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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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 제41호

베이징 농민공 집단거주지의 신노동자운동

베이징노동자의집 노동절 맞이 문화제에 연대하다

  • 김모두
200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등장을 마주했다. 2005년 혼다자동차 공장 파업과 팍스콘 공장 연쇄 투신자살 사건 등을 계기로 시작된 운동은 광둥성과 푸젠성 등 개혁개방 이후 생산기지가 집중된 연안 지역에서 연달아 일어났다. 농촌 출신으로 도시에 이주해 값싼 노동력으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가 그간의 현실에 분노해 연달아 집단적인 행동을 일으켰다. (<지금, 중국 노동운동을 보라> 《오늘보다》 2016년 8월호.)
 
 

도시 속의 신노동자

흔히 ‘농민공’이라 불러온 이들 ‘신노동자’들은 2018년 현재 2억 9천만 명에 다다르며 지금도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의 비정규직처럼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며 일하고,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감내하며 도시 외곽의 허름한 집에서 생활한다. 한국의 비정규직이 850~900만 명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32~33배에 달하는 숫자다. 전체 인구수 대비 비율로 보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의 ‘불안정 노동자’(농민공) 숫자가 한국보다도 높은 셈이다.

베이징이나 충칭, 상하이, 광저우 같은 초대형 도시에서 이들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시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모든 거래에 이들의 노동이 숨겨져 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설 때 거의 모든 큰 건물 앞마다 서 있는 경비 노동자, 거리로 나가 마주치는 와이마이(外卖)와 콰이디(快递) 등 배달 노동자, 파인애플이나 전병을 파는 노점상, 미용실과 음식점의 점원, 고물상 등 도시의 가장 하위에 있는 모든 노동이 이들 농민공(이하 ‘신노동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이들은 월 1500~2000위안(약 35만 원) 정도의 돈을 받고 일하는데, 지난 두세 달간 꽤 절약하며 베이징에서 살아온 필자로서는 이 돈으로 대체 어떻게 한 달을 살 수 있는지 심히 궁금하다.

이들에게는 집이 없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등록된 호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농촌이나 중소도시에서 대도시로 이주해 10년 이상 일하더라도 이전 호적을 유지해야 한다. 집을 사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때로는 서울보다 비싸기도 한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높은 부동산 물가를 감당할 수 있는 신노동자는 아무도 없다. 이들이 100년을 일해도 마련하기 어려운 게 베이징 도심의 아파트다.
 

피촌으로 가다

베이징 외곽으로 향하는 버스가 점차 도심에서 벗어나면 버스 안은 농촌 출신 노동자들로 가득해진다. 이들은 낮에는 도심이나 주변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수천에서 수만 명 규모의 거주구역 내 작은 셋방에서 잠을 잔다.

베이징은 자금성에서 시작하는 순환로와 동서남북으로 구분되는데 2환에서 시작, 멀리는 6환까지 확대된다. (베이징을 둘러싼 허베이성에 7환 고속도로가 있긴 하다.) 건물이 2환에 가까울수록 비싸고 5환 밖으로 넘어서면 아주 조용한 농촌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베이징 자체가 워낙 거대해서 (강원도 정도의 면적) 5환을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5환 바깥에 신노동자들의 거주지가 곳곳에 펼쳐져 있다. 필자가 종종 찾아가는 피촌(皮村)도 그중 하나다.

처음 피촌 가는 길의 풍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전쟁 직후의 풍경을 방불케 하는 드넓은 폐허가 나타난다. 지난해 말 있었던 베이징 화재 사건과 시 정부에 의한 퇴거 조치들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시홍먼 지역을 비롯해 펑타이, 창핑, 하이뎬 등 베이징 내 135개 지역에서 벌어진 이 퇴거 조치는 수십만 명에게 영향을 줄 정도로 대대적이었다. 최대 10만 명이 강제 퇴거당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나로선 궁금할 수밖에 없다. 모두 어디로 떠났을까? 고향으로 갔을까, 아니면 다른 마을로 갔을까?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머무를 수 없는 도시> 《오늘보다》 1월호.)

피촌은 그나마 비교적 깨끗하고 화재 위험이 없다고 판단됐던 모양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생각보다 깨끗하고 넓은 거주구역이 나타났다. 커다란 아치 입구를 지나 피촌으로 들어가면 사막의 오아시스가 나타나듯 갑자기 활기찬 시장 거리가 펼쳐진다. 우리나라 읍·면사무소 소재지와 비슷한 풍경인데, 옷가게와 슈퍼 등 가게들이 모여 있다.

피촌은 신노동자의 마을이다. 현재 피촌 거주자는 2만여 명인데, 이 중 이곳에 등록되지 않은 외지인이 1만 8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실제 등록된 인구는 2천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대부분 ‘꽁위(公寓)’라는 허름한 복층 건물에 사는데, 건물 안엔 한국의 여인숙과 닮은 작은 방들이 빼곡하다. 이곳 주민들은 건물마다 있는 공동 화장실을 쓴다. 시장 물가는 대체로 저렴한데 이곳에서 찾은 한 산시(山西)국수집의 우육탕은 도심에서 먹은 어떤 국수보다 맛있고 깔끔하면서도 가격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베이징 노동자의집

 
‘베이징 노동자의집’(北京打工之家. 이하 ‘노동자의집’)은 바로 이 피촌에 있는 노동자 문화공간이다. 노동자의집 웨이신(위챗) 계정에 따르면 2009년 10월 일군의 활동가들이 모여 공회를 설립하고 이곳에 공간을 일구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다양한 교육·문화 사업으로 확대하고 있다. 피촌이라는 2만 명 규모의 농민공 마을이 활동 영역이지만, 이들의 유명세는 전국적이다. 공간은 과거에 작은 공장이나 창고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건물을 개조한 것인데 ㄴ자 형태의 단층 건물 두 채에 사무실과 신노동자역사문화박물관·영화상영관·극장·강의실·식당 등 공공시설이 있고, 그 밖에 활동가와 이곳과 함께 하는 노동자들이 함께 생활하는 숙소가 있다.

이곳에서 가장 손 꼽을만한 공간은 신노동자역사문화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신노동자’ 집단의 역사와 정책, 문화, 생활양식, 아동 문제, 여성 등의 쟁점에 대해 전시하고 있는데, 신노동자를 주제로 한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이를 광범위하고 풍부하게 다룬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나아가 십여 년간 신노동자의 정치적·계급적 성장을 위해 고군분투해온 노동자의집 활동에 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의사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만큼 이 장소가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 소중해 보였다. 내가 처음 갔을 땐 단체 관람 차 방문한 명문대 학생들이 있었는데 박물관만이 아니라 이들의 진지한 경청과 활동가 A의 열정적인 소개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무려 2시간이 넘도록 이 작은 박물관에서 연설과 대화를 지속했다. 이런 박물관이 빛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이런 만남이 이뤄질 때가 아닐까?
 
영화관 역시 매력적이었다. 시설이 풍족하진 않았지만 30평 정도 되는 공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이 있었고, 쇠락한 옛날 영화관에서 가져왔음 직한 영화관용 의자가 80여 석 정도 있었다.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이런 작은 영화관을 만들고 싶어했던 나의 오랜 꿈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노동자의집은 매주 토요일 저녁에 무료 상영회를 여는데, 중국 사회를 리얼리즘적으로 묘사한 극영화나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담긴 해외 영화들을 많이 상영한다. 지난 5월 12일엔 벤 애플렉이 연출한 을 상영했고, 4월 28일엔 <대불+>이라는 대만 영화를 상영했다. 두 영화 모두 비판적 시선을 견지한 영화들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주요한 행사가 이뤄지는 공간이 바로 ‘극장’이다. 지난 4월 30일 저녁에 열린 노동절 기념 ‘만회’(일종의 저녁 문화제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이곳에서 열렸다. 과연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참여할지 의구심이 들었다. 노동자의집 자체가 피촌 울타리 외곽에 있거니와, 이 작은 동네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얼마나 올까 싶었던 게다. 기우에 불과했다. 행사 시작 2~3시간 전 즈음부터 마실 나오듯 모여든 사람들은 7시가 되자 마당을 가득 채울 정도가 됐다. 마당에선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의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기부한 물건들을 저렴하게 팔고 있었고, 주민 몇몇도 자기 물건을 가져와 팔기도 했다. 딱지치기나 인형 놀이를 좋아하는 꼬마 아이들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녔고, 하늘에선 인근 베이징수도공항을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이 수시로 지나갔다.
 
 

마을 잔치 같은 노동절 문화제

저녁 7시 반이 되자 문화제가 시작됐다. 극장 안은 이미 발을 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빼곡해졌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300여 명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숫자가 눈에 띌 정도로 많았다. 언뜻 보면 어린이 장기자랑대회에 가족들이 참관하러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청년 노동자와 중학생이 공동 사회를 맡았는데,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의 역할을 나누고 있었다. 활동가들은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보조하거나 잡일을 맡고, 사람들의 참여를 북돋는 역할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공연 구성 역시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는데 정치적 내용보다는 가족적이고 지역 축제와 같은 분위기가 훨씬 강했다. 노동절의 의미를 환기하거나 신노동자의 자부심을 강조하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지만,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인지라 누구에게도 위화감을 느끼진 않는 것 같았다. 지역 소학교, 중학교 아이들의 공연이 많았고, 지역 주민의 노래, 활동가들의 연극 공연도 있었다. 연극 공연이 가장 기대됐었지만 아쉽게도 음향 문제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공연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곳에 오기 전까진 전국 대도시를 전전하던 농민공들이었는데, 베이징에서 노동자의집을 알게 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 듯했다. 이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노동자의 시와 노래(劳动者的诗与歌)’라는 연속 인터뷰로 제작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이런 방식의 시도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1시간 반에 걸쳐 진행된 문화제는 신노동자예술단 소속 쒸뚜어(许多)의 공연으로 끝났다. 그는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生活就是一场战斗)라는 노랠 불렀다. 이 곡은 쒸뚜어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로, 머나먼 타향에서 살아가는 신노동자의 거친 삶과 절망, 의지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그의 노래가 끝났을 즈음 극장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자리를 뜨고 20대~50대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남아있었다. 이들은 유행가처럼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신노동자예술단은 신노동자의 삶과 노동을 노래한 음악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전국 순회 공연을 하고 있다. (신노동자예술단의 활동에 대해선 국내에 출판된 《중국을 인터뷰하다》의 쑨형의 인터뷰를 통해 소개된 바있다.)
 

 

동아시아에서 더 많은 국제연대를!

문화제가 끝나고 그곳 활동가들과 인사하며, 나의 부족한 중국어 실력 때문에 충분히 이야기를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노쇠한 것처럼 보이는 한국의 사회운동에 반해 이곳의 활동은 이제 막 태어난 생기 넘치는 운동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들은 때로 한국의 70~80년대 노동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같은 영화를 보고 토론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자운동의 가능성을 점치고 고민한다. 이런 고뇌의 소산이 이곳 노동자의집에 모여 있고, 이곳엔 그런 열정으로 넘치는 활동가들이 모여든다. 4월 30일 저녁 역시 베이징과 인근 도시 곳곳에 있던 활동가들이 모여들었다. 학생이거나 노동자, 지식인인 이들은 이 거대한 도시에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든든한 동지처럼 보였다.

지도를 펼쳐 보자. 중국은 거리나 무역 규모만으로도 한국과 가장 가까운 국가다. 북한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지상 교통이 연결되면 지척에 다다를 수 있는 최인접 국가다. 하지만 정작 한국이나 중국의 노동자계급이 상대국가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중국 산업과 정치, 문화 등 다양한 현실에 대해 알아야 이 드넓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듯, 신노동자 운동의 조건과 현실을 인식하는 것 역시 중대한 과제다. 계급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상호 교류가 사회운동의 국제주의적 혁신의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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