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조 할 권리
- 2016/06 제17호
방송작가, 조연출, 피디, 다 모여라!
방송사 비정규직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언론이 엉망이란 사실을 안다. 지상파 뉴스는 편향적이다 못해 대통령의 패션 따위나 보도하는 ‘땡박뉴스’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항상 그랬듯 우리 사회의 중요한 사건, 노동자들의 목소리, 아래로부터 터져나오는 절규는 들리지 않는다.
기자나 PD 같은 언론 종사자들이야말로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언론노조는 지난 8년여 간 ‘정권퇴진’을 한목소리로 부르짖어 왔다. 방송의 공공성 약화, 권력순응적 보도의 이유를 정권의 잘못된 정책과 부당한 개입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언론이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언론노조의 끊임없는 싸움 덕에 가능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KBS와 MBC에서는 공영방송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파업이 있었다. 그런데 왜 바뀌지 않는 걸까? 언론노조 조직쟁의실 이만재 활동가는 언론노조의 파업이 힘을 가지려면 언론방송계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현재 언론노조에서 미조직비정규사업을 맡고 있다.
방송은 몰라도 노동은 안다!
“방송 쪽엔 관심이 없어서 지상파나 케이블, IPTV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죠. 집에 TV가 없거든요.”
업계 용어로 시작될 줄 알았던 인터뷰는 예상치 못한 고백으로 시작됐다. 대학 시절부터 노동운동, 비정규직 조직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만재 활동가. ‘방송’은 몰랐지만 ‘노동’은 알았다. 노조 상근 활동 2년차, 그는 ’미디어산업의 변화와 비정규직 조직화’라는 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나름대로 문헌이나 조언을 통해서 많은 사례를 접했어요. 민주노총에서 나온 미조직 비정규직 조직화 사례는 웬만한 건 다 봤을 거예요. 특히 업계 환경이 비슷한 영화산업노조엔 몇 번이나 찾아가 많은 도움을 받았고요. 언론노조에서 유일하게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초기업노조 형태를 가진 서울경기출판노조 사례와 2000년도 전후에 구성작가들이 들고일어났던 여성노조 마산MBC분회 사례도 참조했죠. 그리고 노동운동의 지향을 고민하면서는 희망연대노조 자료를 많이 찾아봤어요.”
맨 처음 그는 막연히 노조 운동이 제조업과 공공부문 중심 또는 정규직 중심인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디어산업의 현황과 변화양상을 알아갈수록, 정규직 중심으로 구성된 언론노조에서 활동을 하면 할수록, 꼬인 실타래처럼 복잡한 문제들을 발견했다.
한류드라마 열풍, 수백 개의 채널에서 끊임없이 방영되는 드라마와 연예오락 프로그램 등 국내 미디어 산업은 빠르게 변화하며 성장해 왔다. 그는 미디어 산업의 급성장을 뒷받침하는 방송제작 시스템과 노동 조건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정규직만으로 미래 안 보여
방송산업이 확장되고 방송사 간 경쟁이 치열해지던 90년대 중후반,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이른바 ‘구조조정’은 방송사 인력감축을 넘어 불안정한 고용형태의 직군인 ‘비정규직’을 만들어냈다. 이에 따라 현재 방송 산업은 방송사에 직접고용된 정규직과 함께 간접고용, 특수고용, 상시계약, 한시계약, 바우처, 임시직 등 매우 다양한 고용형태로 구성된다. 특히 연출, 촬영, 음향, 조명, 편집 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과정에는 수많은 형태의 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소수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참여한다.
한편, 지상파 방송사의 독과점 방지를 명목으로 도입된 의무외주제작 정책은 결과적으로 외주제작업체를 통해 또 다른 비정규직 방송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부 거대 외주제작사를 제외한 대다수 외주제작사들은 거대 방송사의 하청업체 기능을 담당한다.
<2015년도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지상파 방송사의 2014년 연간 총제작비(1조 284억원) 중 자체제작비가 47.7퍼센트, 외주제작비가 50.5퍼센트에 달한다. 특히 SBS의 경우 62.3퍼센트를 외주제작에 맡기는 상황이다.
“한국의 방송제작에는 제대로 된 체계가 없어요. 방송제작을 통외주, 공동제작, 자체제작으로 나눈다고 하는데, 여기에 외주제작사나 기획사가 끼고, PD나 작가 같은 수많은 프리랜서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그래요. 이들 관계를 규정하고 권리를 보장하는 법적 규제도 없고 엉망이죠. 노조에서도 구체적인 시스템이나 비정규직 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상사파 방송의 비정규직(2311명/16.1퍼센트)은 정규직(1만 2054명/83.9퍼센트)과 비교했을 때 많아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현장 상황은 전혀 딴판이다. KBS가 외주제작 맡긴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은 스태프 총 85명 중 80명이 바우처, 계약, 용역, 파견 등의 이름을 가진 비정규직이다. 본사제작이라고 해서 상황이 다르진 않다. 2010년 기준 MBC의 ‘섹션TV연예통신’은 스태프의 80퍼센트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방송 쪽에 비정규직 비율이 너무 높아요. 보통 비정규직이라 하면 간접고용이 다수인데, 방송에서는 프리랜서가 압도적이에요. 프로그램 제작과정에서 정규직 조합원 비율은 얼마 되지 않아요. 외주제작은 조합원이 전혀 없고, 본사제작은 익히 알려진 시사교양에서도 본사PD와 카메라감독 몇 명 빼곤 없더라고요. 정규직이 많이 붙어서 만드는 프로그램에도 수십 명의 비정규직이 붙어요.”
걸음마 단계의 미조직 비정규사업
2013년 이강택 언론노조 전 위원장은 인터뷰에서 “방송사의 작업체계나 노동방식이 신자유주의 질서로 재편됐다. 2012년 파업 당시 대체인력이 투입되자 비로소 언론노조가 비정규직 문제에 얼마나 무감각해진 상태인가 깨닫게 됐다”고 뼈아픈 고백을 남긴 바 있다. 얼마 전 미디어오늘 정철운 기자는 언론총파업 이후 3년을 돌아보는 논평격의 기사를 통해, “비정규직의 노조조직화와 처우개선이 장기적으로 언론운동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후 언론노조는 무엇을 해왔을까?
“언론노조도 매년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고민하긴 했는데 실제 사업을 책임감 있게 진행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2001년에 사업계획이 있으면 2002년에는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제대로 없더라구요.”
올해는 PD, AD(조연출) 등 연출직과 방송작가로 조직화 대상을 명시한 사업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 언론노조의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 예산과 담당 인력의 규모로는 방송작가, 나아가 케이블방송, IPTV 등 다양화된 방송시장 비정규직에 대한 현황조사, 조직화 사업을 하는 게 어려워보였다. 산업 환경과 노동 조건이 급격하게 변한 만큼 노조 운동의 태세 변화 역시 절실하게 느껴졌다.
‘방송작가유니온’이 탄생하기까지
지난해 언론노조는 ‘미로찾기’라는 이름으로 방송사들이 밀집한 상암동과 여의도에서 노동상담 선전전을 진행하기도 했다. 거점 없이 유령처럼 흩어져 있는 당사자들을 찾는 일은 녹록치 않은 과정이었다. 어려움 끝에 하나 둘씩 방송 작가들을 접촉할 수 있었다.
드라마작가와 구성작가로 나뉘는 방송작가는 직급에 따라서도 메인, 서브, 막내로 나뉜다. 드라마작가의 경우 재택 업무가 많아 접촉하기 애매할 때가 많지만 구성작가는 다르다. 자료를 찾고 취재를 진행하는 등 방송국이나 현장에 출퇴근하는 명백한 업무 공간과 동선이 있다. 많게는 1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는 루트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프리랜서PD는 독립피디협회가 있고, 작가는 가입 자격조건이 있긴 해도 작가협회가 있어요. 또 이쪽은 교육기관들이 있어서 나름의 커뮤니티들이 형성돼 있거든요. 업계 정보를 교환하는 단체 카톡방도 여럿 있고요. 촬영·조명 같은 나머지 직종들은 그런 걸 파악하기 힘들어서 다가가기 힘들더라구요. 방송 쪽에선 프로그램은 같이 만들어도 타 직종하고 크게 교류가 없는 편이더라구요.”
이만재 활동가의 말처럼 방송산업의 직종별 분업화와 파편화는 다른 산업과 차원이 다르다. 조직화를 도모하기엔 악조건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작가든 PD든 자기 직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거든요. 그래서 타겟팅을 안 하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론노조는 개별 인맥 중심의 접근에 한계를 느끼고 홈페이지, 페이스북 페이지 등 인터넷을 통해 수소문해 작가들을 모았다. 그리고 방송작가 실태조사를 시작했다. 실태조사를 통해 더 많은 작가들을 만나고 모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난 3월초 온라인카페를 개설해 구심점을 만들었다. 지난한 과정 끝에 첫 단추가 채워진 셈이다. 이렇게 ‘방송작가유니온’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관행이라는 이름의 열정착취
방송업계에선 근로계약서든 사업계약서든 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아예 계약서라는 것 자체가 없다. 심지어 자기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일을 시작한다. ‘너 이거 해볼래?’하면 일하기 시작하고, 한 달 후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고서야 월급을 알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관행이라는 이름의 착취가 만연한 것이다.
얼마 전 한 시사교양 프로그램 PD가 자신의 SNS에 올린 막내작가 채용 공고글이 화제가 되었다. 그는 “무엇에도 쫄지 않고, 오늘만 살 막내작가를 기다립니다. 건강한 신체와 맑은 정신을 지닌 분들의 지원을 고대합니다”라고 썼다.
이 글을 본 한 작가는 이런 식의 방송업계 관행에 ‘아주 작은 예의’를 요구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구인의 최소한의 예의는 먼저 고용 조건을 밝히는 것. 그리고 합당한 정도의 노동, 즉 오늘만 사는 게 아니라 내일도 살 수 있는 정도의 노동이 절실하다”는 짧지만 묵직한 글이었다. 메인작가가 나서서 막내작가들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 셈이다.
“선배작가들의 참여에 힘을 많이 받기도 해요. 아무래도 실명을 걸고 활동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런데 선배들이 이렇게 뜻밖의 언론기고를 해주기도 했죠.”
작년 11월 있었던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방송작가의 55.5퍼센트가 주6일 이상, 52시간 넘게 일하고 있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한계인 1주 68시간을 초과해서 일한다는 응답도 20.2퍼센트나 되었다. 막내작가들의 처우는 더욱 열악하다. 대다수(73.5퍼센트)가 100~150만원의 월평균급여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차휴가, 월차휴가, 퇴직금은 꿈도 못 꾸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파견직을 선호하는 현상까지 생긴다. “방송국 본사에서 ‘리서처’라고 막내작가와 비슷한 일을 하는 직종을 파견으로 뽑아서 써요. 파견으로 나가면 최저임금, 4대 보험도 다 적용받고 야근과 주말근무도 적거든요. 외주제작사보다 월급도 나아요. 최저임금 수준보다 약간 더 높은 130~140만 원 정도? 그러다보니 요새 작가지망생들은 파견직을 선호하기도 해요.”
공감대 파고들어 힘 모은다
“프리랜서PD 한 분이 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빨리빨리 방송을 제작해야 하는 시스템에서 밤낮없이 작업하다가 지방출장으로 운전대를 잡은 거죠. 법적으로 다투기도 힘들어 산재 보상도 못 받았어요. 억울하죠. 업계에서는 흔한 일이에요.”
문화체육관광부는 방송 스태프 표준계약서를 권고힌다. 그러나 방송업계에서 이걸 적용하는 곳은 거의 없다. 권고가 아니라 의무사항으로 제도화해야 하는 이유다. 근무 중 교통사고 책임을 전액 노동자에게 돌리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미 확인됐다. 언론노조는 사례들을 근거로 산재 적용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켜나갈 예정이다. 국회에 대한 입법 압박, 대국민 서명운동 등 할 일이 태산이다. 방송작가만이 아니라 방송계 전반이 폭넓게 공감하고 함께 외칠 수 있는 요구를 제기할 것이다.
“어쨌든 표준계약서를 실정에 맞게 만들고 의무화하는 게 핵심이죠. 대다수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요구를 갖고 얘기하려고 합니다.”
진짜 노동조합, 탄탄한 조직!
방송작가유니온은 6월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정식 출범을 앞두고 있다. 올해 내에 조합원을 300명까지 확대하는 게 목표다. 이미 언론, SNS,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방송작가유니온 소문을 못 들어본 작가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한다.
“방송작가유니온 조직화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주노총에서 계속 노조를 만들어왔지만 망한 데도 많잖아요. 작가들은 노동조합이 뭔지 들어는 봤지만 어떻게 활동하는지는 소상히 몰라요. 자립의 힘이 생길 때까지 산별노조 중앙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활동가들이 교육하고, 함께 투쟁하는 경험이 필요하죠.”
그래서 이만재 활동가는 방송작가유니온에 관심 갖는 작가들에게 ‘작가들만의 노조’를 넘어 ‘민주노총과 함께 하는 노조’임을 강조하고 싶다고 한다. “방송작가들도 노조 만들기의 의의를 찾아가고 있어요. 노조가 단순히 이익 챙겨주는 곳, 신고센터와 법제도개선 대리해주는 곳이 아니란 걸 알아가는 거죠. 항상 이야기해요. ‘여러분이 직접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우리가 뭉쳐야 방송을 바꾼다
방송작가 비정규직의 권리찾기 운동이 성공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확 잘 되거나, 확 망하거나 둘 중 하나죠. 조합원 숫자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숫자는 많지만 조직 유지가 불안한 노조들을 보면서 조직이라는 게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무엇보다 이만재 활동가는 언론노조뿐 아니라 자기사업장에 갇힌 부문주의를 경계했다. 방송시장 노동자들은 직종 간의 분열이 만들어지기 쉬운 구조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보다 사회적인 의제와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아가 방송산업의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확대해 만날 예정이다.
“사실 이런 노력은 노조운동 뿐 아니라 미디어운동 차원에서도 필요해요. 인터넷 포털업체에 대한 접근도 필요하구요. 방송사는 외주화가 심해서 작가들만 빠져도 프로그램을 멈출 수 있는 구조예요.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고 또 싸우느냐에 따라 미디어 자본을 흔들 힘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6월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출범의 의미는 작지 않다. 방송사 특수고용 노동자 조직화의 첫 결실이기 때문이다. 그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었던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방송사 비정규직 권리찾기는 아직 걸음마 단계의 사업이다. 그러나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이 조금씩 넓어진다면, 방송을 바꾸는 것은 정권이 아니라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