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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 제36호

한겨울, 굴뚝과 거리로 나선 노동자들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하이디스지회· 동광기연지회 농성 현장

  • 한건희
지난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뭔가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을까. 라니냐 현상, 시베리아 고기압, 이도 저도 아니면 역시 지구온난화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매주 촛불 집회에 나갔기 때문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노동자들에게 이번 겨울은 작년 못지않게, 어쩌면 작년보다 훨씬 추운 겨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 강추위를 뚫고 거리 곳곳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예고 없이 자행된 공장 철거, 투자를 빙자한 기술유출, 그리고 무자비한 정리해고 등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왜 한파를 뚫고 굴뚝 위와 거리로 나서게 됐을까? 이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
파인텍지회 노동자들 

망원한강공원에서 성산대교 건너편을 바라보면 높이 솟은 굴뚝 하나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엘엔지(LNG)와 쓰레기를 태워 인근 지역에 전기와 난방수를 공급하는 열병합발전소의 굴뚝이다. 발전소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면 높이 솟은 메인 굴뚝 옆에 솟은 네 개의 굴뚝들이 보인다. 제일 높은 굴뚝보다는 조금 낮긴 해도 바라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 높이의 굴뚝 위에 사람이 있다.

12월 21일 저녁, 그 굴뚝 앞에서 투쟁 승리를 결의하는 문화제가 열렸다. 문화제가 시작되자 이내 굴뚝 위에서 작은 불빛이 하나 들어왔다. 75미터 높이의 굴뚝 위에서 농성 중인 파인텍지회 노동자들의 핸드폰에서 켜진 불빛이었다.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노동자들은 2006년에 처음 폐업을 경험했다. 당시 이들이 일하던 회사의 이름은 한국합섬이었다. 5년간 공장 정상화를 위해 막일과 상경 투쟁을 병행했던 노동자들의 노력으로 2011년 한국합섬 공장을 매입하겠다는 회사가 나타났다. 하지만 안도의 숨을 내쉴 새도 없이 공장은 다시 팔렸다. 800억원이 넘는 가치를 가졌다고 평가되던 공장을 399억 원에 매입한 스타플렉스는 스타케미칼로 이름을 바꾼 공장을 가동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다시 문을 닫았다. ‘먹튀’ 정황이 역력했다. 두 번째 폐업. 2013년의 일이었다.
 
ⓒ매일노동뉴스

많은 수의 조합원들이 공장을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진 2014년 5월. 당시 스타케미칼지회 지회장이었던 차광호는 공장 안 45미터 굴뚝에 올랐다. 408일에 달하는 고공농성의 시작이었다. 농성 때문에 공장을 매각하지 못해 애가 타던 스타플렉스 자본은 차광호를 내려오게 하려고 고용 보장, 노동조합 및 단체협약 체결, 생계 및 생활 보장을 약속한 합의서를 작성했다. 농성이 끝나고 이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타폴린 천을 생산하는 파인텍 공장이 세워졌다.
스타플렉스 자본은 파인텍에서도 변함없이 악랄했다. 한 달 내내 일해도 노동자들의 실수령 월급은 13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기숙사로 주어진 건물은 기본적인 청소조차 되어 있지 않았고, 합의서에 명시된 단체협약 체결도 이뤄지지 않았다.

다시 투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파업을 시작했다. 2006년 800명이 넘었던 조합원 중 파인텍 파업까지 남은 조합원은 5명뿐이었다.

장장 1년에 가까운 파업이 이어졌다. 2017년 8월 30일, 스타플렉스 자본은 파인텍 공장에서도 기계를 들어냈다. 세 번째로 문을 닫은 공장. 파인텍 공장이 있던 건물에는 아예 다른 사업체가 입주해 버렸다. 차광호가 408일 동안 굴뚝에서 싸워 얻어낸 약속은 깨졌다. 합법적 범위에서 할 수 있는 투쟁은 모두 해 봤다. 파인텍 노동자들은 다시 굴뚝을 선택했다. 408일의 고공농성에 더해 다시 40여 일 이상 지속 중인 혹한의 고공농성은 그렇게 시작됐고, 해를 바꾼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 앞, 하이디스지회 노동자들

“저 높은 철탑 위에서 혹한의 바람이 와도 우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 노래 <불패의 전사들> 중
노래 가사처럼 ‘혹한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리에 쩌렁쩌렁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날 문화제에는 높은 철탑 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파인텍지회 노동자들도 참여했다. 청운동 주민센터에서 청와대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하이디스 농성장 앞에서 열린 정리해고투쟁 1000일 연대문화제에서였다. 눈발이 거셌다. 거리에도, 자리에 앉은 사람들 머리 위에도, 농성장 비닐 천막 위에도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하지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하이디스 노동자들의 팔뚝질은 멈추지 않았다.

하이디스는 초박막액정표시장치, 소위 말하는 엘씨디(LCD)를 생산하는 업체다. 하이디스(HYDIS, 즉 HYundai DISplay)라는 사명에도 남아 있듯이 원래는 현대전자의 엘씨디 사업본부로 출발한 회사였지만, 2002년 11월 그룹에서 분리돼 중국의 비오이그룹에 매각됐다. 기나긴 먹튀 행각의 시작이었다. 쌍용자동차를 인수했던 상하이 자동차처럼, 비오이그룹은 하이디스의 기술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디스플레이 사업 경험이 없던 비오이그룹은 하이디스의 기술을 흡수해 중국 최대의 생산능력을 지닌 엘씨디 제조 기업으로 성장했다. 반면 하이디스는 지속적 경영난에 시달렸고, 급기야 2006년에는 법정관리에 들어가야 했다.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
 
이후 하이디스는 2008년 대만 이잉크사에 매각됐다. 그러나 이잉크의 인수 의도 또한 비오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잉크는 기술장사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이익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야금야금 생산량을 줄이며 노동자를 잘랐다. 결국 2015년 1월, 이천 하이디스 공장을 폐쇄하고 남아 있던 노동자 전원을 해고했다. 특허권료 등으로 수백억 원대의 흑자를 내는 상태에서 벌어진 ‘흑자 정리해고’였다. 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섰지만 돌아온 것은 회사의 손배소 압박이었다. 2015년 5월에는 회사의 손배소 압력을 견디다 못한 배재형 전 지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2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하이디스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선된 지 반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지노위에서 부당해고 판결을 받은 지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직을 위한 하이디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어지고 있다. 아침·점심·저녁으로 청와대와 국회 앞에서 선전전을 하고, 수요일 저녁이면 문화제를 연다. 12월 말을 기준으로 정리해고 후 약 1000여 일, 국회 앞에서 농성투쟁을 시작한 지 200여 일,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지는 50여 일째에 달하는 긴 싸움이다.
 

고속도로 옆 동광기연 노동자들

매일 출근하던 공장 앞에 농성장이 차려졌다. 인도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힌 두어 개의 천막. 그 옆으로 차들이 위태롭게 지나간다. 경인고속도로와 방음벽을 사이에 둔 동광그룹 본사 에스에이치글로벌 건물 앞 동광기연지회 노동자들의 농성장이다. 농성장 앞에서 열린 문화제에서는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무대가 차려졌다. 본사 벽에는 중노위 판결을 환영한다는 커다란 현수막이 무심히 붙어 있다. 부당해고를 인정하라는 지노위 판정이 나왔을 때는 아무 반응이 없던 회사가 자신들에게 조금 유리한 중노위 판정이 내려지자마자 내건 현수막이다.

상속세나 증여세를 내지 않고 자녀에게 회사를 물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녀 명의로 원래 있던 회사와 비슷한 일을 하는 계열사를 하나 만든다. 원래 있던 회사 이름으로 은행에서 돈을 빌린 다음 새로 만든 계열사에 거저 빌려준다. 일감도 새로 만든 회사로 넘긴다. 원래 있던 회사의 공장을 옮기고, 차익으로는 새로 만든 계열사의 주식을 산다. 이를 반복하다보면 자연스레 원래 회사가 자녀 명의의 회사로 이전되어 있다. 그러면서 원래 있던 회사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도 깎을 수 있다. 경영이 악화되었다고 핑계대면 그만이다. 이에 반발하는 노동자들은 잘라버리고 비정규직으로 대체한다.
 
ⓒ금속노조 동광기연지회

하나도 빠짐없이 동광기연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다. 물론 편법과 불법으로 점철된 악질 과정이다. 원래 있던 회사의 경영을 의도적으로 악화시켰으니 배임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노동자들을 해고했으니 부당해고이고, 노동조합을 무너트리기 위해 노조원들을 차별했으니 부당노동행위다. 당장 잡혀 들어가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이 악행을 저지른 장본인 동광기연과 계열사의 경영진은 아직도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동광기연지회가 사측과 맺은 노사합의서에는 노조와의 합의 없이 폐업·법인 청산·정리해고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지노위와 인천지방법원의 판정·판결을 이행하지 않았던 것처럼, 노사합의서도 이행하지 않았다. 지난 12월 11~15일, 중부지방고용노동청 주도로 동광기연 관계사들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이 시행됐다. 제대로 된 조치가 필요하다.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 연휴 직전에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은 후 동광기연 노동자들이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농성 투쟁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1년의 시간이 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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