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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7 제6호

광주대단지 사건 - 박정희 정권 최대 도시봉기는 어떻게 잊혀졌나

박정희 정권 최대 도시봉기는 어떻게 잊혀졌나

  • 임미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1988년 대학 시절 “배가 고파 산모가 아기를 삶아먹었다”는 전설 같은 소문을 들었다. 우물에 독을 풀어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그곳은 성남시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독을 풀어서가 아니라 더러운 물을 먹고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 소문의 그곳이 성남시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광주대단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곳에서 굶어죽은 사람들의 소문이 20년 가까이를 돌고 돌아 대학 신입생의 귀에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 최초최대의 도시봉기

1971년 8월 10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건설된 광주대단지에서 박정희 정권 최초이자 최대의 도시봉기가 일어났다. 주민 3만에서 6만 명이 참여했다고 알려진 이 사건은 오전 11시에 시작해 6시간 뒤인 오후 5시에 끝이 났다. 사건은 언론에 대서특필됐고 그러면서 배가 고파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지게 됐다.

 

1968년 김현옥 서울시장은 ‘한강이남, 제2의 서울’이라는 계획으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5개 리 300만 평에 철거민 35만 명을 이주시키겠다고 발표했다. 1가구당 30평씩 분양하고 1만원씩의 건축보조비를 준다며 청계천변과 서울 도심의 철거민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1969년 9월 1일부터 강제 이주가 시작됐을 때 가재도구만 챙긴 채 트럭에 실려 철거민들이 도착한 곳은 산비탈에 나무만 깎아 놓은 땅이었다. 분양해주겠다던 땅은 20평으로 줄었고 그나마도 허허벌판에 금만 그어놓은 상태였으며 보조금도 지급되지 않았다. 철거민들은 수개월 또는 1년 가까이 천막에서 살아야 했고, 어른들이 일하러 나간 사이 배가 고픈 아이들은 산으로 올라가 먹을 것을 찾아야 했다. 

 

1971년 사건 당시 광주대단지에는 원주민 4653명(1025세대)과 이주민 13만 5214명(2만 9746세대)이 거주하고 있었다. 38퍼센트가 판잣집이나 천막 등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실업률은 절반이 넘었다. 단지 내 생활시설도 열악했다. 상수도는 필요량의 절반가량만 공급됐고 전기는 37.5퍼센트가 가설돼 있었다. 분뇨 및 오물 수거는 1970년 5월까지 정기적인 수거대책이 없다가 연말에서야 분뇨차 1대와 청소차 5대, 청소원 18명이 상주했다. 위생 문제는 사건 후에도 여전히 심각해 1976년 봄에는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심한 날에는 한 천막촌에서 3~4구의 시체가 들려나오기도 했다. 하수로가 없어 비만 오면 길이 진흙탕이 되는 바람에 “부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왔다.

 

빈곤과 기아가 낳은 소문

광주대단지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서울시 외곽의 철거민 정착지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서울시 경계를 넘어선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서울로 나가야 했는데 교통수단이라고는 천호동으로 가는 폭 6~7미터의 국도뿐이었다. 그나마도 을지로5가까지 최소한 1시간 반이 소요되었을 뿐 아니라 버스요금도 시내요금의 2배를 물어야 했다. 이 같은 물리적 거리는 대개 일터가 서울 도심에 있었던 이주민들의 생계수단을 대번에 바꿔놓거나 일자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서울과의 거리와 교통수단의 부족은 아이들의 학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1년 당시 초등학교는 5개, 중학교 2개에 고등학교는 아예 없었다. 1970년대는 국민들의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이 가파르게 상승하던 때였다. 그러한 때에 유독 광주대단지 이주민만이 소득 상승은 물론 교육 기회까지도 차단당한 채 빈곤이 심화되고 재생산됐다. 사건 당시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공간적사회적 격리와 그에 따른 생활고를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일은 ‘산모가 갓난아기를 삶아먹었다’는 소문이었다. 서울로부터 격리되고 세상으로부터 고립돼 갈수록 먹고살기 힘들어진 광주대단지 사람들은 ‘아기를 삶아먹은 산모’ 이야기로 공포를 전유하고 있었다.

 

“그런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남편은 서울 다녀온다고 나간 지 일주일이 돼도 돌아오지 않고, 산모는 그동안 꼬박 굶었다, 어린애를 낳았는데 삶아서 먹었다. … 신문사에서 현상 걸고 ‘소스’를 캤는데 실패했다는 소리도 있고. … 광주단지가 하도 비참하니까. 밤에 시장에 나가면 쓰레기통 뒤지는 사람 많습니다.”(박태순. <르뽀 광주단지 4박5일> 《월간 중앙》 1971.10월호. 중앙일보사.)

 

 

투기꾼이 주동하고, 철거민은 구속되고

사회공간적 격리에 따른 빈곤과 공포가 쌓여가는 속에 사건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분양증 전매 금지와 불하대금의 시가 일시불 상환 조치가 취해졌다. 대단지 주민 대부분은 철거민입주자와 전매입주자였는데 전매입주자는 철거민이 받은 분양증을 매입해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서울시는 4월의 대통령선거와 5월의 국회의원 선거 때 뿌려진 장밋빛 공약(空約)의 여파로 분양증 가격이 치솟을 대로 치솟은 1971년 7월 13일 분양증 전매 금지 및 일시불 매수계약을 발표했다. 표면적으로는 투기 억제와 전매행위 금지를 명분으로 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도시계획에 수반된 각종 공사로 인해 재정난을 겪고 있던 서울시의 세입 확보 목적이 컸다.

 

7월 13일의 공고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전매입주자들이었다. 전매입주자 가운데에도 대책위원회 구성과 민원 제출을 주도한 것은 분양증을 여러 장 매입해 투기를 하던 세력이었다. 거리 집회를 개최하고 서울시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서울시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던 중 8월 1일 경기도에서 가옥취득세 고지서를 배부하자 8월 10일 주민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주민들의 동요를 눈치 챈 서울시는 8월 9일 최종완 부시장을 파견해 타협을 모색했으나 실패한 뒤 8월 10일 11시 양택식 서울시장과의 협상테이블을 제안했다.

 

8월 10일 오전 9시부터 성남출장소 뒷산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1시가 되어도 양 시장이 나타나지 않자 흥분한 사람들은 “시장이 시간을 어겼다”,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한다”면서 150미터 떨어진 광주대단지사업소로 몰려가 집기를 파손했다. 요구 사항은 대체로 전매입주자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으나 시위 군중은 철거민입주자들이 많았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데다 쌓인 분노도 컸기 때문이다.

 

양택식 서울시장이 대단지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30분. 양 시장은 대책위 간부와의 면담에서 가능한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양 시장이 돌아간 뒤에도 주민 5000여 명은 양 시장과 서울서 간부들이 있다는 풍문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몰려다녔다. 40여 명은 시영버스를 뺏어 타고 “서울로 가자”며 수진리 고개로 향했다. 최루탄이 발사됐고 시위대는 돌로 맞섰다. 그러다 오후 5시 20분경 서울시가 모든 요구 조건을 들어주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뿔뿔이 흩어졌다.

 

1971년 9월 9일 시위 참가자들 중 21명이 구속기소돼 1972년 1월 29일 2명에게 실형, 집행유예 18명, 무죄 1명이 선고됐다. 구속자들은 대부분 철거민 입주자들이었으며 대책위 측은 사건으로 인해 어떠한 행정적법적 처분도 받지 않았다. 대책위 간부들은 8월 12일 양택식 서울시장을 방문해 난동사태를 사과했으며, 검찰의 공소문에는 대책위가 주민들에게 ‘해산 명령’을 한 주체로 등장했다.

 

빈곤과 범죄의 낙인, 차별과 배제의 심화

정부 당국은 발 빠르게 대처했다. 8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광주대단지에 대한 기본대책을 지시했으며, 국회내무위원회조사단이 구성돼 17일 현지 조사를 실시했다. 광주대단지의 시 승격이 결정돼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그러나 가장 구체적인 성과는 ‘토지불하가격 인하’와 ‘취득세 면제’로 그것의 수혜자는 전매입주자들이었다. 

 

그밖에 대단지에 대한 구호사업이 신속하게 진행되면서 주민 일반이 처했던 생계 문제와 열악한 주거환경 문제도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사건은 기왕의 사회적 배제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광주대단지로의 이주가 첫 번째 차별과 배제였다면, 사건은 두 번째의 차별과 배제를 가져다줬다. 정부와 사회에서는 대단지 주민들을 폭도 취급했고 도시 전체에 빈곤과 범죄의 낙인이 찍히게 됐다. 

 

이력서에 주소를 성남시라 쓰면 취업이 되지 않았고 외부 사람들은 성남시에 가는 것조차도 두려워했다. 정부는 대단지에 경찰병력과 정보요원을 추가 투입했고 이주민에 대한 일상적인 억압체계를 조성했다. 사건 이후 대단지는 잔뜩 겁을 먹고 숨을 죽이는 동네가 됐다. 박태순은 그의 소설에서 당시 이런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상하게도 나다니는 사람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아이들 대여섯 명이 겅정거리며 뛰놀고 있는 것이 돋보여지고 있을 만큼 별촌동은 전체적으로 그렇게 황량했다. 이른바 '별촌동 소요사건'이 이곳에서 불과 나흘 전에 일어났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워지지가 않았다." (박태순. <무너지는 산외촌동사람들 14> 《창작과 비평》 1972 가을호. 창작과비평사.)

 

사건 당시 거의 모든 신문과 잡지에 대서특필되면서 그야말로 박정희 정권을 ‘깜작 놀라게 한’ 사건이었지만 광주대단지와 사건은 2000년 들어 몇 편의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 30년 넘게 세상의 기억에서 사라져 있었다. 지배 세력에게는 당연히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을 것이나 저항 세력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유는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회변혁에 대한 전망도 없었고 조직화도 되지 않은 우발적 ‘사건’에 불과했다. 

 

광주대단지의 철거민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사건 당시에도 그러했고 이후로도 말할 수 없었다. 사건 당시 ‘대신해 말한 자’는 아무 것도 못 가진 철거민들보다는 이미 가진 게 있는 사람들을 대변했고, 사건 뒤에 ‘대신해 말해주어야 할 자’들은 사회운동의 동력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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