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노동보다
  • 2018/02 제37호

방송 파업은 끝났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끝나지 않은 ‘이한빛’들의 이야기

  • 정가원
2016년 10월 26일, 티비엔(tvN) 혼술남녀의 신입 조연출이었던 이한빛 피디가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반 진담반 건네는 노동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팠어요”로 시작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 후 가족들과 청년유니온, 고인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대책위가 구성됐고, 232일간의 투쟁을 통해 씨제이 이앤엠(CJ E&M)으로부터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받아냈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 

한빛이 떠난 직후 공론화가 되기까지 우리가 마주해야만 했던 가장 큰 벽은 바로 “방송계의 관행”이었다. ‘내 친구가 왜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고자 우리는 한빛의 스마트폰 메신저 기록을 살피고, 유서를 읽고 또 읽었다. 결국 우리는 한빛이 일했던 현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한빛이 55일 동안 단 이틀 밖에 쉬지 못했던 그 현장. 그러나 유가족과 변호인이 보냈던 첫 질문에 씨제이는 “(드라마 현장은) 원래 그렇다”고 답변했다.

방송업계는 단기간 고효율을 뽑아내야하기 때문에, 장시간·고강도 노동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타이트한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 군대식 조직문화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떠나거나, 버티거나’. 방송업계의 관행을 버티지 못한 채 떠나면 ‘나약한 개인’이 되어버렸고, 끝까지 버텨 어떤 지위에 오르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관행을 강요하는 존재가 된다. 오랫동안 쳇바퀴를 돈 업계의 관행, 고유한 시스템처럼 자리 잡아버린 구조는 여전히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현실을 마주하며 우리는 가슴 아픈 결론에 도달했다. 한빛의 말처럼 “무책임한 탈주자도, 착취하는 사람도” 한빛은 될 수 없었고, 되고 싶지 않았구나. 그래서 더욱 한빛의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라마 현장의 문제는 결코 ‘이한빛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많은 이한빛들의 문제였다. 그랬기에 우리는 드라마 현장의 문제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듣고, 이 문제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대책위에 방송현장의 노동실태에 대한 제보센터 운영을 제안했던 이유였다.
 

‘tvN혼술남녀 신입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에서 진행했던 방송노동현장에 대한 제보센터에 4월 18일부터 4월 24일까지 제보된 응답 중 유효응답 106건을 분석한 결과 방송업계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9.18시간에 달했다.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 
욕하지 말라 
아프면 병원에 가자 
대책위에서 진행한 제보센터를 통해 가장 많이 들었던 방송노동자들의 요구는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 ‘욕하지 말라’ ‘아프면 병원에 가자’였다. 늦은 시간 일이 끝났지만 집에 갈 차비와 적절한 숙소를 제공받지 못해 근처 찜질방에서 잠을 청하고 다시 현장으로 향해야 했던 노동자, 밤샘 촬영으로 졸음이 오는 상태에서 장비차를 운전해야 하는 노동자, 촬영으로 병원 갈 시간이 없어 꿰맨 실밥을 자기가 직접 풀어야 했던 노동자 등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변하지 않는 제작환경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다음 주 방송되는 방송분량 대본이 이번 주에 나오니, 어떻게든 드라마를 내보내야 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수면시간을 포기하면서 촬영을 감행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고 대본을 고쳐야 하는 작가는 밤을 새며 대본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턱없이 부족한 회당 제작비 때문에 제작사는 적자를 줄이고자 예산에서 가장 삭감하기 쉬운 숙박비와 인건비를 삭감한다.

도제식·군대식 문화가 자리 잡은 현장에서 눈칫밥과 욕은 일상이다. 촌각을 다투는 촬영현장에서는 한 번의 실수나 개인 사정도 용납되지 않는다. “너가 일을 좆같이 하니까 현장이 느려지는 것 아니냐”는 말은 예사였고, 과로로 쓰러졌어도 “일하기 싫어서 농땡이 부리는 것 아니냐”는 말이 쉽게 나왔다. 때로는 시간에 맞춰 밥을 먹는 막내에게 “너가 아티스트냐? 같이 밥을 먹게?”라고 말한다. 일상적인 욕설과 군대식 문화가 묵인되는 이유는 현장이 바쁘기 때문이다. 주어진 예산 속에서 칼같이 현장이 운영되어야 한다는 부담은 일하는 모두에게 잔인한 현장을 만들고 있다. 
 
 
너 말고도 일하려고 하는 사람 많아
이 바닥에 소문 다 났어
모두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방송현장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소모품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현장 종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 중 하나는 “너 이 바닥에 소문 다 났어”라는 말이다. 한빛의 선임 피디 역시 녹취록에서 한빛에게 이 말을 했다. 불만을 제기하거나 개인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현장에서 “소문 다 났다”는 말이 너무 쉽게 나온다. 현장에서 일하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말이라고 하지만, 이 말 때문에 개인은 불합리한 현장 속에서 입을 다물게 된다. 

“너 말고도 하고 싶은 사람 많아”는 결국 “너는 부품이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언제든 바꿔 낄 수 있는 부품.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던 꿈은 누구나 꾸는 꿈이 되고, 언제든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는 빌미가 된다. 그렇게 한국 드라마 현장은 수십 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잘못된 관행을 바꾸기 위한 한걸음

사건 해결 후, 현장은 바뀌었는가? 씨제이 이엔앰은 지난 6월 유가족과 대책위에 사과를 하며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하겠다고 약속했다. 추모제가 있던 기간, 현장에서 더 이상 누구도 쉽게 욕을 하지 않는다는 스태프의 증언도 있었다. 대책위의 활동 기간 우리는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걸 확인했다. 한 드라마 촬영 현장에는 “고 이한빛 피디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OOO팀은 촬영종료 후 7시간 내에는 다음 회차 촬영을 시작하지 않겠다”는 문구를 촬영 현장에 붙이기도 하였다. 대본 앞에는 “이 드라마를 위해 촬영하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문구가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그대로라면 그대로다. 지금도 다음 주 방송분을 내보내기 위해 많은 노동자들이 잠을 줄이고 위험한 졸음운전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 티비엔 드라마 <화유기>에서는 무리하게 밤샘 작업을 하던 미술 스태프가 세트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된 사고도 발생했다.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현장에서는 촬영팀에게 급여를 상품권으로 지급하다 제보로 사실이 드러나자, 제보했던 스태프를 협박하는 일도 발생했다. 아직도 막내들은 밥 한번 먹을 때마다 눈칫밥을 더 먹고 있고, 여성 배우·여성 스태프를 향한 현장 내 성폭력도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시장이 열린 후 한국 드라마 제작은 수익구조의 상당 부분을 중국시장에 의존해왔지만, 사드 파동으로 중국 시장이 닫혀 제작비는 더욱더 부족해졌다. 드라마 100편이 나온다는 시대에, 제작사들은 찍으면 찍을수록 적자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노동 현장이 바뀌는 데는 한계가 있다. 많은 이들의 노력이 끊임없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방송업계의 관행은 바로 바뀌지는 않는다. 씨제이 이엔앰이 약속한 재발방지대책이 진정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의 목소리다. <방송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한줄기의 빛 사단법인 한빛>(이하 사단법인 한빛)은 아직 끝나지 않은 수많은 이한빛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출범했다. 사단법인 한빛은 현장 종사자들이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듣고,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제보센터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1월 24일 ‘한빛미디어인권센터’는 시민들에게 출범을 알렸고, 곧 드라마 제작현장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도 시작할 예정이다. 아직도 드라마 현장은 ‘그래 봤자 안 바뀌어요’라는 말이 더 쉽게 나오는 공간이다. 많은 죽음이 있었고, 바뀌어야 한다는 여러 사람의 호소가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모인 적은 없다. 영화산업노조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잘못된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잘못되었고, 해결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바뀌는 계기는 바로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목소리와 단결된 힘에서 나온다. 이를 참고하여 미디어 현장도 목소리와 힘을 모아야 한다.
 
 

언론노조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최근 케이비에스(KBS) 사장 고대영의 해임안이 이사회에서 제청되면서 케이비에스·엠비시(MBC) 양사의 투쟁이 어느 정도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기나긴 파업, 새로 취임한 최승호 사장이 언론계의 적폐를 끊어내겠다는 의지를 밝힌 만큼, 언론 개혁의 파고를 높여야 할 것이다. 왜곡되지 않는 언론, 건강한 언론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당당한 조합원들의 노력에 크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남아있다.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변화를 만들기 위한 노동조합의 노력은 보다 구체적이며 전략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현재 비정규직 스태프들이 느끼는 변화는 아마 그리 크지 않다. ‘아, 편성이 바뀌었구나.’ ‘예정됐던 드라마가 엎어졌네’. ‘그런데 현장은 언제나 똑같으니까’ ‘윗대가리가 바뀐다고 뭐가 바뀔까?’

깊게 배인 냉소에는 이유가 있다. 현장이 바뀌려면 비정규직 스탭 자신에게 조직적인 힘이 필요한데 여전히도 현장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성폭력을 상습적으로 자행하거나, 소위 최악의 현장을 만들어낸다는 감독들은 바뀌진 않았다. 방송 비정규직 스탭들의 노동권은 여전히 참혹하다. 언론노조 역시 이런 고민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단법인 한빛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한빛의 마지막 고민은 그것이었다. ‘방송가의 착취와 모순에 저항하는 운동가도, 어울리지 않는 옷을 벗어 던지는 탈주자도’ 자신은 되지 못했다는 것. 이는 한빛뿐 아닌 많은 방송계 종사자들이 느끼는 답답함이 아닐까?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면서,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드라마나 시사프로그램을 ‘엄청난 노동 강도’의 현장에서 만들어 내야 한다는 모순. 사단법인 한빛과 언론노동조합이 이 반복되는 모순을 끊어낼 길을 찾아낼 것이라 기대한다. 함께 살아서 했으면 너무나 좋아했을 이 운동이 한빛의 서른 살 생일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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