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의 사회주의혁명가 엘러너 마르크스, 그녀를 기억하는 법 [%=박스1%] “나는 엘러너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노동자 사랑과 진심을 기억합니다. 엘러너만큼 사회주의 진영에서 노동자를 위해 수고한 사람은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 영국 노동조합의 제임스 모슬리 엘러너 마르크스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고 있다 해도 흔히 칼 마르크스의 딸이라거나 비극적으로 죽은 여성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이것이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리아 콜론타이, 클라라 체트킨 등 여성사회주의자들이 이름을 남긴 것과는 다른 점이다. 아마도 그녀의 독립적 활동보다는 아버지인 마르크스의 이름과 엘러너의 극적인 죽음의 무게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영국 사회주의를 이야기 할 때 엘러너는 빠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동료이자 정통성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했고, 마르크스 사후에도 일관되게 노동자운동에 헌신했다. 또 당시 여성의 삶과 사랑에 변화와 자유가 필요함을 깨닫고 실천했다. 그런데도 엘러너는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 엘러너뿐만 아니라 대다수 여성혁명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가려진 삶을 드러내 기억해야 한다. 특히 여성 혁명가가 겪는 결혼, 가족, 사랑, 출산이 남성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여성이 운동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이렇게 여성혁명가를 되살리는 것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그리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탄생할 많은 여성혁명가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생애는 단편적이지 않아서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 상황과 관계, 내면의 심리 등을 입체적으로 고려할 때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따라서 엘러너에게도 많은 이름을 붙이며 시작하려고 한다. 마르크스의 막내 딸, 19세기 영국 노동자운동에 헌신적으로 기여한 마르크스주의자, 뛰어난 연극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배우이자 기획가, 자유로운 사랑을 꿈꿨지만 결국 그 사랑 속에 파묻혀버린 여성. 적어도 이런 이름들을 다 기억할 때 엘러너 마르크스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꼬마 정치가의 탄생과 성장 “물론 어제는 『뉴욕 트리뷴』에 기고할 원고를 쓸 수 없었소. 오늘도 쓸 수 없고, 어쩌면 내일도, 앞으로 한동안 쓰지 못할 것 같소. 왜냐하면 어제 아침 6시부터 7시 사이에 아내가 또 한 명의 나그네에게 마르크스라는 성을 물려줬기 때문이라오. 유감스럽지만 아무리 봐도 여자아이인 듯싶소.” 엘러너는 1855년 1월 16일 런던에서 칼 마르크스와 예니 폰 베스트팔렌의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잃은 마르크스는 남자 상속자를 낳지 못했다는 생각에 깊은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의 딸 엘러너가 자신을 똑 닮았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투시(엘러너의 애칭)가 바로 나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엘러너를 죽은 아들과 동일시해 사내아이처럼 키웠다. 어느 정도 성장한 엘러너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의 가정에서 식사 시간과 차 시간에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갖가지 의견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엘러너의 학습을 지도하는 데 엄청난 힘을 쏟았고, 그녀 역시 정치 공부에 놀라운 의욕을 보여주었다. 아래의 재미있는 일화는 어린 시절 그녀의 영특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엘러너는 여덟 살 때 만나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숙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할아버지가 위대한 정치가라는 이야기를 아빠에게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어요. 그러니 우린 반드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폴란드가 어떻게 될 건지,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나는 이 용감하고 사랑스런 폴란드인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거든요.” 이렇게 맹랑한 꼬마인 엘러너는 “아브라함 링컨이 전쟁에 관해 내 조언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갖기에 이르렀고, 결국 미국 대통령에게 긴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아버지 마르크스는 매번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엘러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여행을 하거나 집회에 참가하여 국제사회주의의 많은 지도자들과 만났다. 독일 사회주의자 리프크네히트가 평생 그녀의 친구였고, 프리드리히 엥겔스 역시 엘러너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이러한 일상적인 만남은 살아있는 정치교육이었다. 또 그녀의 어머니 예니와 가정부였던 헬레네 데무트, 아일랜드 태생의 공장 소녀 리지 번즈는 여성인 엘러너의 역할 모델이었다. 이 세 명은 통찰력 있는 지성과 정치력을 갖고 있었고, 자기희생적이었다. 이런 특성은 엘러너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 엘러너의 정치력은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더욱 단련된다. 1871년 3월 파리코뮌은 마르크스 집안 전체에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자본가 계급과 그 국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파리의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고.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세계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새로운 출발점에 도달한 것 같아 무척 흥분되오”라고 쿠겔만에게 쓴 마르크스의 편지에는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 있다. 1848년 혁명 이후 처음으로 마르크스는 혁명적 정치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다. 엘러너 역시 마르크스의 비서 활동을 하며 코뮌에서 강한 영향을 받는다. 런던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녀는 마르크스 집의 문을 두드리는 파리 망명객들 덕에 코뮌에 대한 관심을 지속한다. 한편 이 시기 처음으로 엘러너와 마르크스가 대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망명가 중 한 사람인 리사가레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리사가레는 엘러너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34세의 저널리스트로 코뮌에 참가했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집을 드나들며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지니고 있던 개인주의의 면모를 벗을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그들의 관계에 반대했다. 정치적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진 것도 미래도 없음이 분명한 망명가와 자신의 딸이 교제하는 것이 탐탐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러너는 리사가레와 실질적인 약혼관계를 9년 동안 이어간다. 리사가레와의 관계로 생긴 갈등과 반항은 엘러너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립을 찾으려는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와 엘러너의 갈등은 격렬하게 드러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 결국 마르크스는 둘의 관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리사가레와의 9년간의 관계는 조용하게 끝나고, 엘러너는 1884년에 에이블링을 만난다. 에이블링과 만남 1881년 12월 2일 엘러너의 어머니 예니가 간암에 걸려 죽는다. 아내의 투병으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마르크스도 몸져 눕는다. 미완의 『자본』을 완성하기 위해 건강을 되찾으려 노력했던 그는 결국 15개월 후 아내 예니를 뒤따랐다. 그 때부터 엘러너는 진정으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한다. 남겨진 유산으로 그녀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으나 정신적으로 혹독할 정도로 외로웠다. 그녀가 에드워드 에이블링 박사를 친구로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84년 여름 엘러너는 자신의 나머지 생애의 동반자이자 끊임없이 그녀를 지치게 했던 에이블링과 사실혼 관계를 시작한다. 엘러너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해 의견이 같았다. 연극을 사랑했고 돈에 구애받지 않았다. 내 아버지도 그를 좋아했다. 우리는 능률적으로 협동할 수 있었다.” 둘 사이의 친화력은 즉각적이었고 강력했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지적으로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던 에이블링은 어린 시절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과 신경성 질환에 시달려온 엘러너에게 활력을 주었다. 에이블링은 사회주의자이며 자유사상가로 무신론자였다. 에이블링은 당시 영국의 지적 주류 중 하나였던 정교(政敎) 분리주의 운동에 가담해 국교를 공격하며 사회복지를 강조하고, 사상의 자유를 주장했기 때문에 영국 사회주의 확산에 촉진제 역할을 했다. 에이블링의 이러한 활동과 사상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엘러너에게 에이블링과의 사랑은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위대한 사상에 대한 헌신이었다. 하지만 에이블링이 엘러너에게 기쁨과 환희만을 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느끼게 했고, 끊임없는 감정노동과 희생을 쏟아 붓게 만들었다. 애당초 엘러너와의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에이블링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에이블링의 부인은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엘러너의 자유로워 보이는 이 결혼은 전통적 결혼보다 더 억압적이고 불행한 것이었다. 게다가 에이블링에 대한 평판은 끔찍했다. 당시 사람들이 남긴 그에 대한 기록에는 그의 도덕적 타락, 재정적 낭비, 무책임함, 알코올 중독, 방탕한 여자관계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둘의 관계를 마르크스의 ‘성실하고 착한 딸’과 ‘악명 높은 방탕아’의 결혼이라 부르며 경악했다. 엘러너는 에이블링과의 결혼으로 자유와 활력을 얻었지만, 주변의 동료들이 떠나갔으며 둘의 관계는 종종 운동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엘러너는 에이블링을 떠날 수 없었고 에이블링을 만난 후 그녀의 활동은 항상 그와 함께였다. 에이블링은 엘러너의 삶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친 두 남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물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아버지 마르크스다. 사회민주주의연맹의 결성 영국의 노동자운동은 1880년대 후반 들어 변모하기 시작한다. 1878년 리프크네히트에게 보낸 마르크스의 편지에 그 비판이 담겨 있다. “영국의 노동자 계급은 매우 미약하기는 하지만, 1848년 이후 부패한 시기를 겪으며 타락해갔고 마침내 자본가들이 만든 위대한 자유당의 맹목적인 꼬리, 즉 그들의 노예가 되기를 소망할 정도로 타락해 버렸다.” 이 무렵 인터내셔널의 영국인 멤버들도 차츰 자유주의로 이전한다. 또 숙련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조합도 1871년 제정한 조합법으로 법적 지위를 획득하자 더 이상 국제조직에 관심을 갖지 않기에 이른다. 엘러너는 “정치적인 운동은 이제 완전히 끝났습니다”며 절망을 토로한다. 한편 1880년대 들어 중간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이 급진주의 조직을 만든다.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던 헨리 메이어스 힌드먼은 영국에서 최초로 사회주의적 정치조직을 만든다. 힌드먼은 칼 히르쉬를 통해 몇 차례 마르크스를 만났다. 그는 과거의 차티스트 운동가와 급진적 클럽들을 결합해 혁명조직을 만들려는 계획에 마르크스가 주목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힌드먼을 ‘자기도취적’인 ‘약한 그릇’으로 평가했고 엘러너도 이에 동의했다. 힌드먼은 1881년 6월 스스로 사회주의 단체임을 자임하는 민주연합(훗날 사회민주주의연맹)을 결성한다. 이 민주연합은 영국 사회주의 발전의 초석이자 당시 사회주의 세력들의 결집체였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와 힌드먼에 대한 불신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주요 발기인이 되기를 계속 거부했다. 이런 감정은 힌드먼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요약한 자신의 저서 『만인을 위한 영국』을 발간하며 더욱 심화된다. 마르크스는 중산층 민주주의자가 주축인 당을 위한 강령과 힌드먼이 인용한 자본주의적 착취에 관한 자신의 이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는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을 주요하게 인용하고도 저자를 밝히지 않은 점은 마르크스의 분노하게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엘러너의 불신과는 상관없이 민주연합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부상한다. 이 때문에 엘러너는 에이블링과 함께 민주연합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접촉을 시도한다. 1884년 사회민주주의연맹으로 개칭한 민주연합의 4차 연차대회에서 엘러너와 에이블링은 집행부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연합에서 탈퇴한다. 힌드먼이 마르크스주의 인터내셔널의 부활에 반대함으로 써 입장 차이와 감정적 갈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또 연합의 이념이 점차 의회주의로 변모되고 힌드먼의 고압적 태도 역시 변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혁신을 위한 사회주의자동맹 건설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족했으며, 지금으로서는 힌드먼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엥겔스와 협의한 후 개인의 사조직으로 전락한 사회민주주의연맹을 버리고, 보다 혁신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새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1884년 엘러너와 에이블링은 윌리엄 모리스, 벨 포트 맥스 등과 함께 사회민주주의연맹에서 탈퇴하여 사회주의자동맹이라는 독자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연맹이 물들어 있는 기회주의, 개혁주의, 의회주의를 공격했다. 그리고 혁명적 국제 사회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엘러너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자동맹에 참가하고 있었으므로 동맹은 국제적인 명성과 신뢰를 얻었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단체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회원이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아 전국 조직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들은 교육, 조직 활동, 당내 민주주의를 3대 활동 강령으로 채택했으며, 특히 교육을 중시 여겼다. 대학가의 강연과 민중을 위한 무료 예술을 제공했고 여성 문제에도 앞장섰다. 특히 엘러너는 여성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우리들 여성은 이제 분노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죄악과 사악함을 깨끗이 지워 버리기 위해 대홍수가 - 가령 그것이 피의 홍수가 될지언정 - 필요한 것이다. 여성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가지 의무는 사회를 혁명하려는 자들을 돕는 것뿐이다.” 엘러너는 모든 여성문제의 근원이 성 지배에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자본주의에서 결혼이 상거래의 일종이며, 여성에게 그러한 결혼은 매춘보다 나을 것이 없는 종속적 관계라 규정했다. 따라서 그녀는 여성들이 사회가 부과한 여성적 관습을 깨고 새로운 여성상으로 나아갈 것을 설파했다. 사회주의 혁명시에도 애정과 존경, 지적 친근성, 생활의 균등이 이루어질 때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 것이라 보았다. 또 진보적 여성의 사상은 여성 참정권과 고등교육 같은 시민의 기본권뿐 아니라 사유재산 및 여성의 육체 또는 정신적인 특수한 문제, 그리고 전문 직종에 대한 관심 등 모든 일반적인 분야를 총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태생부터 분파주의에 휘말릴 위험이 있던 사회주의자동맹은 결국 실패한다. 평의회에 이미 많은 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침투해 있었으나 엘러너를 비롯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위험을 깨닫지 못했다. 더군다나 힌드먼의 독단적 행동에 혐오감을 느낀 동맹의 설립자들은 중앙집권적 통제를 통한 당의 통일을 모색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사회주의자동맹 내부의 주도권 쟁탈과 이념논쟁이 그치지 않았고, 동맹의 지도부는 점차 폭력행위에 열중하는 아나키스트들의 파벌집단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새로운 방도를 찾고자 했던 엘러너는 이러한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동맹에서 손을 떼고 다른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신노조주의에 대한 헌신 엘러너는 신노조주의에 기대를 걸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당시 영국 노동자운동의 상황을 보자. 19세기 말에 영국의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다. 기존의 노조주의는 숙련 노동자들 주도하에 확립된 것으로 제도적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873~1896년 동안 유럽 전역은 대불황을 경험했고, 이에 자본은 기계화와 노동강도의 강화로 대응하며 노동자들 내부의 불안을 키우고,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려 했다. 숙련 노동자들은 방어적 전략에 입각해 고용주와 타협했지만 반숙련이나 미숙련 부문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반숙련, 미숙련 노동자들이 숙련 노동자들과는 달리 노동조합에 속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고용의 불안정성에 직면해야 했다. 따라서 기존의 노조주의가 더 이상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기존 노조를 통한 단체 협상보다는 직접행동에 대한 호소가 설득력을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숙련 노동자들은 보다 급진적 이념과 새로운 노조주의를 제시하며 스스로 조직하려는 주체적 조건을 만들었다. 영국에서 이러한 신노조주의는 1889년의 파업들을 계기로 폭발했다. 엘러너는 신노조주의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지도적 인물이 된다. 동맹에서 활동하며 지칠 대로 지친 그녀가 새롭게 결심한 것은 영국의 노동자, 빈민들을 조직, 선동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노동자들과 밀착한 운동을 하면서 지난 사회주의 정치활동에서 느끼지 못했던 만족감을 얻었다. 엘러너는 영국의 산업체제 속에 인간의 삶이 경멸당하고 있음을 보고 사회주의야말로 불평등과 비참함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1889년 3월 ‘브리튼 및 아일랜드 가스공업과 일반노동자의 전국조합’이 결성됨으로써 신노조주의 운동의 서막이 열렸다. 그리고 그 시작에 엘러너 역시 동참한다. 계급적 성격을 강조하는 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당시 지도부인 윌 도운에게 읽기를 가르쳐주며 전반적 지식을 넓히는데 도움을 준다. 엘러너는 사려 깊은 행동과 조합원에 대한 헌신적인 행동 덕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당시 1일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한 가스 노동자들의 파업이 승리를 거두었고 연이어 런던 항만노동자의 대규모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강경파업과 예상 밖의 성공에 엥겔스 역시 감격해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한다. “지난날의 무수한 시행착오와 분열을 딛고, 우리는 마침내 가장 미래지향적인 운동을 발견했다. 내 생애를 통해 이번 파업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며, 또한 기쁘게 생각한다. 만약 마르크스가 살아서 자신의 눈으로 이런 광경을 봤더라면, 그는 나와 함께 지금 당장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한편 엘러너는 실버타운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생사가 걸려 있는 이 10주간, 나는 매일 그들과 함께 뒹굴며 비바람을 맞고 다녔다”라고 엘러너는 당시를 추억했다. 이 시기는 엘러너가 노동자들의 삶과 맞대며 사회주의 운동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시기였다. 그녀는 실버타운에 가스공조합 여성지부를 조직하고, 스스로 서기장으로 취임한다. 그녀는 여성노동자들의 조직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여성들이 남성들 이상으로 분기해야 하며 당면한 임금인상을 위해 단결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사회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같은 계급의 남성들과 더불어 투쟁하게 될 미래에 대비하여 단결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어서 엘러너의 활약은 계속된다. “5월 4일이 지나면 영국의 운동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신의 귀에도 엘러너의 활약에 대한 소문이 들릴 것입니다.” 소르게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5월 4일은 다름 아닌 영국에서의 첫 번째 메이데이였던 것이다. 8시간 노동준수 입법 요구와 법률 개입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약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였고 역사상 유례없는 대성공을 이뤘다. 메이데이 시위로 엘러너는 노동자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었다. 5월 중순에는 가스공조합의 서기장으로 추대되고, 새로운 조합 규약은 대부분 엘러너의 의사에 따라 채택되었다. 규약에는 모든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하나임을 강조하며 여성을 위한 평등임금에 관한 조항 및 노동자 계급의 생활향상을 위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아가 엘러너와 에이블링은 새로운 기구인 ‘8시간 노동준수 입법을 위한 국제노동연맹’에 핵심이 되어 인터내셔널에서 영국 사회주의를 대표할 독자적인 노동당의 수립을 목표로 선전, 선동을 벌였다. 이렇게 1890년대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이 활기를 띠며 엘러너의 활동도 빛을 발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국가와 자본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유지가 최대의 목표가 된다. 처음에 신노조주의가 가졌던 이념의 통일성, 혁명성은 점차 상실되어가고 엘러너가 공들였던 국제노동연맹 역시 붕괴되어 갔다. 게다가 1895년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방황하게 된다. 제2인터내셔널이 쇠락의 길을 걷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탄생했다. 엘러너는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수많은 정치적 논쟁 속에 지쳐갔다. 여성혁명가의 안타까운 죽음 엘러너가 절망에 빠진 것은 정치적 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런던 극장가를 배회하던 에이블링에 대한 환멸 역시 늘어만 갔다. 사실 이 시기에 엘러너는 자신에게 닥친 일만으로도 벅차 에이블링에게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강연활동과 대영박물관에서의 조사, 국제 노동자대회 및 탄광노동자 대회 통역, 게다가 죽은 제니 언니의 아이들에 대한 걱정까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하지만 에이블링은 엘러너를 신경쇠약 지경까지 몰고 갔다. 엘러너는 마지막까지 병든 에이블링을 간호하고 헌신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한 통의 편지는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1898년 3월 31일 오전 그녀는 에이블링이 이미 오래전에 비밀리에 여배우와 혼인신고를 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엘러너는 그동안 에이블링과의 관계가 진실한 부부라 믿었고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주장하곤 했다. 친구들의 비난에도 연애는 형식일 뿐이라 변명했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이라 믿었던 마음이 무참히 짓밟히자 그녀는 자신의 삶이 무의미해졌다고 느꼈다. 그녀는 에이블링과의 마지막 대화 후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에이블링에게 짧은 편지를 남겼다.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이여,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날 겁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지막 말은 이 길고도 슬픈 세월 내내 입술로 되뇐 말, 사랑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엘러너의 죽음을 에이블링의 배신으로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당시 엘러너는 노동자운동이 곤란함에 빠지면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 에이블링의 배신이었던 만큼 그 지점에서 우리의 평가가 필요하다. 한 여성 혁명가의 생애가 사랑의 배신을 계기로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은 비극이다. 특히 여성들의 삶에 주목했고 여성해방에 관심을 쏟았던 엘러너의 죽음은 더욱 그러하다. 엘러너는 여성들이 부르주아적인 결혼과 사랑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센의 『인형의 집』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만났을 때도 그녀는 반가워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현실의 사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활력 있고 매력적이며 능동적이던 그녀가 왜 수동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함께 혁명운동에 동참하였으나 사랑과 결혼에서는 오롯이 엘러너 혼자일 때가 더 많았다. 그녀는 고독과 절망을 느낄 때에도 자유롭게 선택한 사랑이므로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연애를 빌미삼아 무책임한 연애들을 정당화하며 성적 해방감을 만끽하던 에이블링과는 전혀 다른 점이다. 에이블링과의 관계에서 만족하지 못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더욱 사랑에 의존하고 충실했다. 결국 그녀의 견고했던 믿음이 깨지는 순간, 삶의 전부가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갈등과 절망을 이해해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이념으로는 그녀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또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도 그녀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은 그녀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엘러너를 기억하는 법 종종 여성들의 삶은 남성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엘러너 역시 마르크스의 딸, 에이블링으로 인해 죽음을 택한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엘러너에게는 무궁무진한 자신의 삶이 있었다. 영민한 판단과 예민한 감수성, 타인에 대한 헌신성, 운동에 대한 정열로 19세기 영국 사회주의 운동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했던 엘러너 마르크스. 이제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엘러너가 가졌던 원칙과 입장, 노동자운동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배우자. 그리고 엘러너가 살았던 당시 운동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넘어서자. 페미니즘과 결합한 사회운동으로 여성의 경험을 풀어낼 이념과 실천을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그녀가 간 길,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후세대인 우리가 엘러너를 기억하는 법이 아닐까.
지난 3월 26일, 민주노총 서울본부가 주최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통해 본 민주노총 혁신 과제 - 노조 내 여성사업 방향 모색을 위해" 토론회 자료와 서기록입니다.토론회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시 : 2009년 3월 26일(목) 15시□ 장소 : 민주노총 서울본부 중회의실□ 주최 : 민주노총 서울본부사회 : 박승희(민주노총 서울본부 수석부본부장)발제 : 김정은(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차장)패널토론 :- 강해현(공공노조 교선실장)- 김금숙(사무금융연맹 여성국장)- 박천석(공무원노조 마포지부 정책부장)cf. 총연맹 김정아 여성부장은 참석하기로 했었으나, 일정상 참석하지 못했고, 자료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사회진보연대에서 발간한 자료집입니다. <목차> 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선 여성노동자들의 운동과 투쟁에 나서자: 101주년 3.8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맞이하며여성노동자에게 가족은 무엇인가?여성운동 없이는 노동자운동의 혁신도 없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진단과 제언[함께 읽어봅시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세계 여성의 날」 [부록: 경제위기 쉽게 알기] 경제위기를 알자!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사회진보연대에서 발간한 자료집입니다.
<목차>
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선 여성노동자들의 운동과 투쟁에 나서자: 101주년 3.8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맞이하며여성노동자에게 가족은 무엇인가?여성운동 없이는 노동자운동의 혁신도 없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진단과 제언[함께 읽어봅시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세계 여성의 날」 [부록: 경제위기 쉽게 알기] 경제위기를 알자!
여성운동 없이는 노동자운동의 혁신도 없다 민주노총 전 조직강화위원장 성폭력 사건이 공개된 이후 민주노총 내외부의 모든 운동세력이 민주노총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혁신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진상조사를 통해 사건을 일정하게 수습하고 선거 국면으로 접어든 후 민주노총 혁신과 여성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소멸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사건 처리를 넘어 노동자운동을 진정으로 혁신하기 위한 중장기적인 계획은 무엇인지를 논의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자세와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 성폭력에 대한 노조 내 인식의 현황 이석행 위원장 검거 후 검찰이 주장하는 ‘범인도피’ 혐의자에 대한 수사 대응 지침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강간 미수’는 ‘성적’ ‘폭력’을 통해 피해자를 제압하고 의도를 관철시키려했던 시도로 보인다. 성폭력은 단지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적 폭력은 여성을 무기력하게 하고 통제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타 인종을 절멸케 하고자 체계적으로 자행되는 전시강간, 노동자/철거민 투쟁 과정에서 자행되는 구사대나 용역에 의한 성폭력, 범죄 신고를 막기 위한 안전판으로써 강도의 성폭력 등. 그러나 이러한 폭력은 단지 그들의 야만성을 나열하는 데 추가되는 항목으로만 기술될 뿐 여성을 억압하는 특수한 위험과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인식되지 않는다. 운동사회에서 성폭력은 개별 활동가의 도덕성이나 자질부족 문제로 편협하게 이해되곤 한다. 소양이 부족한 특정 간부만 성폭력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 소속 정파나 조직 전체의 도덕성을 문제 삼는다고 해결되지도 않는다. 물론 함께 활동하는 동지를 성적 폭력으로 제압하려고 한 시도는 활동가 사이에서의 신뢰와 예의를 저버린 행위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만 그친다면 정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공감’하는 사안만을 성폭력으로 인정할 수 있을 뿐 무엇이 성폭력인지를 폭넓게 설명하지 못한다. 개별 자본가의 착취가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구조의 문제이듯이, 여성의 몸과 정신에 대한 자기 소유의 권리인 여성권을 침해하는 것 또한 도덕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억압을 재생산하는 구조, 관행, 실천의 연장선상에서 성폭력은 발생한다. 노동자운동은 여성억압을 재생산하는 구조, 관행, 실천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여성운동의 과제일 뿐, 노동자운동의 과제는 아니라고 여겨 왔다. 여성 문제는 비정치적인 사안일 뿐, 보편적인 권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집에서 밥 짓고 아이 키우는 게 여성의 주된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한 여성은 보편적인 ‘노동자’가 아닌, 누구의 아내, 엄마이고 따라서 출산, 양육으로 인한 경력단절, 우선해고는 여성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된다. 남성가장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가족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가장이 아닌(실제 가장의 역할을 한다하더라도) 여성들의 저임금은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덜 조직되어있고, 저임금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여성노동자의 노동권 제약은 여성의 역할과 임무를 규정하는 가족 및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노동자운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재생산하고 노동권을 제약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은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여성억압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에 나서야 한다. 공동체의 변화, 반성폭력 운동으로 충분한가 그간 운동사회 내에서는 성폭력 규약을 제정하고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이 규약에 따라 사건을 처리해 왔다. 또한 성폭력 근절을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사회 내에서 성폭력은 왜 끊이지 않는가. 이번 사건을 두고도 사건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 등 외부에 사건을 임의로 유출하고 사건을 축소 처리하려고 시도하는 등 성폭력에 대한 운동사회의 태도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더디지만 변화하고 있다고 평가하기엔 그럴만한 긍정적인 지표가 보이지 않는다. 반성폭력 운동 주체가 재생산되고 있는지, 이것이 노동자운동 전체의 과제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잣대로 평가할 때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는 모호하다. 그러나 앞으로 반성폭력 운동의 어떤 요소를 강화해야 하는지 역시 모호하다. 현재 노조 내 반성폭력 운동의 실체는 규약에 따라 발생한 사건을 조사하고 결과에 따라 가해자를 처리하는 것, 성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전부다. 성폭력 사건을 가해자-피해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여 공동체 내부를 성찰하고 변화시키고자 했던 반성폭력 운동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애초 성폭력 사건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반성과 변화를 도모하려던 반성폭력 운동의 구상은 제대로 실행되지도 못했고 따라서 예상했던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다. 우선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면 논의가 개시되지 않는다. 사건이 발생해도 피해자가 공개를 원치 않을 경우에는 진상조사위원회 바깥에서는 논의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논의는 그것이 성폭력에 해당되느냐 아니냐의 논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사건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왜 해당 사건이 여성억압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것인지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논의 지형상 이른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성폭력의 정의를 넘어서는 소위 ‘잘 이해가 안 되는’ 사안에 대해 질문하는 것조차 해당 사안을 성폭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 즉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태도로 여겨진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는 다양한 차별과 폭력을 말하기 시작했지만, 남성들은 행여 논의하는 과정에서 2차 가해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을 검열하며 차라리 입을 닫았고 결국 논의는 봉쇄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성폭력에 해당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성폭력 예방교육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알려주는 검열 지침일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현실의 반성폭력 운동 전략이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성폭력에 해당하는 단어를 쓰지 않게 하고, 그 말을 한 가해자를 처벌하면 공동체가 변화하는가. ‘노동형제’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노조 내 여성의 배제, 주변화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노동형제’라는 울타리 밖으로 배제된 여성노동자를 주체로 세우고 조직화하는 운동이 실행될 때 공동체는 바뀐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현장, 가족 등에서 여성이 겪는 억압과 차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얻을 수 있는 토론과 교육이 노동자운동 내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도 일 년에 한차례 실시하는 교육만으로 노동자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듯이 일 년에 한차례 실시하는 성폭력 예방교육으로 여성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단지 학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해방을 향한 대중적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을 확대해야 이번 사건의 피해자 및 대리인 측은 가해자를 고소할 지 여부를 민주노총 진상 조사 결과를 지켜본 후 판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의 사건 축소 시도 등으로 끝내 가해자를 고소했고, 검찰은 2차 가해 관련자들에 대한 내사에 착수했다. 일부에서는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성폭력 사건 해결 원칙에 따라, 가해자 고소가 피해자가 원하는 것이므로 이를 절대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민주노총 내부 사건 처리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2차 가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부의 적절한 재판을 촉구’하는 입장도 제출되고 있다. 그러나 법과 사법기관에 의한 처벌은 미흡한 내부의 사건 처리를 대체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할뿐더러 가해자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방식이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성폭력 ‘사건 발생’이 ‘범죄’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철저한 법정 논리가 작동한다. 이를테면 형법은 강간을 “상대방의 반항을 불능, 현저히 곤란하게 할 수 있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간음”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즉 강간이 자행됐을 때, 피해자가 명백히 거부 의사를 밝혔는지,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는지, ‘확실히’ 성기가 삽입되었는지 여부가 강간죄의 성립 요건이다. 성폭력에 대한 여성의 경험과 법 논리에 따른 ‘범죄’ 성립은 다른 문제다. 범죄로 성립되고 나서 남는 것은 폭력의 ‘경중’에 따라 형량을 매기는 것이 전부다. 강간이 성립했든 미수에 그쳤든 상관없이 입게 되는 측정할 수 없는 피해자의 상처는 법정에서 헤아려지지 않는다. 상처와 처벌이 교환되지도 않지만,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여성들을 절망하게 하는 것은 법이 여성의 권리와 성적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도는 재산권을 침해하는 죄라고 인식된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무엇을 침해하는가. 과거에 강간은 ‘정조’를 침해한 죄였으며, 현재는 그것을 대체하는 정의조차 없다. 여성운동진영에서 성폭력이 여성의 성욕에 대한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권리로서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폭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나, 법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은 여성의 고유한 권리가 아닌 개인의 신체와 성적인 ‘사생활’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권리의 한 영역으로서 이해될 뿐이다. 맘에 드는 사람과 성적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남성의 권리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충돌했을 때, 법정은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의 권리에 근거해서 사건을 해석할 것인가. 결국 사건 사건에 따라 가해자 피해자 정황에 따라 판결할 뿐이다. 법은 성폭력이 무엇을 침해하는 범죄이며 어떤 기준에서 판단되고 통제되어야 하는지를 여성의 고유한 권리를 바탕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여성의 권리를 법에 기술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합의조차 되지 않고 있지만, 설령 법이 그렇게 바뀐다고 해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법은 발생한 사건의 가해자를 처벌할 뿐, 폭력을 예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규약도 마찬가지다. 부당해고를 당한 노동자의 대응이 기업주의 구속이나 복직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구조를 인식하고 노동자 자신이 해방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 노동자와 노동자운동의 성장을 가져오는 것처럼, 성폭력에 대한 대응도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제약하는 구조를 인식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의 맥락 안에서 사고될 필요가 있다. 여성이 처하게 되는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차별과 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과 실천 없이, 발생하는 사건들을 처리하는 것으로는 여성해방이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성폭력 가해자 처벌을 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실천을 확대해야 한다. 나아가며 누구나 민주노총의 혁신을 주문하고, 여성사업의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되어야 할 여성사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은 충분히 검토되지 않고 있다. 아래로부터 여성노동자를 주체화하고 조직화한다는 노동자운동의 기본적인 과제이자 장기적인 방향을 현실의 운동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중단기적인 계획을 입안하기 위해 민주노총 내외부의 열린 논의를 제안한다. 우리도 책임 있는 자세로 논의와 실천에 함께 할 것이다.
경제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여성노동자들의 고용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지난 12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48.8%로 떨어졌다는 통계청의 발표는, 여러 신문에 경제위기의 한파가 여성에게 더 거세다는 취지의 제목을 달고 보도되었다. 한국여성민우회나 한국여성노동자회와 같이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상담 사업을 벌여온 여성단체들 또한 상담 사례 분석을 통해 경제위기 상황에서 임신이나 출산을 이유로 한 해고나 불이익이 급증하고 정리해고나 구조조정 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적 해고 대상이 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고 제기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경험처럼 경제의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우선 희생되어온 것이 사실이었고, 더구나 현재의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점에서 여성들의 권리와 생존이 앞으로 더욱 심각하게 위협받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그렇지만 세계 자본주의가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한 현재의 상황은 단순히 여성의 고용과 임금을 줄이고, 노동자들이 고통을 분담하여 몇 년을 버티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려는 자본의 공세가 여성, 이주노동자, 비정규직과 같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약한 부위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폐업, 도산,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직과 해고, 위기를 빌미로 한 임금동결 또는 임금삭감 등 전체 노동자 민중의 생존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우선해고나 성차별적 해고위협에 국한되지 않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어려움에 놓인다. 여성 우선해고 반대나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제고를 위한 일자리 창출에 그치지 않는 근본적인 대안과 운동을 모색해야 한다. 1930년대 대불황 시기 여성노동자들의 상황 경제위기 하에서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고용과 임금에 대한 위협을 초과한다. 1930년대 대불황 시기 미국의 여성들의 삶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미국의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의 불안한 고용을 유지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동시에 생계비용 절감을 위해 가사노동을 늘려야만 하는 이중의 부담을 감당했다. 성별 직종분리로 인해 상대적으로 일자리를 보호받을 수 있었던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이 생산직에 집중된 해고로 일자리를 잃은 남편과 아버지를 부양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비서, 청소, 식당일 등에 종사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노동자계급의 미혼의 딸들 또한 거의 예외 없이 임금 노동에 종사했다. 그녀들의 저임금에 의존한 가족생활은 늘 불안함과 가난을 대면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가족의 생존을 위해 여성들은 가족 내에서 수행되는 일도 늘려야만 했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채소를 가꾸고, 저장음식을 만들고, 낡은 옷을 수선해야 했으며, 더 열악한 주거로 밀려나면서 그곳을 편안하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부가적인 일들도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실업 상태에서 집에 있는 남성들의 긴장과 신경질을 중재하고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집안일을 해야 했다. 여성은 가족 내 일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관념 하에서 여성이 노동시장으로 진출하는 것 자체가 용인되지 않았던 조건과 실제 생존을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출할 때조차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이 따로 있다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는 노동시장 내 성별 직종분리를 형성했다. 이러한 분리가 대불황이라는 위기에도 여성의 일자리를 상대적으로 유지해주었지만,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나 자율성을 실현하는 해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심각한 경제위기 하에서 남성노동자들의 실업이 늘어나자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비를 벌면서 가사노동을 통해 가족의 생존을 유지하는 이중의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 한국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도 비슷한 양상이 드러났다. 여성들이 해고되고 정규직에서 밀려나는 과정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여성들이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조건도 아니었다. 실질임금의 하락, 대량실업으로 노동자계급의 가계는 커다란 소득감소를 경험했고, 여성들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가계유지비용을 줄이기 위해 여성들은 가사노동을 더욱 늘려야 했다. 여성들이 집중되어 있는 사무, 유통, 청소용역 등의 부문은 임시직, 파견직, 계약직의 고용 형태와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이 일반화되어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무기계약제나 분리직군제와 같은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었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확대되었지만, 그것이 여성 자신의 노동권을 실현하는 것과는 무관하고 가족 수준에서 위기를 흡수하고 감당하기 위한 여성의 이중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한국 경제의 위기 전망과 정부의 대응 심화되는 한국 경제의 위기는 여성노동자를 비롯한 전체 노동자계급의 고용과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위기 속에서 한국 경제는 그 위기의 끝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원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외환위기의 가능성도 이야기되는 가운데, 수출을 비롯한 각종 경제지표들이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원화가치가 하락하는데도 수출이 급락한다는 것은, 현재의 위기가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한국 경제의 위기가 장기화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수출이 급락하면서 제조업의 경기 하강 지표가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도 더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용감소가 본격화될 전망이라고 한다.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면서 임금동결 내지 삭감을 수용하는 노동자들이 늘고 있으며, 제조업의 경우 잔업, 특근의 축소로 실질임금이 감소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은 노사화합, 고통분담을 강요하고 노동시장 유연화와 임금 삭감 등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주장하면서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또한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법 개악을 시도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누렸던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에 대한 불안감은 저임금, 비정규직에 집중되어있는 여성노동자들의 위기감을 가중시킨다. “남성 가장, 여성 가사담당자”라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속에서 언제든 가정으로 돌려보내질 수 있다는 관념이 여전한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들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실제 맞벌이 부부나 사내 커플을 중심으로 여성 우선해고 흐름이 존재하고, 자동차 등 남성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부문에서 구조조정 시 여성들이 일차적인 대상이 된다.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여성노동자들이 집중된 부문의 경우 고용 형태 자체가 임시직, 계약직 등이 많기 때문에, 재계약에 대한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저임금 삭감 시도는 최저임금이 곧 최고임금이 되는 많은 여성노동자들의 소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커다란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수준의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압박한다는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대응 전반적으로 실업이 늘어나고, 실질 소득이 감소하는 상황은 여성노동자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여성이 제일 먼저 잘릴 수 있다는 위기감은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 해고위협, 노동조건 악화와 같이 위기를 전가하려는 자본의 시도에 대해 저항하기 어렵게 만든다. 여성의 일은 부차적이라는 관념은 노동자운동 또한 공유해온 것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투쟁에 있어서 여성노동자들이 주변화, 부차화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여성노동자들의 위기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조건에서 설사 여성들이 집중된 부문의 고용이 유지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성들에게 권리의 실현이라기보다는 억압적인 측면이 크다. 대불황의 경험에서 봤듯이 전체 노동자들의 고용이 불안하고 실업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일을 한다는 것은 저임금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동시에, 가족을 유지, 부양하면서 위기를 감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서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성 자신을 포함한 전체 노동자의 고용보장과 해고반대, 임금삭감 반대라는 과제와 맞물려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여성운동 진영이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한 ‘사회서비스 부문의 괜찮은 일자리 창출’ 요구의 위치를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사회서비스가 사회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여성들이 다수 종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로 제안될 수는 있다. 하지만 정부가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정책으로 추진하는 것은, 재생산의 위기에 따라 보육, 간병, 노인 돌봄과 같은 서비스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높아진 것에 대한 대응이자, 사회서비스 부문의 시장화를 통한 이윤 창출, 그리고 저소득층 여성들의 일자리에 대한 요구 관리 등의 필요에 따른 것이다. 실제 시행되고 있는 사회서비스 사업을 보아도, 이 정책은 여성이 가족 내에서 재생산 노동을 전담한다는 성별분업과 재생산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를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이를 활용하여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노동권을 제약하고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할당한다. 따라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요구가 의미를 가질 수 있으려면 단순히 실업과 일자리 대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정부의 사회서비스 시장화 전략에 대한 비판을 확산하는 가운데 재생산 노동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특히 지금과 같은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전체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해고를 반대하는 투쟁과 결합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제위기가 장기화되고 이에 따라 실업과 빈곤이 늘어날수록 가족과 재생산의 위기는 심각해질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이라면 여성들이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통해 저임금 불안정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을 보족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가족을 위해 이중부담을 감내하면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위기를 전가하려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모든 노동자들의 고용을 지켜내는 투쟁 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보편적 권리로서 사회서비스를 제기하고, 이를 사회가 책임지는 방식으로 일자리 창출을 제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운동이 중요할 텐데,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심리는 매우 위축되어 있고 노동조합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여하한 투쟁 계획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실제 자본의 공세에 맞서는 투쟁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동자운동이 대안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경제위기가 심화될수록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고용 유지를 중심으로 한 실리주의적 경향이 강화될 것이다. 위기 전가를 위한 자본의 공세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인종, 성별 등 다양한 차이와 분할을 활용하면서 노동자운동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을 한 축으로 한다. 노동자운동의 실리주의적 경향은 이러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고, 또 그 분열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세계경제가 대불황의 초입에 놓인 상황에서, 일정 정도 양보하거나 고통을 분담하면 이 위기가 지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친 낙관이다. 정규직 노동자의 요구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 비정규직과 실업자의 요구를 포괄하는 전국적 투쟁전선의 구축과 노동자운동의 단결된 투쟁을 형성하고, 위기를 넘어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운동은 여성노동자들의 현실과 요구를 필수적으로 참조해야 한다. 노동자운동은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이 가사를 전담한다는 성별분업 모델, 가정은 정치의 장소가 아니고 여성의 노동은 부차적이라는 이데올로기, 여성은 남성에 미달하는 존재라는 상징을 수용해왔다. 이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운동의 한 주체이기보다는 특수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부문으로 취급되었고, 여성노동자들의 고유한 요구는 배제되거나 가장 먼저 포기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여성에 대한 배제와 부차화가 지속된다면,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노동권 박탈로 지연시키려는 자본의 시도에 맞서 전국적이고 단결된 투쟁을 구축하기란 난망하다. 여성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주체화, 조직화가 필요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경제위기 하에서 드러나는 여성들의 생존과 권리의 파괴는 단순히 고용불안과 노동권의 박탈로 환원될 수 없고, 자본주의 하에서 가족을 매개로 한 여성억압의 구조가 제약하는 여성의 노동권과 여성권을 동시에 사고할 때 진정 여성들의 권리와 해방을 위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노동자운동과 분리된 채 여성들만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관점 하에 이 글에서는 경제위기 시 여성노동자들의 운동과 투쟁의 큰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이후 경제위기가 전개되는 상황에 맞춰 더욱 구체적인 입장과 제안들을 만들어 가야할 과제가 남아있다. 무엇보다 여성노동자 스스로가 노조와 노동자운동에서 적극적인 부위로서 경제위기에 맞서는 투쟁을 벌여낼 수 있도록 주체화, 조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위기가 심화될수록 여성노동자들은 더욱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노동자 스스로가 일자리 보전이나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 극복을 위해 더욱 좋지 않은 조건을 감내하고 이중부담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삶과 권리 파괴에 맞선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노조와 노동자운동도 지금까지 여성들을 적극적인 주체로 사고하지 못했고 실리주의적 경향이 강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여성들의 주체화, 조직화는 축소될 수 있다.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와 생존이 파괴되는 상황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할 수 있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직화 사업을 펼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말했듯이, 여성들 스스로도 자신의 일차적인 역할이 가족을 보살피는 것이며 남성 가장에 비해 부차적인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와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속에서 가족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 오면, 자신을 조직하고 현실에 맞서기보다는 현실을 감내하고 수용하기가 더 쉽다. 따라서 여성들 스스로가 가족과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등 자신의 권리를 억압하고 제약하는 조건과 구조를 인식하면서 그것을 바꾸는 것이 자기 해방의 과제라는 신념과 이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식화, 조직화 과정을 통해 여성들이 운동의 주체로 나서서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의 단결된 투쟁을 촉구하고, 노동자운동 내에 여성들의 노동권을 제약하는 구조와 조건을 극복하는 것이 전체 운동의 주요한 과제임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서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위한 중장기적인 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강화되어야 한다. 노동자운동의 실리주의적인 경향이 강화될수록 여성노동자들의 주체화, 조직화는 어려워지고, 현재의 위기를 넘어서기도 불가능해진다. 사회의 변혁과 근본적인 대안을 지향하는 노동자운동의 이념과 실천을 형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운동은 여성해방 이념을 수용하고 여성운동과 결합해야 한다. 여성운동과 여성해방 이념의 관점에서 노동자운동의 전략과 목표를 혁신할 수 있는 방안이 꾸준히 제출되고, 노동자운동과 여성운동 양자의 결합을 추동하기 위한 시도들이 다각도로 모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재 가장 시급한 것으로, 경제위기 책임 전가에 맞서는 투쟁을 구축하는 것이다. 현재 비정규직법, 최저임금법 개악 시도가 여성노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여성노동자들이 이에 맞서 투쟁에 나서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로 다가오는 사안에 대한 투쟁에 그치지 않고 전체 노동자들의 투쟁을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와 실천을 통해 제기해야 한다. 고용보장과 해고반대, 잔업특근 축소와 조업중단 등으로 인한 임금 감소에 맞선 임금인상 요구, 실업급여와 사회보장 확대, 비정규직법, 최저임금법 개악 반대 등의 요구를 걸고 전체 투쟁전선을 형성하는 데 여성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나아가 금융과 초민족자본에 대한 통제 요구와 같이 사회적 투쟁을 제기하면서,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대응력을 강화하는 데 여성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101주년 3ㆍ8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맞이하여 경제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여성노동자들의 고용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지난 12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48.8%로 떨어졌다는 통계청의 발표는, 여러 신문에 경제위기의 한파가 여성에게 더 거세다는 취지의 제목을 달고 보도되었다. 한국여성민우회나 한국여성노동자회와 같이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상담 사업을 벌여온 여성단체들 또한 상담 사례 분석을 통해 경제위기 상황에서 임신이나 출산을 이유로 한 해고나 불이익이 급증하고 정리해고나 구조조정 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적 해고 대상이 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고 제기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경험처럼 경제의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우선 희생되어온 것이 사실이었고, 더구나 현재의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점에서 여성들의 권리와 생존이 앞으로 더욱 심각하게 위협받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그렇지만 세계 자본주의가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한 현재의 상황은 단순히 여성의 고용과 임금을 줄이고, 노동자들이 고통을 분담하여 몇 년을 버티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려는 자본의 공세가 여성, 이주노동자, 비정규직과 같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약한 부위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폐업, 도산,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직과 해고, 위기를 빌미로 한 임금동결 또는 임금삭감 등 전체 노동자 민중의 생존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우선해고나 성차별적 해고위협에 국한되지 않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어려움에 놓인다. 여성 우선해고 반대나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제고를 위한 일자리 창출에 그치지 않는 근본적인 대안과 운동을 모색해야 한다. 1930년대 대불황 시기 여성노동자들의 상황 경제위기 하에서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고용과 임금에 대한 위협을 초과한다. 1930년대 대불황 시기 미국의 여성들의 삶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미국의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의 불안한 고용을 유지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동시에 생계비용 절감을 위해 가사노동을 늘려야만 하는 이중의 부담을 감당했다. 성별 직종분리로 인해 상대적으로 일자리를 보호받을 수 있었던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이 생산직에 집중된 해고로 일자리를 잃은 남편과 아버지를 부양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비서, 청소, 식당일 등에 종사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노동자계급의 미혼의 딸들 또한 거의 예외 없이 임금 노동에 종사했다. 그녀들의 저임금에 의존한 가족생활은 늘 불안함과 가난을 대면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가족의 생존을 위해 여성들은 가족 내에서 수행되는 일도 늘려야만 했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채소를 가꾸고, 저장음식을 만들고, 낡은 옷을 수선해야 했으며, 더 열악한 주거로 밀려나면서 그곳을 편안하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부가적인 일들도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실업 상태에서 집에 있는 남성들의 긴장과 신경질을 중재하고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집안일을 해야 했다. 여성은 가족 내 일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관념 하에서 여성이 노동시장으로 진출하는 것 자체가 용인되지 않았던 조건과 실제 생존을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출할 때조차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이 따로 있다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는 노동시장 내 성별 직종분리를 형성했다. 이러한 분리가 대불황이라는 위기에도 여성의 일자리를 상대적으로 유지해주었지만,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나 자율성을 실현하는 해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심각한 경제위기 하에서 남성노동자들의 실업이 늘어나자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비를 벌면서 가사노동을 통해 가족의 생존을 유지하는 이중의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 한국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도 비슷한 양상이 드러났다. 여성들이 해고되고 정규직에서 밀려나는 과정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여성들이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조건도 아니었다. 실질임금의 하락, 대량실업으로 노동자계급의 가계는 커다란 소득감소를 경험했고, 여성들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가계유지비용을 줄이기 위해 여성들은 가사노동을 더욱 늘려야 했다. 여성들이 집중되어 있는 사무, 유통, 청소용역 등의 부문은 임시직, 파견직, 계약직의 고용 형태와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이 일반화되어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무기계약제나 분리직군제와 같은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었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확대되었지만, 그것이 여성 자신의 노동권을 실현하는 것과는 무관하고 가족 수준에서 위기를 흡수하고 감당하기 위한 여성의 이중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한국 경제의 위기 전망과 정부의 대응 심화되는 한국 경제의 위기는 여성노동자를 비롯한 전체 노동자계급의 고용과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위기 속에서 한국 경제는 그 위기의 끝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원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외환위기의 가능성도 이야기되는 가운데, 수출을 비롯한 각종 경제지표들이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원화가치가 하락하는데도 수출이 급락한다는 것은, 현재의 위기가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한국 경제의 위기가 장기화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수출이 급락하면서 제조업의 경기 하강 지표가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도 더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용감소가 본격화될 전망이라고 한다.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면서 임금동결 내지 삭감을 수용하는 노동자들이 늘고 있으며, 제조업의 경우 잔업, 특근의 축소로 실질임금이 감소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은 노사화합, 고통분담을 강요하고 노동시장 유연화와 임금 삭감 등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주장하면서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또한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법 개악을 시도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누렸던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에 대한 불안감은 저임금, 비정규직에 집중되어있는 여성노동자들의 위기감을 가중시킨다. “남성 가장, 여성 가사담당자”라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속에서 언제든 가정으로 돌려보내질 수 있다는 관념이 여전한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들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실제 맞벌이 부부나 사내 커플을 중심으로 여성 우선해고 흐름이 존재하고, 자동차 등 남성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부문에서 구조조정 시 여성들이 일차적인 대상이 된다.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여성노동자들이 집중된 부문의 경우 고용 형태 자체가 임시직, 계약직 등이 많기 때문에, 재계약에 대한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저임금 삭감 시도는 최저임금이 곧 최고임금이 되는 많은 여성노동자들의 소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커다란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수준의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압박한다는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대응 전반적으로 실업이 늘어나고, 실질 소득이 감소하는 상황은 여성노동자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여성이 제일 먼저 잘릴 수 있다는 위기감은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 해고위협, 노동조건 악화와 같이 위기를 전가하려는 자본의 시도에 대해 저항하기 어렵게 만든다. 여성의 일은 부차적이라는 관념은 노동자운동 또한 공유해온 것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투쟁에 있어서 여성노동자들이 주변화, 부차화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여성노동자들의 위기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조건에서 설사 여성들이 집중된 부문의 고용이 유지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성들에게 권리의 실현이라기보다는 억압적인 측면이 크다. 대불황의 경험에서 봤듯이 전체 노동자들의 고용이 불안하고 실업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일을 한다는 것은 저임금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동시에, 가족을 유지, 부양하면서 위기를 감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서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성 자신을 포함한 전체 노동자의 고용보장과 해고반대, 임금삭감 반대라는 과제와 맞물려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여성운동 진영이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한 ‘사회서비스 부문의 괜찮은 일자리 창출’ 요구의 위치를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사회서비스가 사회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여성들이 다수 종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로 제안될 수는 있다. 하지만 정부가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정책으로 추진하는 것은, 재생산의 위기에 따라 보육, 간병, 노인 돌봄과 같은 서비스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높아진 것에 대한 대응이자, 사회서비스 부문의 시장화를 통한 이윤 창출, 그리고 저소득층 여성들의 일자리에 대한 요구 관리 등의 필요에 따른 것이다. 실제 시행되고 있는 사회서비스 사업을 보아도, 이 정책은 여성이 가족 내에서 재생산 노동을 전담한다는 성별분업과 재생산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를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이를 활용하여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노동권을 제약하고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할당한다. 따라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요구가 의미를 가질 수 있으려면 단순히 실업과 일자리 대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정부의 사회서비스 시장화 전략에 대한 비판을 확산하는 가운데 재생산 노동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특히 지금과 같은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전체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해고를 반대하는 투쟁과 결합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제위기가 장기화되고 이에 따라 실업과 빈곤이 늘어날수록 가족과 재생산의 위기는 심각해질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이라면 여성들이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통해 저임금 불안정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을 보족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가족을 위해 이중부담을 감내하면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위기를 전가하려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모든 노동자들의 고용을 지켜내는 투쟁 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보편적 권리로서 사회서비스를 제기하고, 이를 사회가 책임지는 방식으로 일자리 창출을 제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운동이 중요할 텐데,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심리는 매우 위축되어 있고 노동조합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여하한 투쟁 계획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실제 자본의 공세에 맞서는 투쟁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동자운동이 대안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경제위기가 심화될수록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고용 유지를 중심으로 한 실리주의적 경향이 강화될 것이다. 위기 전가를 위한 자본의 공세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인종, 성별 등 다양한 차이와 분할을 활용하면서 노동자운동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을 한 축으로 한다. 노동자운동의 실리주의적 경향은 이러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고, 또 그 분열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세계경제가 대불황의 초입에 놓인 상황에서, 일정 정도 양보하거나 고통을 분담하면 이 위기가 지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친 낙관이다. 정규직 노동자의 요구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 비정규직과 실업자의 요구를 포괄하는 전국적 투쟁전선의 구축과 노동자운동의 단결된 투쟁을 형성하고, 위기를 넘어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운동은 여성노동자들의 현실과 요구를 필수적으로 참조해야 한다. 노동자운동은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이 가사를 전담한다는 성별분업 모델, 가정은 정치의 장소가 아니고 여성의 노동은 부차적이라는 이데올로기, 여성은 남성에 미달하는 존재라는 상징을 수용해왔다. 이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운동의 한 주체이기보다는 특수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부문으로 취급되었고, 여성노동자들의 고유한 요구는 배제되거나 가장 먼저 포기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여성에 대한 배제와 부차화가 지속된다면,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노동권 박탈로 지연시키려는 자본의 시도에 맞서 전국적이고 단결된 투쟁을 구축하기란 난망하다. 여성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주체화, 조직화가 필요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경제위기 하에서 드러나는 여성들의 생존과 권리의 파괴는 단순히 고용불안과 노동권의 박탈로 환원될 수 없고, 자본주의 하에서 가족을 매개로 한 여성억압의 구조가 제약하는 여성의 노동권과 여성권을 동시에 사고할 때, 진정 여성들의 권리와 해방을 위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노동자운동과 분리된 채 여성들만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관점 하에 이 글에서는 경제위기 시 여성노동자들의 운동과 투쟁의 큰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이후 경제위기가 전개되는 상황에 맞춰 더욱 구체적인 입장과 제안들을 만들어 가야할 과제가 남아있다. 무엇보다 여성노동자 스스로가 노조와 노동자운동에서 적극적인 부위로서 경제위기에 맞서는 투쟁을 벌여낼 수 있도록 주체화, 조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위기가 심화될수록 여성노동자들은 더욱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노동자 스스로가 일자리 보전이나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 극복을 위해 더욱 좋지 않은 조건을 감내하고 이중부담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삶과 권리 파괴에 맞선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노조와 노동자운동도 지금까지 여성들을 적극적인 주체로 사고하지 못했고 실리주의적 경향이 강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여성들의 주체화, 조직화는 축소될 수 있다.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와 생존이 파괴되는 상황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할 수 있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직화 사업을 펼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말했듯이, 여성들 스스로도 자신의 일차적인 역할이 가족을 보살피는 것이며 남성 가장에 비해 부차적인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와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속에서 가족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 오면, 자신을 조직하고 현실에 맞서기보다는 현실을 감내하고 수용하기가 더 쉽다. 따라서 여성들 스스로가 가족과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등 자신의 권리를 억압하고 제약하는 조건과 구조를 인식하면서 그것을 바꾸는 것이 자기 해방의 과제라는 신념과 이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식화, 조직화 과정을 통해 여성들이 운동의 주체로 나서서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의 단결된 투쟁을 촉구하고, 노동자운동 내에 여성들의 노동권을 제약하는 구조와 조건을 극복하는 것이 전체 운동의 주요한 과제임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서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위한 중장기적인 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강화되어야 한다. 노동자운동의 실리주의적인 경향이 강화될수록 여성노동자들의 주체화, 조직화는 어려워지고, 현재의 위기를 넘어서기도 불가능해진다. 사회의 변혁과 근본적인 대안을 지향하는 노동자운동의 이념과 실천을 형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운동은 여성해방 이념을 수용하고 여성운동과 결합해야 한다. 여성운동과 여성해방 이념의 관점에서 노동자운동의 전략과 목표를 혁신할 수 있는 방안이 꾸준히 제출되고, 노동자운동과 여성운동 양자의 결합을 추동하기 위한 시도들이 다각도로 모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재 가장 시급한 것으로, 경제위기 책임 전가에 맞서는 투쟁을 구축하는 것이다. 현재 비정규직법, 최저임금법 개악 시도가 여성노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여성노동자들이 이에 맞서 투쟁에 나서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로 다가오는 사안에 대한 투쟁에 그치지 않고 전체 노동자들의 투쟁을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와 실천을 통해 제기해야 한다. 고용보장과 해고반대, 잔업특근 축소와 조업중단 등으로 인한 임금 감소에 맞선 임금인상 요구, 실업급여와 사회보장 확대, 비정규직법, 최저임금법 개악 반대 등의 요구를 걸고 전체 투쟁전선을 형성하는 데 여성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나아가 금융과 초민족자본에 대한 통제 요구와 같이 사회적 투쟁을 제기하면서,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대응력을 강화하는 데 여성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진단과 제언 언론에 의해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 사건이 공개되고, 피해자 및 대리인의 기자회견이 있은 후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비대위가 꾸려지면서 이제 쟁점은 성폭력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2차 가해에 대한 진상으로 모아지고 있다. 민주노총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바닥에 떨어졌고, 여기저기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겠다는 시선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진상조사 결과가 나오면 이를 둘러싼 논쟁이 또 한번 예상되는 상황이다. 민주노총 내외부를 막론하고 철저한 자기반성과 혁신을 촉구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성폭력 사건에도 불구하고 한심하게 정파 대립이나 하고 있다는 개탄이나 이런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 전혀 놀랍지도 않다는 자조 섞인 비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더 우려스러운 것은 진상조사를 통해 일정 사건을 수습하고 선거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면서 민주노총 혁신에 대한, 여성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소멸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철저한 사건 처리는 기본이다. 그러나 사건 처리를 넘어 진정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계기로 삼기 위한 중장기적인 계획은 무엇인지를 논의할 수 있는 책임있는 자세와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 성폭력에 대한 노조 내 인식의 현황 이석행 위원장 검거에 관한 진술 지침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강간 미수’는 ‘성적’ ‘폭력’을 통해 피해자를 제압하고 의도를 관철시키려했던 시도로 보인다. 성폭력은 단지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적 폭력은 여성을 무기력하게 하고 통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타 인종을 절멸케 하고자 체계적으로 자행되는 전시강간, 국가에 의한 체계적인 성폭력인 군 위안부, 노동자/철거민 투쟁 과정에서 자행되는 구사대나 용역에 의한 성폭력, 범죄 신고를 막기 위한 안전판으로써 강도의 성폭력 등. 그러나 지금껏 이러한 폭력은 단지 그들의 야만성을 나열하는 데 추가되는 항목으로만 기술되었지 여성을 억압하는 특수한 위험과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운동사회에서 성폭력은 개별 활동가의 도덕성이나 자질부족 문제로 국한해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간부의 소양이 부족해서 성폭력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닌데, 성폭력 가해자를 소양이 부족한 사람으로 언급하고, 가해자 소속 정파나 조직 전체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상황이 그러하다. 물론 함께 활동하는 동지를 성적 폭력으로 제압하려고 한 시도는 활동가 사이에서의 신뢰와 예의를 저버린 행위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만 그친다면 정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공감’하는 사안만을 성폭력으로 인정할 수 있을 뿐 무엇이 성폭력인지를 폭넓게 설명하지 못한다. 개별 자본가의 착취가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구조의 문제이듯이, 여성의 몸과 정신에 대한 자기 소유의 권리인 여성권을 침해하는 것 또한 도덕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억압을 재생산하는 구조, 관행, 실천의 연장선상에서 성폭력은 발생 내지 존재한다. 여성억압을 재생산하는 구조, 관행, 실천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운동은 여성운동의 과제이지, 노동자운동의 과제가 아니라 여겨져 왔다. 노동자운동에게 여성 문제는 비정치적인 사안일 뿐, 보편적인 권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이 집에서 밥 짓고, 아이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성은 보편적인 ‘노동자’가 아닌, 누구의 아내, 엄마이고 따라서 출산, 양육으로 인한 경력단절, 우선해고 등은 여성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대수롭지 않은 현상이다. 남성가장이 쟁취할 임금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가족임금’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가장이 아닌(실제 가장의 역할을 한다하더라도) 여성들의 저임금은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덜 조직되어있고, 저임금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여성노동자의 노동권 제약은 여성의 역할과 임무를 규정하는 가족 및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노동자운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재생산하고 노동권을 제약하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여성억압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에 노동자운동이 나서야 한다. 공동체의 변화, 반성폭력 운동으로 충분한가 그간 운동사회 내에서 성폭력 규약을 제정하고, 이를 통한 사건 처리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교육 등 제반의 조치가 취해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조직적인 변화는 추동되지 않는 것일까. 사건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 등 외부에 사건을 유출하고 사건을 축소 처리하려했던 시도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성폭력에 대한 운동사회의 태도를 보여준다. 더디지만 변화하고 있다고 하기엔 그렇게 평가할 만한 긍정적인 지표가 보이지 않는다. 반성폭력 운동을 수행하는 주체가 재생산되고 있는가, 이것이 노동자운동 전체의 과제로 인식되고 있는가 등의 평가지점에 있어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는 모호하다. 그러나 더 강화되어야 할 반성폭력 운동의 실체는 무엇인가도 역시 모호하다. 현재 노조 내 반성폭력 운동은 규약에 따라 발생한 사건을 조사하고 결과에 따라 가해자를 처리하는 것, 성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전부다. 성폭력 사건을 가해자-피해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공동체의 성찰과 변화를 목적했던 반성폭력 운동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애초 성폭력 사건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반성과 변화를 도모하려던 반성폭력 운동의 구상은 실제 실행 면에서나 성과 측면에서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우선 사건이 발생하지 않거나 피해자가 공개를 원치 않을 경우에 진상조사위원회를 제외하고는 논의가 이뤄질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둘째 사건에 대한 논의는 그것이 성폭력에 해당되느냐 아니냐의 논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사건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왜 해당 사건이 여성억압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것인지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른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성폭력의 정의를 넘어서는 소위 ‘잘 이해가 안 되는’ 사안에 대해 질문하는 것조차 성폭력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논의지형이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는 다양한 차별과 폭력을 말하기 시작했지만, 남성들은 행여 논의하는 과정에서 2차 가해자가 될 위험 때문에 자신을 검열하며 차라리 입을 닫았고 결국 논의는 봉쇄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성폭력에 해당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성폭력 예방교육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알려주는 검열 지침으로밖에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현실의 반성폭력 운동 전략이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성폭력에 해당하는 단어를 쓰지 않게 하고, 그 말을 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가져오는 변화는 무엇인가. ‘노동형제’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노조 내 여성의 배제, 주변화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노동형제’에 배제되어있는 여성노동자를 주체화 조직화하는 운동이 존재할 때 현실은 바뀐다. 일 년에 한차례 실시하는 교육을 통해 노동자운동의 주체가 된 사람이 있을까? 여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노동현장, 가족 등에서 발생하는 여성 문제들에 대한 일상적인 토론, 여성 문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교육, 그리고 단지 학습만이 아닌 대중운동적 기획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을 접할 수 있는 현실의 운동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의 대안은 왜 법에의 호소가 아닌 정치적 실천인가 진상 조사 결과를 지켜보고 가해자 고소 건을 판단하겠다던 피해자 및 대리인 측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사건 축소 의혹 등에 따라 끝내 가해자를 고소했고, 검찰에서는 2차 가해 관련자들에 대한 내사에 착수했다. 일부에서는 피해자의 요구사항이므로 피해자 중심주의를 들어 이에 대한 지지를 절대화하는가 하면, 민주노총 내부의 불충분한 사건 처리를 근거로 2차 가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부의 적절한 재판을 촉구’하는 입장도 제출되고 있다. 그러나 법과 사법기관에 의한 처벌은 미흡한 내부의 사건 처리를 대체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할뿐더러 법에의 호소가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성폭력 ‘사건 발생’이 ‘범죄’로 성립되는 과정은 철저한 법정 논리가 작동한다. 이를테면 강간의 경우, "상대방의 반항을 불능, 현저히 곤란하게 할 수 있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간음"하는 것이 형법에서 정의되고 있는 강간의 죄목이자 범죄 구성 요건이다. 강간이 자행됐을 때, 피해자가 명백히 거부 의사를 밝혔는지,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는지, ‘확실히’ 성기가 삽입되었는지 여부가 강간죄의 성립 요건이다. 여성이 경험하는 성폭력이 법 논리에 따라 ‘범죄’로 성립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범죄로 성립되고 나서 남는 것은 폭력의 ‘경중’에 따라 형량을 매기는 것이 법적 대응 결과의 전부다. 강간이 성립했든 미수에 그쳤든 상관없이 입게 되는 측정할 수 없는 피해자의 상처는 법정에서 헤아려지지 않는다. 상처와 처벌이 교환되지도 않지만,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여성들을 절망하게 하는 것은 법이 여성의 권리와 성적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도는 재산권을 침해하는 죄라고 인식된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무엇을 침해하는가. 과거에 강간은 ‘정조’를 침해한 죄였으며, 현재는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빠져있다. 여성운동진영에서 성폭력이 여성의 성욕에 대한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권리로서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폭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나, 법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은 여성의 고유한 권리가 아닌 개인의 신체와 성적인 '사생활'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권리의 한 영역으로서 이해될 뿐이다. 맘에 드는 사람과 성적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남성의 권리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충돌했을 때, 법정은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의 권리에 근거해서 사건을 해석할 것인가. 결국 사건 사건에 따라 가해자 피해자 정황에 따라 판결할 뿐이다. 법에서 성폭력이 무엇을 침해하는 범죄이며 어떤 기준에서 판단되고 통제되어야 하는지를 여성의 고유한 권리에 의해 정의할 수 없다. 여성의 권리를 법에 기술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합의조차 되지 않고 있지만, 설령 법이 그렇게 바뀐다고 해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법은 발생한 사건의 가해자를 처벌할 뿐, 폭력을 예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규약도 마찬가지다. 부당해고를 당한 노동자의 대응이 기업주의 구속이나 복직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구조를 인식하고 주체가 되는 과정이 노동자와 노동자운동의 성장을 가져오는 것처럼, 성폭력에 대한 대응도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제약하는 구조를 인식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의 일환에서 사고될 필요가 있다. 여성이 처하게 되는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차별과 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과 실천 없이 발생하는 사건들을 처리하는 것으로는 여성해방이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대안은 법에의 호소가 아닌 정치적 실천이다. 노동자운동 혁신을 위한 책임있는 논의를 시작하자 누구나 민주노총의 혁신을 주문하고, 여성사업의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되어야 할 여성사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은 충분히 검토되지 않고 있다. 여성노동자의 아래로부터의 주체화․조직화라는 노동자운동의 기본적인 과제이자 장기적인 방향이 현실의 운동이 되기 위해 필요한 중단기적인 계획을 입안하기 위한 민주노총 내외부의 열린 논의를 제안한다. 우리도 책임있는 논의와 구체적인 실천에 함께 할 것이다. 당장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논의는 사건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노동자운동의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한지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이끌어내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매년 똑같고 현실의 쟁점을 담지 못하는 성폭력 예방교육이 아니라, 여성해방운동의 역사,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교육, 정세적인 쟁점 등 다양한 이론적, 운동적 내용을 담은 페미니즘 교육도 당장 추진해볼 수 있다.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여성 정책 및 과제에 대해 초정파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선거 공동정책단을 구성하여 요구안을 작성하고 이를 대사회적으로 제안하는 작업도 가능하다. ‘변화를 위한 도전’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