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X정치
- 2015/05 제4호
좀비는 어떻게 대중장르에 침투했나
미드 <워킹데드>에 투영된 현대인의 절망과 희망
이른 아침 남동공단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라보자. 차가운 입술, 희뿌연 세상. 무언가에 강하게 중독된 것만 같은 머릿속의 어지러움과 축 쳐진 어깨. 그리고 하나같이 꽂혀 있는 이어폰과 무표정한 얼굴들.
두 팔과 두 다리는 살아서 앞뒤로 움직이지만 과연 그 휘황찬란하고 뜨거웠던 욕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까마득히 잊은 지 오래다.
출근 후 조회가 시작되면 까랑까랑한 욕설과 함께 관리자의 육성이 들린다. 기계처럼 반복되는 레퍼토리의 잔소리. 그리고 1년 전, 한 달 전, 어제도 다를 바 없었던 매캐한 하루가 반복된다. 퇴근길 만원버스에 올라 운 좋게 거울 챙겨 볼 겨를이라도 생긴다면 ‘좀비가 따로 없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난 정말 좀비가 되어버린 걸까? 그나마 이런 의문이라도 품으니 다행인 건가?
자본주의와 좀비
본래 좀비는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에서 행해졌던 흑마술에서 기원한다. 이것이 서구로 넘어와 미국 대중문화에서 ‘공포’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것은 삶이나 죽음 모두에 대해 권리가 없는, 자신이 노예인지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영원히 노예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좀비는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노동소외를 상징하는 은유로 등극했다. 우리가 이따금 무의식적으로 ‘좀비 같은 하루’ 따위의 말을 뱉는 것엔 이유가 있는 게다.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자신이 ‘자유롭다’ 여기는 개인들의 상태가 바로 저 ‘사물화된 영혼’, 좀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사유의 능력을 상실한 일상은 허구적인 자유, 반복적인 자기소외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헐리우드에서 좀비물만큼 각광받는 장르는 없을 것이다. 2000년 즈음까지만 해도 헐리우드 자본과는 거리가 먼 저예산 B급 비디오 영화 시장에서 소규모 오덕들을 위한 장르로 소비되었던 좀비물이 대중영화의 자장 안에 입성한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 <Z-WAR> 등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 꾸준하게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좀비 영화에 대한 일정한 편견을 벗어난다면 그것이 시체나 피 따위가 난무하는 하드고어 영화들과는 차별성을 지니는, 사회풍자적이고 정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띄는 장르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느 공포영화들과 다르게 좀비 영화의 진정한 의의는 이런 정치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어떤 영화들은 정치적, 풍자적 요소보다 스펙타클한 이미지, 액션 등의 성격이 훨씬 강렬하기도 하다. 그러나 유의미한 족적을 남기는 작품은 하나같이 질문을 남긴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배경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회복 가능한가’를 묻는 질문이다.
워킹데드
수년째 세계적인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미드 <워킹데드(The walking dead)>는 밀도 높은 이야기 전개 속에서 우리가 문명사회라고 믿었던 세계의 인간성, 공동체 안 관계맺음의 충돌과 도덕적 갈등에 대해 다룬다. 드라마 초반부 누구보다 내적 갈등을 심하게 겪은 주인공들은 곁에 있던 동료들의 죽음과 배신, 이미 인간 아닌 존재로서의 좀비, 즉 ‘워커(walkers)’라 부르는 비인간을 통해 붕괴된 사회, 혹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시즌1이 지나가면 워킹데드가 그리는 세계는 이미 파괴된 문명 이후의 정글 같은 세상이다. 그곳에서 인물들은 그룹을 지어 옮겨 다니며 먹을 것,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희박해지는 ‘희망’을 찾아 방황한다. 때로는 울타리를 치고 공동체를 조직해 ‘새로운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 번번이 내부의 갈등과 외부 공동체의 공격 혹은 오해에 의해 무너진다. 이와 반대로 ‘워싱턴에는 거대한 안전 공동체가 존재한다’ 따위의 풍문을 믿고 그를 향한 여정을 겪기도 하는데 이 역시 신뢰할만한 증인의 진술이 거짓으로 드러나며 좌절되곤 한다. 미드 <워킹데드>의 골간은 이런 공동체 조직의 서사와 희망의 근거를 찾아 떠나는 모험 서사의 반복과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버티기 위해 거짓말이라도 움켜쥐며 사소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흑인들의 자주적 혁명으로 근대민주국가를 이루었던 아이티의 공포 서린 민담은 미국의 대중문화로 옮겨와 서구 문명 외부에 대한 공포,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자리 잡았다. 대농장의 영원한 노예-노동자였던 좀비는 어느덧 영원한 소비자-노동자로 뒤바뀌어 어두운 도시의 밤 쇼핑몰 안을 배회하는 유령들로 재현되고 있다. <워킹데드>에서도 좀비들이 군집한 곳은 우거진 숲이거나, 쇼핑몰이다. 숲은 종말 이후의 정글 같은 세계, 쇼핑몰은 현대 자본주의 도시문명,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 노예들의 공동체처럼 느껴진다. 마치 이 사회가 철저히 자신을 위해 ‘노예’가 되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종속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기계발 이데올로기가 유일신교인 시스템인 것처럼 말이다.
가냘픈 희망의 원리
살육과 상실 속에서 증폭되는 <워킹데드> 속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에는 우리 안의 파괴적인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 좀비의 뇌를 가차 없이 베어내는 모습에서 ‘보기 싫은 인간들일랑 다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타자에 대한 혐오, 일베적인 배타성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 혐오의 정서가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외롭게 싸우는 주인공들을 더욱 괴롭힌다. 남는 것은 어쩌면 좀비물이 주는 시각적 카타르시스 혹은 쾌락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즌을 이어가며 위태롭게 <워킹데드>를 시청하는 것은 ‘결국 희망을 찾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인간에 대해 일말의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와 같은 우려와 기대 때문이다.
가끔 모든 걸 잊고 그저 근심 없는 소비자-시민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소박한 꿈을 전해 듣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욕망을 잃으면 모든 게 편해질지도 모른다는 도피가 우리를 좀비로 만드는 사회의 치료제는 아닐 것이다. <워킹데드> 속 주인공들이 절박하게 확인하듯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저 가냘픈 희망의 원리이며, 정글 같은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의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