모든 것들이 갖춰져 있지 못하다. 9월 중 그리스 총선이 다시 열릴 예정이다. 시리자의 좌파는 치프라스에 반대해 신당을 창당했다. 쉽지 않겠지만 그리스 노동자운동이 단결된 힘으로 근본적인 변혁의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